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법인류학자 바버라 해럴본드

바버라 해럴본드는 영국 옥스퍼드대에 세계 최초 학제통합 난민연구소를 설립한 법인류학자이자 맹렬한 난민인권운동가다. 그에게는 남반구 어느 부족의 근대적 법과 전근대적 관습의 괴리보다 현대 유럽의 국제법과 난민인권 현실의 괴리가 더 다급한 연구 과제여서 그의 삶은 어디서 무엇을 하건 현지 난민을 중심으로 재편되곤 했고, 세계의 난민과 활동가들은 언제나 그의 거처를 파악해 도움과 정보를 구하곤 했다. AMERA International, youtube.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1949~)는 포르투갈 총리를 지낸 사회당 정치인이자, 70년대 EU이사회 이민ㆍ난민위원회를 거쳐 유엔난민기구(UNHCR) 고등판무관까지 지낸 난민문제 전문가다. 그가 2017년 유엔 최초로 후보 청문회 등 경선을 통해 사무총장이 된 데는 근년의 유럽 ‘난민위기 Refugee Crisis’, 혹은 ‘난민 사태’에 대한 위기감이 크게 작용했다.

그가 UNHCR 고등판무관이 된 2005년 국제 난민(국내외 강제이주 및 난민 신청자 등 포함)은, UNHCR 집계 3,800만 명이었고, 그의 임기 말인 2015년에는 6,500만 여명이었다. 냉전 종식 이후 급증한 중동ㆍ아프리카 분쟁(특히 시리아 내전)과 국제사회의 예방ㆍ조정 능력 상실, 분쟁 장기화에 따른 해당지역 시민들의 희망의 고갈과 국제사회의 지원 감축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2015년 12월 구테흐스는 ‘Ted 글로벌’ 인터뷰에 출연, 유럽 난민 위기의 본질을 ‘유럽 통합모델의 실패’라 진단했다. 유럽 인구 5.5억 명이 1/2,000에 불과한 난민 100만 명(2015년 한 해 기준)을 수용하는 문제를 두고 우왕좌왕하는 것은, EU가 예견된 사태에 뒷짐진 채 갑론을박만 반복한 결과라는 거였다. 정작 국제 난민의 86%를 수용해온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나 중동의 요르단 레바논이 아니라 유럽이 ‘사태’니 ‘위기’니 하는 것은, 물론 구테흐스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통합 실패 이전에 휴머니즘 윤리와 책임능력의 위기였다.

사실 유럽이 뒷짐지고 관망만 한 게 아니었다. 셍겐조약(EU 역내 통행자유화) 회원국 중 그리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다수는 ‘불법 이민’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국경 철조망을 재정비, 적극적인 난민 통제에 나섰다. 지정학적 여건에 따라 처지가 사뭇 다른 국가간의 갈등, 난민 수용-통제를 둘러싼 개별 국가의 내부 정치ㆍ사회적 갈등도 비등했다. 구테흐스는 유럽의 난민 수용 능력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건 답이 없는(무의미한) 문제”라고 말했다. 2차대전을 치른 세계가 국제법과 UNHCR 설립을 통해 약속했듯이 “난민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고, 우리에겐 그들을 보호해야 할 국제적 책임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청중들은 여러 차례 박수로 그의 뜻에 동조했다. 그 박수는 회원국간의 불화와 예산 감축 속에 고군분투해온 UNHCR의 헌신에 대한 박수이기도 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법인류학자 바버라 해럴본드(Barbara Harrell-Bond)는 저 퇴행의 시대를 버티며 고군분투해온 UNHCR조차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으로 난민 인권과 생존을 위해 헌신한 활동가다. 그는 1982년 영국 옥스퍼드대에 난민문제 연구와 정책개발, 구호 및 법률구제 활동가 양성을 결합한 세계 최초의 학제간 연구소인 ‘난민연구센터(RSC)’를 개설한 이래 이집트와 케냐 등 자신이 재직한 거의 모든 대학과 도시에서 난민연구소ㆍ단체를 설립ㆍ운영했고, 다수와 난민 관련 학술 저널(Journal of Refugee Studies, Forced Migration Review 등)을 창간했고, 난민지원 법률가 등 봉사자들을 양성해 국제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세계 최대 난민정보 포털(Rights in Exile)을 꾸려 직접 운영했다. 그러면서 유엔과 EU, 영국과 독일 등 유럽 각국 정부 이민ㆍ난민 당국과 숱하게 맞섰다.

