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18>영화감독 김일란

영화로 ‘용산참사’의 진정한 공동정범을 스크린에 소환한 감독 김일란. 그를 1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배경에 성 소수자의 상징이자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의미의 무지개 깃발이 걸려있다. 홍인기 기자

김일란(46)은 기자를 부끄럽게 한 감독이다. 2012년, 잊힐 뻔했던 용산 참사를 3년 만에 스크린에 소환했다.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을 보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영화에는 단독 사실들이 촘촘하게 들어차 있었다. 대부분의 언론이 추적을 놓아버렸던 1년 10개월 간의 재판을 끈질기게 기록한 덕분이다. 압권은 이미 알려졌듯 제목인 ‘두 개의 문’이었다. 경찰이 왜 협상을 사실상 포기하고 철거민의 망루농성 시작 7시간 여 만에 특공대 투입을 결정했는지, 옥상에 있는 문 두 개 중 어느 것이 망루로 가는 문인 줄도 숙지하지 못한 채 왜 그리 성급하게 작전을 몰아붙였는지 영화는 묻는다.

올해 1월 개봉한 후속작 ‘공동정범’에는 더욱 기가 눌렸다. 영화는 참사 이후 생존 철거민의 삶을 좇았다. 검찰은 농성 철거민 전원을 공동정범으로 기소했고, 대법원은 유죄를 확정했다. 당시 주심 대법관은 사법 농단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었다. 용산철거민대책위원장이었던 이충연씨를 비롯해 7명이 징역 4~5년 형을 선고 받아 실형을 살았다.

영화에는 남일당(참사가 발생한 서울 용산의 건물)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정신적인 괴로움, 철거민 사이의 반목과 화해, 아직도 의문투성이인 참사의 원인을 둘러싼 의혹이 담겼다. 그리고 또다시 물었다. 이들이 과연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의 생명을 앗아간 참사의 공동정범일까. 무리하게 경찰특공대 투입을 지휘했던 당시 김석기 서울경찰청장(현 자유한국당 의원)과 당시 청와대의 주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책임은 무엇일까. 참사의 진정한 공동정범은 누구인가. 언론이 던졌어야 할 질문, 정부가 규명에 나섰어야 할 물음표였다.

극장을 찾아 두 영화를 본 8만 관객의 가슴도 기자처럼 뜨거워졌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이뤄진 경찰과 검찰의 진상조사에도 두 영화의 힘이 컸다.

김 감독은 다큐멘터리는 결국 ‘질문’이라고 말한다. “좋은 질문,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게 다큐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다큐로 사실들이 정확하게 제시되기만 한다면 시민들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거라는 믿음이 있거든요.”

그의 영화가 역동적인 것은 영화 안에 빼곡한 팩트 때문이다. 그는 기록의 힘을 믿는 감독이다. 기지촌 성매매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다 ‘마마상’(2005)을 만들었고, 둘째 작품인 ‘‘3×FTM’(Female to Male, 2009)도 시작은 성전환자의 인권 실태 조사였다.

“기록이 결국 증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기록하면 공유도 할 수 있죠.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의미의 두께가 더 두터워져요. 미래에 말을 거는 일이기도 하죠. 반성과 성찰의 계기가 되니까. 그게 기록의 힘이에요.”

그 기록은 좀더 살아가기에 나은 세상으로 바꾸는 동력일 것이다. 그래서 김 감독은 자신을 감독이라기 보다 활동가, 운동가라고 칭한다. 그가 속한 집단도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라는 인권단체. 소수의 눈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다.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이 공간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누구지?’, ‘그 이유는 뭐지?’, ’이들을 소외시키는 권력은 뭘까?’, ‘배제의 매커니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같은 질문을 던져요. 페미니스트로서 훈련돼온 사유의 방식이죠. 결국 다큐를 만드는 이유도, 나 같은 소수자가 더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죠.”

기자에게 수치심을 안긴 그와 서울 서교동 연분홍치마 사무실에서 16일 마주했다. 지난해 위암 수술로 6년 전 만났을 때보다 말랐지만 더 단단해져 있었다.

