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인간과 닮은꼴 마네킹ㆍ더미의 기구한 삶
서울 용산의 서울경찰청 과학수사팀 사무실에 보관 중인 현장검증용 마네킹. 범죄의 잔혹성을 증언하듯 군데군데에 무수한 상처가 나 있다. 마네킹은 그동안 납치, 살인, 강간 등 강력범죄 피해자를 대신해 현장검증에 투입돼 왔으나 경찰청의 현장검증 최소화 방침에 따라 그 역할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경기 파주의 한 신도시 부근 교차로에 교통경찰 복장의 마네킹이 배치돼 있다.
경기 화성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이 운용하는 자동차 충돌시험용 더미.
경기 수원의 한 도로 공사장에 배치된 마네킹이 차량의 안전운행을 유도하고 있다.
게임방에 설치된 펀치 게임에도 인간의 모습을 한 더미가 활용된다.
경기 고양시의 한 격투기 체육관 앞에 버려진 스파링 더미.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면 인간은 마네킹을 만들었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외모를 마네킹에 구현하기도 하고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임무를 대신 완수하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외모보다 특정 쓰임새에 집중하도록 만든 ‘더미(Dummy)’ 역시 인간 대신 궂은일을 도맡아 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의 이기심이 커질수록 다양한 기능과 생김새를 지닌 ‘대역 인간’은 늘고 있다. 그들의 기구한 삶을 살짝 엿보았다.

#맞아야 사는 스파링 더미

‘얼굴 타격 금지’

경기 고양시의 한 격투기 체육관 앞에 버려진 ‘스파링 더미’는 이마에 적힌 경고 문구 때문에 더 짠해 보인다. 이미 무수히 얻어맞아 코끝이 떨어져 나간 얼굴과 목 주위에 여러 겹 둘러쳐진 접착테이프로 미루어 더 이상 임무 수행이 어렵다는 ‘TKO’ 판정을 받은 듯하다.

발포 우레탄 소재의 스파링 더미는 그야말로 맞기 위해 태어난 ‘짝퉁 인간’이다. 격투기 체육관이나 요즘 ‘핫’한 게임방에서 인간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많이 맞을수록 존재감이 커지는 ‘웃픈’ 인생이다.

#잔혹범죄의 희생자

범행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는 현장검증에서 마네킹은 희생자를 대신한다. 현장검증이 한편의 잔혹극이라면 이보다 더 궂은 배역이 또 있을까. 가발을 쓰고 옷을 걸친 채 등장한 마네킹은 성폭행 뒤 살해당하거나 팔다리가 분리된 채 끝내 암매장되는 장면에 투입된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마네킹을 바라보며 유가족은 또 한 번 무너지고 만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앞으로는 희생자를 연상케 하는 마네킹을 볼 일이 줄어들 전망이다. 경찰청은 지난 8월 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현장검증 최소화 방침을 밝혔다. 재연 없이도 CCTV 영상으로 범행 과정 확인이 가능한 데다 피의자 인권 침해 소지도 없애자는 취지다. 마네킹을 동원한 재연을 통해 피해 과정이 노출되면서 유가족 등이 2차 피해를 입는 문제도 고려됐다. 강서구 아파트 살인사건과 PC방 살인사건도 이 같은 이유로 현장검증을 실시하지 않고 대역 희생자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2017년 10월 11일 ‘어금니 아빠’ 사건의 현장검증이 진행된 서울 중랑구 망우동 주택 앞에서 경찰이 마네킹을 운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1월 4일 전북 완주군 봉동읍의 한 아파트에서 실시된 고준희양 학대치사 및 암매장 사건 현장검증 도중 피의자인 친부가 준희양과 비슷한 몸집의 마네킹을 차량에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 파주의 한 신도시 부근 교차로에 교통경찰 복장의 마네킹이 배치돼 있다.
#늘어나는 마순경

도로 위에선 경찰 역할을 대신하는 마네킹이 등장했다. 실제 경찰 근무복 차림의 일명 ‘마(네킹)순경’은 운전자의 주위를 환기시키고, 넓은 관할 구역에 비해 경찰 인력이 부족한 문제도 일부 보완한다. 현재 경기 파주시에 20개, 충청북도 28개를 비롯해 충남과 제주 등지의 교통사고 위험 지역에 배치돼 있다.

간혹 “시민을 기만한다.” 또는 “잔머리를 쓴다”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마순경의 교통사고 예방 효과는 상당하다. 파주경찰서에 따르면 2017년 8월 기준 관내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1년 전에 비해 46% 감소했다.

하지만 마순경 입장에서는 복장이나 장구는 전역 의경이 반납한 재활용품이 대부분인데다 궂은 날씨에도 도로변에 서 있어야 하는 등 도로 공사장 인부 마네킹보다 크게 나은 점이 없다. 비나 눈이 오면 우의를 걸칠 수 있고 수시로 근무 장소가 바뀌는 등의 혜택이 있지만 이는 사고 예방 효과를 높이기 위한 ‘관리’일 뿐이니.

#쇼윈도 모델

쇼윈도 앞에서 종일 같은 자세로 서 있는 패션모델은 마네킹의 역할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한다. 의상을 최대한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태어난 덕분에 마네킹은 이상적인 몸매의 대명사로도 통한다. 마네킹 제작업체 ‘M’사 관계자는 “서구화하는 한국인의 체형 변화에 맞춰 점점 더 날씬하면서도 볼륨감 있는 체형으로 제작하는 추세”라고 밝혔다.

같은 패션모델이라도 번듯한 백화점을 벗어나 시장 골목이나 노점 밀집 거리에 들어서면 군데군데 상처 입고 색이 바랜 중고 마네킹이 널렸다. 심지어 얼굴이나 상체, 하체, 팔다리 등 필요한 부위만 따로 분리된 채 쓰이는 엽기적인 장면도 흔하다. 최근에는 온라인 쇼핑이 대세로 부상하면서 오프라인용 마네킹의 존재감은 위협받고 있다. 의상을 입고 맵시를 뽐내는 마네킹의 원초적 역할을 일명 ‘뽀샵’의 힘을 빌린 인간들이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서울 명동의 한 노점상에 중고로 보이는 마네킹이 설치돼 있다.
서울 홍대앞 노변에 진열된 스타킹 용 부분 마네킹.
서울 명동의 한 의류매장 건물 옥상에 폐기 처분을 앞둔 마네킹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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