그런 이력 못지않게 유명한 건 그의 86년 저서 ‘대단한 원조 Imposing Aid: Emergency Assistance to Refugees’였다. 연구자로서 알제리와 수단 등 아프리카 분쟁지역을 누비며 직접 보고 겪은 사례와 자료를 토대로 쓴 저 의미심장한 제목의 책에서 그는, 2015년 구테흐스가 유럽 국가들의 이기주의를 비판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논지로, UNHCR을 비롯한 국제 난민구호단체들의 윤리와 책임의식을 호되게 비판하며 난민 구호의 새로운 철학과 원칙을 정립했다. 그는 UNHCR과 옥스팜(영국의 글로벌 구호단체) 등 인도주의 NGO들이 “자기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고, 비전문적”(weekly.ahram.org)이라며 “난민을 팔아 자기만족과 제 조직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인도주의 산업(humanitarian industry)”(guardian)이라 명명했다. 한 마디로, 일은 제대로 못 하면서 우월감으로 우쭐대고 시혜라도 베풀듯 난민 위에 군림하려 한다는 거였다. 그는 “난민은 무기력한 객체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자율적 관리가 가능한 주체이며, 스스로 건강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복원력을 지닌 존재”(irinnews.org)라며 “난민의 존엄을 전제로 그들의 자율적 대표성을 인정하는 것이 구호활동의 원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80년대 이래 근 40년간, 영국이든 이집트든 그가 거주하는 집은 난민지위 인정 소송 관련 정보 등을 얻기 위해 전세계에서 걸려오는 전화와 관련자 방문ㆍ체류로, 늘 난민ㆍ활동가들의 베이스캠프이자 구호소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킹스칼리지런던의 국제 인권법 교수 굴리엘모 버디람(Guglielmo Verdirame)은 “바버라 해럴본드는 내가 아는 한 어느 국가에도 국경을 열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윤리적 자격(moral standing)을 갖춘 유일한 사람”(ft.com, 2018.8.4)이라고 말했고, 해럴본드의 RSC 연구원 출신인 런던대 교수 로라 해먼드(Laura Hammond)는 “난민연구 분야에서 내가 협력하거나 존경하는 이들은 대부분 ‘바버라 커넥션’ 안에 있는 이들”이라고, “우리는 바버라의 궤도 안에서, 강하고 전복적이고 열정적인 도당(徒黨)으로 성장해왔다”(irinnews.org)고 말했다. 바버라 해럴본드가 7월 11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바버라 해럴본드는 유럽 주요국과 유엔난민기구, 국제 NGO의 난민정책 또는 구호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들의 태도에 밴 우월의식과 위계적 관료주의를 그는 경멸했다. 하지만 난민들은 그를 '어머니'라 부르곤 했다. 저 난민 아이에게도 그는, 눈높이를 맞춰 대화하는 법을 아는 자애로운 할머니였을 것이다. ocalenie.org

해럴본드는 1932년 11월 7일, 미국 사우스다코다 주 웹스터 시의 간호사 어머니와 우체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강권으로 간호사 수련을 받았지만, 그는 제 고집대로 기어코 켄터키 오버리(Aubury)대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했다. 19세이던 51년 감리교회 목사(Nathan Harrell-Bond)와 결혼,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2남1녀를 낳았고, 남편이 옥스퍼드대 심리학 박사과정에 진학하면서 그를 따라 65년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도 옥스퍼드대 레이디 마가렛 홀의 사회인류학연구소에 진학, 도시 근교인 블랙버드레이스(Blackbird Leys)의 재개발 과정에 집을 잃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민족지학 논문으로 67년 석사 학위를 땄다. 69년 남편은 학위과정을 끝내고 귀국했지만, 그는 아이들과 영국에 남았다. 얼마 뒤 부부는 이혼했다.