◇‘기록하면 좋겠다’ 빌린 카메라로 찍은 첫 영화
김일란 감독은 독립영화 중에 이례적 관객 기록을 보유한 감독이지만, 첫 작품 때 편집조차 할 줄 몰라 배워가며 제작했다. 그저 그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이 시작한 일이었다. 홍인기 기자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공동정범’이 극장에서 내려온 뒤에) 한동안 ‘시간 부자’로 살다가, 얼마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여성감독 6인에 관한 전시(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 박남옥ㆍ홍은원ㆍ최은희ㆍ황혜미ㆍ이미례ㆍ임순례)를 (12월 5일까지) 해요. 그 6인 감독의 ‘작가론’을 영상으로 만드는 일을 맡았죠. 아마 이달 중 공개 될 거예요.”

-연분홍치마는 어떤 단체인가요?

“준비모임까지 따지면 2002년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정식 발족한 것은 2004년이에요. 새로운 여성주의 문화운동을 해보려고 모였죠. 처음에 공부모임으로 시작했다가 운동단체가 됐어요. 저까지 5명이 상근활동가죠. 인권 관련 집회에 참여하고 그 현장을 기록하다가 영상(다큐)으로도 만들게 됐는데 다큐 제작이 주된 활동이 될 것이라고 우리도 생각하지 못했죠.”

연분홍치마에서 제작한 다큐 영화는 김 감독의 작품 말고도 ‘레즈비언 정치도전기’(2009), ‘종로의 기적’(2010), ‘안녕 히어로’(2017) 등이 있다. 최초의 커밍아웃 레즈비언의 총선 출마기, 쌍용 자동차 해고자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다. 연분홍치마는 편견, 자본, 권력과 싸우는 소수자, 약자들에게 초점을 맞춰왔다. 이들의 작업은 팀 워크 방식이다. 한 사람이 작품 연출에 들어가면 다른 이들은 조연출, 기획, 프로듀서, 촬영, 편집 같은 스태프를 맡아 돕는다.

-이름 독특해요. 왜 연분홍치마인가요?

“우리 조직의 색깔을 이름으로 드러내고 싶었어요. 브레인 스토밍하면서 아이디어를 내는데 누군가 ‘연분홍이 어떠냐’고 했죠. 퀴어(성 소수자)의 색인 핑크는 다양성을 상징하니까요. 여성주의 관점에서 사회의 소수자 문제를 바라보고 변화를 이끌자는 게 우리 모임의 지향점이니 적합했죠. 또 고착적인 여성의 이미지인 치마를 넣어서 전복적인 의미도 담아보자 뭐 이런 취지도 보탰고요. 그래서 연분홍치마가 됐어요. 가끔 자주 고름으로 오해 받기도 했지만. (웃음)”

-어렸을 때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나요?

“선망은 있었지만 영화감독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영화를 무척 좋아하셨던 할머니 덕분에 6, 7세 무렵부터 손잡고 극장에 갔던 기억이 나요. 또 제가 비디오 세대이다 보니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서 영화를 즐겨 봤죠. 중학교 때 취미는 영화 포스터 모으는 거였고요. 수 백장쯤 됐죠. ‘스크린’, ‘로드쇼’ 같은 영화 전문잡지도 사봤죠.”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계기는 뭔가요?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지촌 성매매 여성 인권단체 ‘두레방’에 기지촌 혼혈인 실태조사 용역을 맡긴 적이 있어요. 그때 저도 외부 연구원 자격으로 참여했죠. 당시에 미군 남성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자녀를 인터뷰하고 보고서로 만들면서 기지촌 여성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글뿐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영상으로도 기록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큐멘터리라는 걸 어떻게 만드는지 전혀 몰랐을 때인데, 모르니까 (무모하게) 시작할 수 있었나 봐요. 그래서 만든 작품이 ‘마마상’이에요.”

-촬영이나 편집 기술도 몰랐다고요?

