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2>역사와 종교 유적 풍성한 강화읍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한옥에 불교 양식을 가미하고 그리스도교 정신을 담은 독특한 건축물이다. 강화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청리 언덕에 자리 잡았다. 강화=최흥수기자

강화도만큼 역사 유적이 풍부한 곳이 있을까. 선사시대부터 근ㆍ현대에 이르기까지 민족사의 주요 고비마다 영광과 수난의 흔적이 남겨진 곳이 강화 땅이다. 그중에서도 역사와 종교 유적이 집중된 곳은 강화읍내다.

강화읍 걷기 여행의 시작은 관청리의 강화관광플랫폼, 중앙시장 B동을 관광안내소와 청년몰로 개조한 건물이다. 관광플랫폼으로 들어서면 ‘어서오시겨!’라는 인사말이 반긴다. 실제 발음은 말끝이 ‘겨’와 ‘껴’의 중간쯤 되는 강화도 사투리다. 관광플랫폼 내부엔 강화의 역사를 한 번에 훑는 대형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주요 관광지를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둘러보는 가상현실과 고려시대 의복 체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역시 관광안내다. 읍내를 소개하는 안내서는 소창길, 독립운동길, 종교이야기길 등 세 종류다. 그러나 똑 같은 지도에 주제별로 유적을 구분해 표시했기 때문에 실제는 어떤 지도를 택해도 상관없다.

 ◇스러져가는 왕조 위에 서양 종교, 용흥궁과 성공회 강화성당 

관광플랫폼에서 북문길로 조금 오르면 넓은 주차장 뒤편 언덕에 대궐 같은 한옥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제25대 왕 철종(재위 1849∼1863)이 살던 용흥궁인가 싶은데, 사실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용흥궁은 성당 아래 주택가에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민가와 섞여 있다. 국운이 다해 스러져가는 왕조에 서양의 종교가 군림하는 듯한 형세다.

담장 밖에서 본 용흥궁. 아름드리 단풍나무 한 그루가 철종의 원래 거처였던 비각을 덮고 있다.
용흥궁은 일반 주택과 좁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다.
용흥궁 주변 건물 옥상에 어가행렬 모형이 세워져 있다.

용흥궁은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강화유수(조선시대 정이품 외관 벼슬) 정기세가 새로 지은 건물이다. 내전과 별전을 갖췄지만 궁이라 하기에 턱없이 모자라고, 웬만한 양반집에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하다.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었기 때문이다. 철종은 헌종10년(1844) 이복형인 회평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로 유배돼 농부로 살았다. 용흥궁 내의 실제 거처는 더 옹색했고, 그 자리에는 비석과 비각이 남아 있다.

반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터부터 다르다. 마당에 서면 유럽의 여러 성처럼, 동남서 세 방향으로 강화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북측은 강화산성의 한 줄기와 이어져 있어 풍수에 문외한이라도 명당자리가 이런 곳인가 싶다. 강화성당은 1900년에 대한성공회 고요한(Corfe,C.J.) 초대 주교가 건립했다. 한옥에 불교 양식과 유럽의 바실리카 양식을 가미해 종교적,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는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팔작지붕 솟을대문을 통과한다. 문 안에는 커다란 동종이 있어 사찰의 범종각처럼 보인다. 본관 정면에 한자로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는 현판을 내건 모습이나, 기둥마다 성공회 교리를 한자로 써 놓은 것도 대웅전과 유사하다. 마당 한쪽에는 아름드리 보리수나무가 묵묵히 버티고 있다.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불도를 이루었다고 하는 나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입구. 계단 위 솟을대문 안에 사찰처럼 동종을 보관하고 있다.
서까래에 태극문양과 성공회 십자가가 함께 그려져 있다.
강화성당 내부의 고풍스런 샹들리에.
성공회 강화성당 서측 모습. 강화초등학교(오른쪽 긴 건물) 뒤편이 고려궁지다.