그가 인류학을 선택한 것, 석사 논문을 당시 유행이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소수집단이 아닌 옥스퍼드의 서민층에 초점을 맞춰 쓴 것을 근거로, 해먼드는 해럴본드의 공동체적 정의감이 80년대에 불쑥 치민 것이 아니라고 소개했다. 해럴본드가 난민문제를 처음 접한 것은 남편을 도와 교회 사목봉사를 하던 1956년이었다. 그 해 10월 헝가리 항쟁이 일어났고, 소비에트군이 11월 부다페스트에 진주하면서 꽤 많은 헝가리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냉전기 미국은 그들 난민을 열렬히 반겼고, 교회도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 물론 당시의 해럴본드는 난민이 뭔지, 난민법이 어떠한지 전혀 몰랐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시에라리온의 결혼과 관습법이었다. 세 아이들과 함께 67~73년 현지에 살면서 그는 수단 내전 난민들의 참상과 강제송환, 수도 프리타운의 난민 자치단체 등을 보고 겪었다. 박사학위를 딴 뒤 에든버러대, 워릭대, 일리노이 어바나대, 네덜란드 레이던대 등에서 강의하면서도 난민 연구를 계속했다. 81년 알제리 사라위(Sahrawi)족 난민들의 자립- 재활 연구, 82년 영국 해외개발국(ODA, 국제개발부 DFID의 전신)이 발주한 수단의 개발가능성 평가. 수단 평가단의 일원으로 건너갔다가, 본업은 제쳐두고 남수단 우간다 난민들의 참상을 영국 언론에 알려 국제적 지원을 도모한 일도 있었다.

법인류학자로서 그는 관습-법의 괴리의 흔적보다, 당장의 실상과 국제 원조의 허상, 난민인권과 국제법의 괴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자 결과가 그렇게 보수적이라는 옥스퍼드 대에 선구적인 난민연구소인 RSC를 설립한 거였다. 그는 96년까지 연구소를 이끌었다.

활동가로서의 그는 ‘도덕의 십자군’이라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평을 들을 만큼 독선적이었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평생 골초에다 폭음을 즐긴 이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그는 “내 가족 중 여성들은, 어머니와 내 딸까지 모두 11월 전갈자리에 태어났다”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전갈의 독침처럼 말과 성정이 다들 사납다는 얘기였다. ‘FT’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언제나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걸고 사는 서부 총잡이의 태도로 국제기구 관료들과 상대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사우스다코다의 거친 평원에서 말을 타던 질주의 감각 탓인지, 그는 관료들의 늘쩍지근한 일 처리 방식도 참지 못했다.

“마녀나 토테미즘보다는 더 도전적인 연구분야를 찾던” 연구원의 시절의 로라 해먼드는 1988년 바버라의 RSC에 처음 들어선 순간 “내가 바라던 바, 세상의 긍정적 변화를 위해 연구에 몰두하는 ‘작지만 헌신적인’ 다양한 구성원들의 세계를 발견했다”고 썼다. 그들은 난민과 함께 일할 이들의 훈련프로그램 자료를 만드느라 주말 없이 심야까지 일하곤 했다고 한다. “새해 첫날도 마찬가지였는데, 우리가 먹을 빵과 살라미, 바버라의 담배를 사러 나간 게 유일한 외출이었다.” 해먼드의 비자가 만료돼 연구소를 떠나게 되자 바버라가 당국에 ‘압력’을 넣어 기간을 연장해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해먼드는 바버라의 독설에 늘 곤욕을 치르던 정부가 그의 청을 들어준 게 당시엔 놀라웠지만, 이제 왜 그런지 안다고, “바버라의 열정에 감복한, 적잖은 영민한 이들이 ‘짐승의 뱃속’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는 96년 RSC를 떠난 뒤 4년간 케냐 모이(Moi)대와 우간다 마케레레(Makerere) 대학에서 강의하며 각각 난민(법)연구소를 설립해 자립 기반을 닦았고, 2000~2008년 이집트 카이로 아메리칸대학 명예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아프리카 및 중동 난민들의 법률 및 사회심리적 지원을 위한 단체 ‘AMERA’를 조직했고, 법률가와 봉사자 양성에 주력하며 평생 일군 인맥과 정보력, 경험 등을 밑천 삼아 방대한 국제 난민 법률구제 정보 포털 ‘Rights in Exile’을 구축했다.