“네. (웃음) 그저 제가 기지촌에서 만난 한 여성의 삶이 기록되면 좋겠다는 생각만 있었죠.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에게 얘기를 했더니 동의를 했고 작업을 시작했어요. 심지어 촬영 카메라가 없어서 대학원(영화 전공)에서 알게 된 언니한테 빌려야 했죠. 이유를 들은 언니가 당시 6mm 캠코더를 사서 쥐어주더라고요. 그걸 들고 경기 송탄기지촌으로 갔죠.”

김 감독은 연분홍치마 활동가인 조혜영ㆍ이혁상 감독과 함께 여관방을 얻어 3개월을 살며 촬영했다. 이후 5개월간 통근을 했다. 제작 기간 8개월 만에 ‘마마상’이 탄생했다. 마마상은 중간 포주 역할을 하는 나이 든 기지촌 여성을 가리키는 은어다.

-‘마마상’은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인가요?

“카메라를 매개로 촬영 대상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인터뷰는 어떻게 하는 건지, 에피소드로서 대화와 차이는 뭔지, 편집은 어떻게 하는지, 다큐 주인공에게 감독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죠. 그래서 저에게 많은 교훈을 준 작품이에요. 기술적인 건 배워가며 했고요. 돌이켜보면 촬영을 여기서 끝내자는 결정을 어떻게 했는지 신기해요. 다큐는 촬영 종료를 결심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이야기가 완성 됐다 싶을 때 끝내야 하니까. 아마도 막연하게 사계절이 다 담겼으니 그만 찍어도 되겠다 싶어 끝낸 거 같은데. (웃음)”

-그래도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제 전공이 영화이론이었거든요. 감독이 되고자 했다면 제작과정을 택했을 텐데. 기술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대학원에서 문화 연구 방법론이나 페미니즘 공부를 했던 게 도움이 됐어요. 어떤 현상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방법, 연구자의 위치나 시각 같은 것들이죠. 사실 ‘마마상’의 경험 때문에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서울여성영화제(2005년)의 프로그래머들이 이 작품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읽어준 덕분에 상영 됐거든요. 첫 작품이 영화제에 걸려 운이 좋게도 그게 격려든 비판이든 평가 받을 기회를 얻은 거니까요. 다큐가 현실과 만났을 때 갖는 의미나 힘도 깨달았죠.”

◇‘용산참사’ 재판 보며 “팩트 다 보여주자”
용산 참사를 다룬 김 감독의 영화 ‘두 개의 문’, ‘공동정범’을 본 관객은 총 8만 5,000여 명. 독립 영화로 이례적 흥행이다. 홍인기 기자

-용산참사를 다큐로 다뤄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뭔가요?

“처음부터 다큐를 만들 의도로 현장에 간 건 아니었어요. 철거민들이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짓고 농성을 시작하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였어요. 현장에 먼저 달려간 인권활동가들에게 ‘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우리(연분홍치마)도 참여했죠. 그런 상황에서 카메라는 일종의 증인이 되거든요. (2009년 1월 20일 참사 이후) 이 어마어마한 사태 앞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건 기록이었죠. 재판에 참여하며 쟁점,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당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됐군요.

“그렇죠. 재판을 쭉 지켜본 사람들은 아마 비슷한 생각일 텐데 이건 유죄(판결)가 날 이유가 없다는 의구심이 들었죠. 근거가 부족했어요. ‘그렇다면 이걸 다큐로 만들어서 일종의 국민참여 재판을 시도해보자. 경찰 채증 영상, 재판 과정 같은 팩트를 모두 다 보여주자. 그런 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시민에게 판단을 맡겨보자.’ 이런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죠.”

재판은 논란의 연속이었다. 위법이라는 지적에도 검찰이 3,000쪽 분량의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아 의혹이 일었고(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도 검찰은 일부만 제출했다), 경찰이 과잉 진압했다는 농성 철거민 측 변호인의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망루 화재의 원인도 명확하지 않다. 철거민 측이 “가능성만으로 화인을 농성자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단정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독립영화인데도 ‘두 개의 문’을 7만 명이 넘는 관객이 봤죠.