정면 4칸, 측면 10칸의 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가지런하게 뻗은 서까래 아래 샹들리에가 고풍스럽다. 바깥에서 2층처럼 보이는 창으로는 자연 채광이 은은하게 비춘다. 목재는 백두산에서 압록강을 거쳐 운반해 왔고,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한옥 건물에 교회 기능을 충실히 담아내, 초기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 성당이 강화에 자리 잡은 연유는 조선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라 할 ‘통제영학당’과 관련이 깊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바로 보이는 언덕 아래가 통제영학당이 있던 자리다. 학당은 1893년 고종의 해군학교 설치령으로 세워졌는데 이때 초빙한 교관이 영국인 코웰 대위와 커티스 하사였다. 생도 38명과 수병 300여명이 군사훈련을 받던 통제영학당은 일본의 압박으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가 이듬해 11월 문을 닫고 말았다.

 
 ◇흔적만 남은 옛 도읍, 고려궁지와 강화산성 

1232년(고종 19년) 고려는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을 개경(개성)에서 강화로 옮긴다. 1270년(원종 11년) 환도하기까지 강화는 38년간 고려의 도읍이었다. 남북분단 이후 아주 먼 곳으로 인식되지만, 강화도 최북단 평화전망대에서 개성까지는 직선으로 불과 20km 떨어져 있다.

고려궁터로 가는 길의 타일 벽화. 몽골군과 맞서 싸우는 고려군사의 모습을 그렸다.
병인양요 때 모든 건물이 소실된 고려궁터에 현재는 동헌, 외규장각, 이방청 등을 복원해 놓았다. 넓은 잔디밭은 한때 강화에서 인기 있는 웨딩촬영 장소였다.
강화산성 북문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고려궁지의 외규장각.

성공회 강화성당에서 북문길로 조금 더 올라가면 고려궁궐터다. 무신정권의 수장 최우는 군대를 동원해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개성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불렀다. 그러나 고려 궁궐은 환도할 때 몽골의 압력으로 모두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행궁과 장녕전, 만녕전, 외규장각 등이 있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또다시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 등을 복원해 놓았다. 고려궁터에 실제 고려의 유적은 하나도 남지 않은 셈이다. 궁의 규모도 강화읍 관청리 일대를 아우르는 것으로 추정하지만, 현재는 산자락 일부만 궁궐터로 보존하고 있다. 궁궐 서쪽 계곡에는 당시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우물이 남아 있다. 현재는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지만, 주민들은 왕의 우물, 왕자정(王者井)이라 부르며 물을 길어 먹기도 했다. 건물이 사라진 궁터는 넓은 잔디밭으로 덮여 있어, 한때 강화에서 결혼사진 촬영지로 각광받았다.

강화산성 북문 진송루.
강화산성 북문으로 가는 길에서 본 강화읍. 정면 가운데 봉우리에 강화산성 지휘소인 남장대가 있다.

고려궁지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강화산성 북문인 ‘진송루(鎭松樓)’로 연결된다. 강화산성 역시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가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처음 쌓았다. 당시엔 토성이었으나 1637년 병자호란 이후 파괴되고, 조선 숙종 때 전면 보수하면서 강화읍내를 한 바퀴 둘러 7.12km 규모로 확대됐다. 망한루(望漢樓), 첨화루(瞻華樓), 안파루(晏波樓), 진송루(鎭松樓) 등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 누각을 갖추고, 북산과 남산 정상에는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북장대와 남장대를 세웠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일본군이 쳐들어오는 등 근대까지 역사의 현장이었던 강화산성은 세월 속에 잊혀졌다가, 2003년 동문을 마지막으로 모든 성문을 복원했다.

북문으로 가는 길 양편엔 제법 굵은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는데, 한국전쟁 때 강화로 피란 온 개성 사람들이 강화의 인심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심은 것이다. 강화와 개성의 인연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이 길에서 내려다보는 강화읍내의 풍경이 포근하기 그지없다.

