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2년제 대학생 친구를 상담했다. 편입할 거란다. 그런데 자주 듣던 이유가 아니었다. 더 나은 학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22세에 사회인 되기가 두렵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하고 싶은 일은 전혀 없는 자신이 사회에 나가보았자 어쩐지 제대로 작용하지 못할 것 같아서 유예의 시간을 벌고 싶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열정적으로 뛰는 친구들을 봐도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사회는 왠지 그러지 않으면 생존조차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이 가장 크다고 했다. 말을 끝낸 청년은 빤히 내 눈을 쳐다보았다. 도망치듯 그런 이유로 편입하면 힘들다는 만류를 숱하게 들었다고 했던가. ‘저 사람도 만류하려나’와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가 섞인 시니컬이었다.

“그 편입, 하면 좋겠는데요? 확고한 이유잖아?” 나의 첫마디였다. 전혀 말리지 않았다. 억지로 열정을 넣어줄 생각도 없었다. 대신 다른 조언을 하나 건넸다. 90%의 ‘더 나은 학력’을 원하는 편입생 동료의 분위기에 휩쓸려 원치도 않던 ‘높은 대학’을 준비하다 편입 준비 기간이 무한정 늘어나면 혼란만 가중되니, ‘학벌은 내 목표가 아니야. 단지 3, 4학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공고히 해라, ‘합격이 쉬운 곳’을 중심으로 빠르게 편입 기간을 끝내라는 당부를 전할 따름이었다.

상담가로 살며 가끔 듣는 이가 아닌, 조언자로 착각할 때 빠지게 되는 오류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열정 만능설’이다. 젊은이가 봉착한 문제들에 열정을 심어줌으로써 개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상담을 통해 만나는 각각의 청년들은 모두 다른 ‘꼴’을 하고 있었다. 모든 고통이 ‘열정 없음’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개개인의 명백한 입장을 상실할 때 발생한다. 그렇다면 ‘열정 없음. 하고픈 일 없음’ 자체는 교정의 대상이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이 또한 스스로가 가지는 당위가 있다면 지지받아야 할 개인의 특질 아닐까.

34살, 나 역시 하고픈 일은 없다. 매우 어릴 때부터 그랬다. 단지 잘하는 몇몇 개의 일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박탈감이 느껴졌다. 나는 흥미의 촉각이 둔감한 걸까. 기질이 우울한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좀처럼 답이 보이지 않았다. 상담가가 되고 나서야 나라는 사람은 ‘일’이라는 것 자체는 어떤 것이든 흥미를 느끼지 않는 성향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경향 또한 사람의 특성 중 한 축이라는 것을 수용하게 되었다.

지금 시대, 가슴이 뛰는 삶을 가르치는 곳은 많다. 그 또한 해당 경향성을 가진 사람들에겐 최적의 강의일 것이다. 하지만 덤덤하게 사는 삶을 인정하는 강의는 퍽 만나기 힘들다. 무엇에도 감흥 없는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열정 없음이 강요되지 않은 채 삶의 방식을 독려해가는 무언가는 만들어질 수 있을까. 열정 메시지의 범람 속에서, 누군가는 꿈을 찾지만, 자책을 켜켜이 쌓아가는 이도 있었다.

“‘더 경험하면 달라’ 혹은 ‘지친 거야’라는 맥락을 접하면 지금이 잘못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때때로 저는 고통이 ‘가슴 뛰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강박 속에서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나를 안타까워하고 한심해할 때,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생긴다고도 생각해요.”

열정과 무탈. 양극의 요구가 함께 성장하지 못하고 한 축만 과잉 성장하고 있는 현상이, 무탈함을 추구하는 인간형은 마치 교정의 대상으로 인지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흥미가 없고, 하고 싶은 일은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지 모를 사람들의 삶도 존중되는 시선. 그런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의 특징을 ‘주관’으로 견지하며 살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면 각자의 삶은 조금 더 행복해질까.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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