“감동적인 순간이 많았죠. 다큐인데도 재미있었다거나 그간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형식의 다큐 영화라는 호응도 있었고요. 그 무엇보다 유가족에게 위안이 돼서 의미 있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당시 교도소에 있었던 철거민들도 위로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이 영화 때문에 언론에서 용산 참사를 다시 다뤄줘서 잊히지 않았다는.”

-그래도 이명박 정부는 꿈쩍하지 않았죠.

“당시 대법원 판결의 주심 대법관이 양승태였어요. 이후 대법원장에 취임했죠. 철거민에게만 책임을 지운 것으로 결론 낸 재판 결과가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해요. 용산참사는 당시 이명박 정부에 위기가 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으니까요.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재조사 권고 사건 중 하나로 용산 참사를 지목했는데 반드시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올해 1월 낸 후속작 ‘공동정범’도 큰 역할을 했죠. 왜 후속을 만들게 됐나요?

“‘두 개의 문’은 잘 됐는데 현실에서 변화된 건 없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주인공들(철거민)이 2013년 1월 (특별사면돼) 출소하면서 기록을 해놔야겠다고 생각했죠. 이들이 겪는 후유증과 갈등은 모두 국가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의 한 형태이자 피해거든요. 그리고 참사 당일 망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들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었죠.”

-참사를 다룬 다큐 영화에 적합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박진감 있게 흘러가요. 쉽게 말하면 재미가 있다는 거죠.

“활동가이자 감독으로서 다큐가 제대로 현실에 개입하려면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극장의 관객은 곧 광장의 시민이고 그들을 설득할 최고의 언어는 재미이기 때문에. 재미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건 새로운 정보를 알게 돼서 느끼는 유희이기도 하고 어떤 사건으로 쌓인 울분을 터뜨려 주는 희열이거나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는 희망이기도 하죠. 저는 시민의 힘을 믿거든요.”

◇“대중은 언제나 옳다”고 말했던 노회찬

김 감독은 생각났다는 듯 생전의 노회찬 정의당 의원과 나눴던 대화 얘기를 꺼냈다. 김 감독이 우연한 자리에서 노 의원을 만나게 돼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소수정당 소속으로 정치를 하다 보면 가끔 대중에게 실망할 때도 있지 않나요? 사회 분위기는 우호적인 것 같은데 실제 투표 결과로 반영되지 않으니 섭섭할 만도 한데요.” 그랬더니 노 의원은 이렇게 답했다. “대중은 언제나 옳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상처 받죠. 또 그래야 무엇을 고쳐야 할 지 길도 보이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야 이 작업을 오래 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독립영화도 비슷하거든요. 배급 구조나 마케팅 비용 이런 환경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래도 대중에게 선택 받는 영화들은 있어요. 대중이 외면했다면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죠. 그게 합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두 개의 문’이 예상하지 못한 흥행을 거두면서 오히려 저를 스스로 다독여야 했거든요.”

-왜요?

“선택됐을 때 기쁨을 알게 됐기 때문이죠. 앞으로 아마도 이런 성취감을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할 가능성이 많은데 그럴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견뎌야 할까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렇더라도 과거의 성취에 머물러 있지 말자, 과거로 회귀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독였죠. 연분홍치마 활동가들, 또 20년 이상 인권운동 현장에 있는 활동가들도 제게는 큰 힘이 됐고요. ‘저들이 있으니 나도 견딜 수 있겠구나’ 싶었죠.”

◇600명 후원 회원이 우리를 끌고가는 힘
김일란 감독의 동료이자 동지, 연분홍치마 소속 활동가들. 왼쪽부터 감독 넝쿨(별칭) · 한영희· 이혁상. 이 감독은 ‘공동정범’을 공동 연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중에서도 독립영화, 독립영화 중에서도 다큐, 거기다 여성 감독이라는 현실적인 굴레가 많은 길을 가고 있어요. 쉽지 않은 여건임에도 이 일을 왜 하는 건가요?