 ◇한 집 건너 면직물 공장, 강화 소창을 아시나요 

강화는 한때 읍내 전체가 면직물 공장이었다. 가장 규모가 큰 심도직물 직원만 1,200여명에 이르렀고, 동광직물, 이화직물 등 읍내에 20여개의 크고 작은 공장이 있었다. 여기에 가내수공업까지 포함하면 한 집 건너 한 집이 직물공장이었다. 전국 소창의 60%를 강화에서 생산했다 하니 대구 못지 않은 섬유의 도시였다. 이름도 생소한 ‘소창’은 이불 안감이나 기저귀감으로 쓰는 천으로, ‘소창길’은 바로 강화의 전성기를 더듬는 길이다.

용흥궁 주차장 인근의 심도직물 굴뚝. 강화의 전성기를 추억하는 상징물이다.
소창의 원료인 면화와 강화도의 상징 저어새로 장식한 소창체험관 외부 담장.
옛 금융상사 건물에 담쟁이가 덮여 있다.
소창체험관에서는 다양한 문양을 찍어 소창 손수건을 만들 수 있다.

용흥궁 주차장 앞에는 철심을 드러낸 낡은 굴뚝의 상단부가 남아 있다. 30m 높이의 심도직물 굴뚝은 강화의 자존심이었다. 안내문에는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한 이 공장을 거쳐간 사람만 1만명이 넘고, ‘코오롱도 경쟁이 안 될 정도로 독보적이었다’고 적혀 있다. 지금 식당과 상점이 들어선 강화읍사무소 일대도 모두 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낡은 기와에 두꺼운 페인트로 방수막을 친 옛 ‘금융상사’ 설명문에 적힌 평화직물 공장장 김웅태씨의 회고도 재미있다. ‘직물공장에서 돈을 지게로 지고 와서 맡겼다’라고 할 정도로 강화는 전국에서도 소문난 부자 동네였다. 금융상사는 한일은행이었다가 지금은 강화할인마트 간판을 달고 있다.

강화관광플랫폼에서 걸어서 약 5분 거리의 ‘소창체험관’은 1938년 건축한 옛 평화직물 한옥과 염색공장을 개조한 체험공간이다. 족답기 베틀로 1960년대 직물 짜는 체험을 할 수 있고, 소창에 다양한 문양을 찍어 손수건을 만들 수도 있다.

조양방직 공장을 개조한 조양방직 카페 내부.
조양방직 카페 외부. 옛날 ‘공장’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다.
높은 천장과 넓은 벽면을 활용한 조양방직 카페 내부.

인근의 ‘조양방직’은 이름을 그대로 두고 공장을 카페로 개조했다. 조양방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방직공장으로, 1930~60년대 최고의 인조직물을 생산해 강화 섬유를 널리 알린 기업이었다. 옛날 공중전화 부스를 놓은 넓은 마당 한쪽에는 금고 건물이 남아 있다. 규모가 작지 않아 돈을 지게로 져서 은행으로 날랐다던 말이 과장이 아닌 듯하다. 삼각형 지붕 외관은 ‘공장’하면 떠오르는 모습 그대로다. 카페 내부는 높은 천장을 유지한 채, 방직기계가 일렬로 늘어서 있던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해 공장 분위기를 최대한 살렸다. 은은한 조명과 음악이 색다른 멋을 더한다.

중앙시장 한 개 동을 개조한 강화관광플랫폼. 2층에 먹거리 위주의 청년몰이 입주해 있다.

강화읍내 소창길과 종교이야기길 유적은 강화관광플랫폼을 기준으로 모두 걸어서 10분 이내 거리에 위치해 있다. 관광플랫폼 건물 뒤편에 공영주차장이 있고, 성공회 강화성당과 고려궁터 앞에도 주차장이 있다.

강화=글ㆍ사진 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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