옥스퍼드대 난민연구소가 2018년 6월 난민주간을 맞아 AMERA와 영상전문가들이 제작한 58분짜리 다큐멘터리 'Barbara Harrell-Bond: A life not ordinary'를 발표했다. 그 다큐를 시청하는 해럴본드(왼쪽 앞줄 두 번째). twitter.com/refugeestudies

카이로 가든시티의 그의 아파트도 AMERA의 사무실이자, 학생들과 인턴, 자원봉사자와 난민들의 거점이었다. 약 3년간 그를 도운 이집트 난민 전문가 파라스토 하수리(Parastou Hassouri)는 “바버라와 나는 자주 다투곤 했다. 그가 내 개인 전화번호를 공개해놓는 바람에 새벽 세 시에도 도움을 청하는 전화나 문자 메시지가 오곤 했다. 내가 ‘나는 당신과 다르다. 내겐 일과 분리된 사생활이 필요하다’고 항변하면, 그는 손사래를 치며 ‘그건 사치’라고 일축하곤 했다”고 썼다.(al-fanarmedia.org) 해럴본드는 2005년 영국 제국훈장(OBE, 4등급)과 미국인류학회의 프란츠보아즈(Franz Boas)상, 루시메어(Lucy Mair) 메달(2014) 등을 받았다.

86년 책에서 그가 ‘제안’한 난민 활동의 원칙은 명목적으로나마 국제 NGO의 활동준칙이 됐지만, 이후로도 활동가들의 ‘갑질’(심지어 매춘 거래)과 부정은 심심찮게 폭로되곤 했다. 2013년 인터뷰에서 그는 ‘Imposing Aid’를 집필하던 무렵의 자신이 너무 순진했다고, “인도주의적 기관들은 잘못을 지적 받으면 알아서 고칠 줄 알았다. 스스로 정의롭고, 스스로 선의를 품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비판에 대해 취하는 극단적인 방어태세를 내가 과소평가했다”(aprrn.info)고 말했다.

‘전갈’같았다지만, 그의 도움으로 난민 지위를 얻어 새로운 삶을 되찾은 이들은 그를 ”하늘이 내리신 분” “나의 어머니” 등으로 불렀다. 그의 불 같은 성미는, ‘전갈자리’의 천성이 아니라, 난민들의 절박한 처지와 억눌린 감정들, 굴욕과 비탄, 불안과 공포를 이입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의 난민이 새로운 희망을 얻었을 때, 그가 훈련시킨 법률가나 봉사자가 난민들의 투사로 거듭날 때, 다시 힘을 얻고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간다 난민 출신으로 영국의 난민법률구조 변호사로 활동하다 이민법원 판사가 된 풀 쿨립(Phull Kuldipp)이 들려준 이야기에 빚을 졌다는 말도 했다. 한 사람이 해안가로 떠밀려온 불가사리들을 주워 다시 바다로 던져 보내는 걸 보고 다른 사람이 “계속 떠밀려 올 텐데 왜 쓸 데 없는 짓을 하냐?”고 물었더니 그가 했다는 말, “하지만 내가 살려준 불가사리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 그는 매 순간, 매 사람을 그런 마음으로 대했을 것이다.

Rights in Exile’는 바버라 해럴본드가 옥스퍼드의 자택 침대에서 “가족과 서류들에 둘러싸인 채” 평온하게 숨졌다는 문장으로 그의 부고 기사를 시작했다. 최윤필 기자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