“사실 하다 보니까 하게 된 건데… (웃음) 저도 가끔 ‘내가 왜 하고 있나’ 생각해요. 그런데 계속하게 만드는 계기들이 이어져 왔더라고요. 예를 들어 (첫 작품인) ‘마마상’ 이후에 ‘3×FTM’을 만든 것도 (옛)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성전환자의 인권실태 조사에 참여하면서죠. 조사만으로는 아쉬워 다큐로도 남겨 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또 ‘마마상’을 만들 때 부족했던 걸 보완해보고 싶었고요.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흘러왔죠. 마치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느낌 같은 건데… (웃음)”

-그거, 힘든 사랑 아닌가요?

“그렇지 만은 않았어요. 감동도, 성취도, 재미도 있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독립 다큐가 상업 극영화보다 수월하죠. 훨씬 여성에게 적합한 장르예요.”

-어떤 점이 그런가요.

“제작 규모가 작다 보니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요. 또 스태프 수가 적으니 친밀한 관계에서 토론하며 작업할 수 있고요.”

-자본 같은 외부 압박 요인도 덜하겠군요.

“그런 면도 있죠. 독립 다큐도 자본이 중요한 요소지만 돈에 얽힌 압박이나 이해 요인이 상대적으로 덜하니 그만큼 연출의 자유가 보장되기도 해요.”

-그걸 선택해서 포기한 것들도 있을 텐데 아쉽진 않나요.

“별로요. ‘나이 들어 잘 먹고 살 수 있을까’하는 불안하고 두려운 순간이 지금도 없지 않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조금씩 문제가 해결돼 왔거든요. 그 중 가장 큰 게 후원회원들이에요. 연분홍치마에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내는 회원이 600명쯤 되거든요. 이게 저를 비롯한 활동가들에게 굉장한 안정감을 주죠. 자동이체서비스(CMS)로 후원금이 들어온 지 3년쯤 됐어요. 그 전까지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며 활동을 했죠. 최저임금도 안 되는 액수지만 매달 안정적으로 활동비를 받게 된 건 의미가 남달라요. 아직도 사무실 월세나 운영비까지 치면 매달 적자이지만 600명의 회원들이 우리의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한다고 생각하면 액수에 상관없이 굉장히 큰 힘이 되죠.”

-든든한 ‘뒷배’군요.

“그렇죠. 더 모아야 해요!”

-평범하게 살 수도 있는데 왜 세상의 변화를 위한 길을 택했나요?

“영화이론, 문화이론을 더 공부해보고 싶어서 대학원에 갔다가 석사과정을 마치며 내가 공부한 걸 실천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페미니스트이자 문화연구가로서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해보자는.”

-여성으로서 자각한 계기가 있나요?

“대학(숙명여대)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며 그간 막연하게 느꼈던 불만을 표현할 언어를 찾게 됐죠. 재미있고 신기했어요. 그것과 관련해 좀 우스운 에피소드가 있는데.”

-뭐죠?

“설명하기 부끄러운 얘기라…”

-더 궁금한데요.

“새내기 때 친구를 만나러 다른 (남녀공학) 대학에 갔는데 영화동아리 모집을 하는 걸 봤어요. 우리 학교는 없었거든요. 친구와 가입을 했죠. 동아리란 게 그 학교 학생만 대상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죠. 심지어 가입원서에 학교 이름도 썼는데 (선배들이) 눈 여겨 보지 않았나 봐요. 한달 쯤 됐을 때 어느 날 동아리 방에서 얘기를 하다가 학교 얘기가 나오게 됐죠. 선배들이 깔깔 대고 웃으면서 ‘아니 숙대생이 왜 여기 와서 동아리 생활을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우리 학교에 영화 동아리가 없어서요’라고 했더니 ‘그래 좋다’며 함께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학교는 우리 학교로 다니고 동아리 생활은 그 학교에서 했죠. (웃음) 그때 느낀 게 있어요.”

