“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 인터넷서점 예스24가 이런 제목의 광고 메일을 보내왔다. 이 메일을 본 어떤 사람들은 분노했고, 인터넷 커뮤니티 일각에선 예스24를 탈퇴하자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괄호까지 쳐 가며 애써 만든 ‘한남’이란 단어가, 최근 일부에서 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과 이에 반발하는 남성들의 충돌이 거세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런 현상을 ‘백래시(back lash)’라 칭하며, 페미니즘이 일으킬 변화가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을 것을 두려워한 남성들이 미리 페미니즘에 마녀 딱지를 붙이고 사냥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건 충돌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지만, 모든 것을 충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탈퇴 운동을 보며 한편에선 젊은 남성은 책을 읽지 않아 읽고 이해하는 능력도 떨어지며, 그들의 탈퇴가 도서시장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조롱했다. 이를 단순히 성 대결로 묘사하는 게 부적절한 데가 있다 해도, 이런 조롱 또한 긍정적이진 않다. 잘못된 근거에 기대는 등 반이성적이기까지 하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방영 전부터 제목과 출연 배우의 나이 차이를 이유로 여성 혐오 드라마로 낙인찍혀 비난을 받았고, 한 남성 예능인은 드라마를 호평했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받고 사과문을 써야 했다. 하지만 정작 이 드라마에 쏟아진 비난은 대부분 이 드라마의 실제 내용과는 거리가 먼 일방적인 것이었다. 이런 비난이 진지한 사유에서 우러난 반성을 낳을 리 만무하다. 최근에도 래퍼 산이 사건, 숙명여대 대자보 사건 등, 맥락을 구미에 맞게 편집해 성 대결을 부추기는 글이 늘어나고 있으며, 여기엔 심지어 언론도 동참하고 있다. 사유는 사라지고 조각난 선동만이 남았다.

‘한남’이란 단어 자체야 세상에 넘쳐나는 여성 혐오적인 단어에 비하면 사실 별것 아니다. 하지만 예스24의 광고 메일에서처럼 이것이 지식사회의 언어로 공공연히 사용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남’이란 단어를 통해 모든 남성들은 가해자로 묶여 조롱거리가 되는데, 그에 대한 반응은 사실 불문가지다. 젠더 권력의 기울기와는 상관없이 이런 범주화를 기꺼워하는 사람은 없다. 여기엔 두 가지 선택지가 있고, 그건 자신이 ‘한남’으로 묶인 가해자임을 인정하거나 부정하고 ‘백래시’를 일으키거나 하는 것이다.

여성이라면 몰라도 이미 사회적으로 자릴 잡은 기성세대 이성애자 남성들이 선구자 노릇을 하며 젊은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은 특히나 당황스럽다. 작금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쌓아올린 것이 그 기성세대다. 그 기득권을 잃을 일도 이제 없다. 젊은 세대는 군 문제로 인한 박탈감, 취업난과 격화된 경쟁으로 여유가 사라진 반면, 경력 단절 등 기울어진 운동장을 실감하긴 아직 이르다. 젊은 세대의 우경화가 걱정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방식은 반감을 부르기가 너무 쉽다. 기득권을 가진 기성세대가 심지어 비난과 계몽의 말로 젊은 세대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래서 때로 그건 젊은 세대의 이해를 구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한남’으로부터 분리하고 우월성을 잃지 않으려는 수단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은 물론 소위 인권 선진국 취급을 받던 유럽 각국에서도 노골적인 극우 반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국에서도 똑같은 실패를 재현하려 하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 말을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조심스럽기를 바란다. 비난과 계몽의 말이 아니라 반성과 공감의 말로써,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불러일으켜 함께 연대하는 방식을 추구하기를 바란다. ‘백래시’에 면죄부를 줄 순 없다. 때로는 논의하고 때로는 맞서 싸워 깨뜨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화의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고, 나는 이미 그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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