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혁, 靑 복지부안 재검토 지시에 길 잃어
“추가 보험료 인상 필요한 상황, 투명하게 설득을”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국민연금 개혁을 촉구하는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배우한 기자

정부가 국민연금의 보험료율 인상을 전제로 한 제도 개편을 추진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 여론 수렴을 이유로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개혁 방향의 갈피를 못 잡는 모양새다. 문 대통령은 보험료율 인상 폭이 커 국민 눈높이 수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지만, 덜 내고 더 받는 묘안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특히 사상 처음으로 ‘국민연금운영종합계획안’ 마련을 위한 국민 의견을 직접 수렴하는 절차를 거쳤음에도 ‘여론 수렴’카드로 개편 논의를 미루는 것은 책임정치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무려 33차례 의견 수렴했는데

8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복지부는 지난 9~10월 사이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의 뜻을 반영한 정부안을 만들기 위해 직·간접적 여론 수렴을 해왔다. 전국 16개 시ㆍ도별로 국민토론회를 열어 일반 시민 의견을 청취하고 경영계ㆍ노동계ㆍ시민단체ㆍ연령대별 대표자 등 10개 그룹과 17차례 포커스그룹 간담회를 진행하는 등 총 33차례 만남을 가졌다. 직접 만남이 어려운 국민들을 위해 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 등에 온라인 소통창구도 열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복지부가 문 대통령에게 보고한 초안은 모두 보험료 인상을 전제로 한 것들이었다.

보험료 인상이 전제된 개편 초안이 알려진 후 여론은 들끓고 있다. 이날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국민연금 제도 개편과 관련된 청원이 7일에 이어 수십여건 올라왔다. 전날 올라온 청원은 “보험료율 인상을 자제해달라”는 내용이 압도적이었다면,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 후 올라온 청원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생애 평균소득 대비 연금액)을 50%로 올려달라”, “국민연금 대신 기초연금을 인상해 달라”, “납부연령을 18세로 낮춰 달라”, “국민연금 의무가입 규정을 폐지해달라” 등으로 요구가 다양해졌다. 이를 두고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에 참여한 한 위원은 “국민연금 제도 개혁이 10년 넘게 이뤄지지 않아 문제가 쌓여 있기 때문에 논의는 공전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며 “복지부가 지금까지 형식적으로는 국민의견수렴 행위를 해왔는데 여기서 더 국민의견을 수렴하라는 지시가 어떤 의미인지 회의적”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이 ‘국민여론 수렴’을 이유로 개편안을 반려했지만 국민연금 개편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출렁이는 여론을 ‘진짜 여론’으로 단정짓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다. 김상균 서울대 명예교수(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 위원장)는 “국민연금은 납부자와 수급자, 현재세대와 미래세대,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소외계층(사각지대)까지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국민연금공단이 국민연금 개편 방향과 관련해 지난 9월17일부터 10월5일까지 국민연금 가입자 및 수급자 2,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을 한 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들의 ‘모순적 태도’가 드러난다. 국민연금에 40년 가입시 소득대체율은 50%가 적당하다는 답이 45.5%로 압도적이었지만 향후 국민연금 개편은 ‘현재보다 더 내고 더 받는 방안(27.7%)’보다 ‘현재 그대로(47.0%)’ 유지하고 싶어했다.

◇알면서도 숨기는 국민연금의 현실

이런 상황에서 ‘덜 내고 더 받는’ 개편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제4차 재정계산에 따르면 국민연금 제도가 현행(보험료율 9%)을 유지할 경우 현재 643조원에 달하는 적립기금이 2057년 고갈된다. 이렇게 되면 지난해 태어난 아이가 40대가 되면 버는 돈의 30% 가량을 보험료로 내야 한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현재 국민연금이 안고 있는 문제는 모든 사람이 적게 내면서 많이 받아가는 구조 때문”이라며 “대통령의 공약대로 노후소득보장을 강화하려면 추가 보험료 인상이 필요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국민연금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안일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민연금 보험료율 인상을 최소화하면서 노후소득을 보장하려면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퇴직연금을 활용한 ‘다층 소득보장체계’ 강화가 대안으로 꼽히지만 국민 부담이 줄어든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민연금은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를 거두어 형성한 기금이지만, 기초연금 재원은 정부가 거둔 세금으로 형성된 일반재정이기 때문에 조세부담이 늘어난다. 국민연금보험료율 인상 없이 기초연금을 인상하거나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게 해법이 아니라는 얘기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득대체율을 45%, 50%로 증액할 때 보험료를 충분히 인상하지 않으면 국민연금을 부과방식으로 전환하거나 재정이 부족해 국고를 지원해야 하는 시기가 빨라진다”며 “결국 2030년 전후로는 국민연금 수급 나이를 늦추거나 일정 연령이 되면 연금을 감액하는 자동조절장치 도입이 불가피하지만 정부가 이를 알면서도 국민들에겐 투명하게 설명해주지 않으니 여론이 왜곡된다”고 말했다.

결국 문 대통령이 ‘국민 여론 수렴’을 핑계로 개혁을 미루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문 대통령이 결국 인기 없는 개혁은 안 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최원선 바른미래당 부대변인도 “청와대가 ‘국민 눈높이에 맞추라’는 실체 없는 말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윤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이 당면한 문제를 여론에 떠밀려 숨기는 방식은 곤란하다”며 “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를 투명하게 알리고 정부가 국민을 설득해가며 해결하는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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