-뭔가요?

“담배요.”

-담배요?

“네. 동아리에서 회의를 하다 보면 남자 선배들과 동기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때가 있어요. 그런데 들어올 때 자기들끼리 다 정리해서 오더라고요. 당시 담배 피우는 여학생은 없었을 때라 남자들끼리의 결정이었죠. 되게 이상했어요. 담배로 남자 선배들과 남자 동기들 사이의 연대가 생기더니 그건 정보 접근권의 차이로, 나중에는 실력 차이로 이어지더군요. 또 동아리 생활을 하다 보니 남자들이 성차별적 언행을 하는 일도 있었고요.”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요?

“그랬죠. 그런데 어떻게 부당하다고 설명해야 할 지 그 때는 몰랐어요. 우리 학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며 내가 느낀 감정을 표현할 언어를 찾았죠. 대학 4년 동안 그래서 혼란의 연속이었어요. (사회의 부당함에) 순응하는 삶을 택해도, 적극 저항하는 삶을 택해도 힘들 거 같아서요. 순응하면 내가 나를 속이며 사는 것이고 저항하면 또 그것대로 외롭고 불안정하게 살게 될 테니까. 일단 대학원에 가는 것으로 내적인 고민을 봉합했죠. 그런 뒤 연분홍치마란 단체 활동을 하면서 마음도 훈련되고 내 길도 찾게 됐어요.”

◇‘암’이라는 인생의 홍수에 쓸려가지 않은 건…
영화판에서도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영화, 그 중에서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여성감독. 한국 사회에서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김 감독은 "고비마다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듯 여기까지 이어져 왔다"고 표현했다. 홍인기 기자

-조심스런 얘기인데 지난해 위암 수술 소식이 들려서 놀랐어요.

“5년 만에 부모님 따라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종양의 위치 같은 걸 고려해서 전이 가능성을 막으려고 위를 전(全)절제한 상태죠. 올해 1년이 돼 검사를 했는데 다행스럽게 전이 없이 잘 유지하고 있어요.”

-처음 진단을 받고 놀라지 않았나요?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어요. 무척 고단하게 살았기 때문에 몸이 망가져도 망가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인지 담담하게 받아 들였죠. 또 ‘이 정도면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했고요. 다만 회복하는 과정은 좀 힘들었어요. 지금은 잘 먹고 잘 쉬면 일상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죠. 아프고 나서 다시 한번 생각한 게 있어요.”

-뭔가요?

“연분홍치마라는 제가 돌아갈 공간, 또 우리를 지탱해준 후원인들, 그간 했던 활동이 나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거요. 병이라는 인생의 홍수가 왔는데 제가 쓸려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가지도 좀 손상되고 열매도 떨어졌지만 뿌리는 손상되지 않은 거죠. 그러니 나는 재생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내가 틀리게 살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계기가 됐죠.”

-일각에선 여성주의 문화 운동하는 사람들이 무슨 ‘용산 참사’까지 다루냐는 시선이 있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페미니즘은 젠더 이슈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자 실천의 방법론이에요. 페미니스트인 저한테 익숙한 사유의 방식은 ‘이 공간에서 배제되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그 이유는 뭐지? 어떤 힘이 이를 배제하고 있는 거지?’ 같은 질문 던지기죠.”

-카메라로 세상을 바꿔온 감독 김일란의 삶의 도는 뭔가요?

“그게… 저는 특별한 게 없는데. 음, 물어본다는 거 밖에 없어요.”

-물어보는 거요?

“네, 사실 모르는데도 묻지 않아서, 지레 짐작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큐도 마찬가지예요. 섬세하게 물어야 하죠. 좋은 질문을 제대로 만드는 게 다큐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구나’ 새삼 생각했다. 질문은 변화의 시작이니까. 묻지 않고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니 묻지 않는 것은 무관심이고 포기다. 질문은 그렇기에 사랑의 징표일까.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김 감독의 다음 질문이 무척 기대되는 이유다.

카메라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감독 김일란. 홍인기 기자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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