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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손아귀서 남인 정객 구출한 다산… ‘채제공 사단’ 돌격대장 되다

입력
2018.09.20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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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연보에 간략하게 실린 다산의 이진동 구출기. 간단한 기록 속엔 당대의 정치적 암투가 숨겨져 있다.
사암연보에 간략하게 실린 다산의 이진동 구출기. 간단한 기록 속엔 당대의 정치적 암투가 숨겨져 있다.

 ◇6년간의 수험생활 끝에 장원 급제 

다산은 과거 시험 준비와 교회 일을 병행하며 1788년 겨울을 났다. 해가 바뀌어 1789년 1월 7일에 시행된 인일제(人日製) 시험에 응시해 지난해와 같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정조는 합격자를 희정당으로 불렀다. 특별히 다산을 앞으로 나오게 해놓고, 임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移時不語). 조바심이 날 즈음해서야 임금이 비로소 입을 뗐다.

“초시를 몇 번이나 보았더냐?”

지난해 같은 날 했던 질문과 똑같았다.

“네 번째이옵니다.”

임금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 만에 말이 다시 떨어졌다.

“이렇게 하다가 끝내 급제나 할 수 있겠더냐? 그만 물러가거라.”

다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말에 자극을 받았던지, 다산은 그달 26일의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해, 3월 10일의 식년시(式年試)로 직행했고, 마침내 문과에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 언저리의 사연은 이미 이 연재 제6화에서 설명했으므로 여기서 다시 논의하지 않는다.

이로써 다산은 1783년 2월 증광시 초시에 합격한 이래 무려 6년간의 수험생 생활을 겨우 끝냈다. 은거를 결심하고, 임금의 은혜에 감격해 다시 출사를 결심했다가, 이후로도 여러 차례 더 낙방의 고배를 마시는 동안,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는 마침내 해냈다.

 ◇지근거리서 정조 수행 ‘꿈꾸던 시간’ 

다산의 첫 벼슬은 희릉직장(禧陵直長)이었다. 급제 직후 다산은 채제공을 찾아가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매선당기(每善堂記)’에 그때 나눈 대화가 남아있다. 그는 비로소 채제공 계보의 일원이 되었다. 1789년 3월 20일에는 바로 초계문신(抄啟文臣)에 발탁되었고, 4월 1일 부친 정재원이 울산부사 임명장을 받았다. 집안에 잇달아 상서로운 기운이 넘쳤다.

4월 5일, 다산은 울산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충주까지 모시고 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축하 모임인 탐화연(探花宴)에 참석했다. 임금은 다산을 희릉직장에 임명해 놓고, 딱 하루 자고 나자 바로 가주서(假注書)의 직분으로 승정원에 불러 올렸다. 이후 다산은 지근거리에서 정조를 수행했다. 꿈꾸던 시간이 눈앞에 있었다.

1789년 7월 11일,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옮기는 결정을 내렸다. 화성 건설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것이다. 마침내 올 것이 오는가? 정국이 다시 한번 꿈틀했다. 다산은 6월에 승정원 가주서에서 물러나, 이후 8월까지 발령 대기 상태에 놓여 있었다. 새로 급제한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려는 안배 차원이었다. 8월 11일에 추석을 함께 보낼 겸 다산은 아버지를 뵈려고 울산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8월 17일, 급히 상경하라는 내각의 관문(關文)이 당도했다. 놀란 다산은 그 길로 상경을 서둘렀다.

 ◇“죄를 얻더라도…” 170리 길 달려 이진동 구출 

‘사암연보’에는 상경 당시 있었던 사건 하나가 실려 있다. 안동 사람 이진동(李鎭東ㆍ1732~1815)이 상소를 올린 일로 관찰사의 뜻을 거슬렸다. 관찰사는 다른 일을 핑계로 그를 무함 잡아 죽이려 했다. 이진동이 그 낌새를 알고 먼저 달아나 숨었다. 포교가 조령과 죽령까지 쫙 깔렸다. 그가 달아나는 길목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그곳 유림들이 호출을 받고 상경 중이던 다산에게 이 상황을 알려주었다.

이제 막 벼슬길에 첫발을 내딛은 다산이 함부로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산은 “일이 다급하다. 내각에 죄를 얻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팔을 걷어부쳤다.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다산은 말에 올라 120리를 내달려, 새벽 무렵 영천에 도착했다. 여기서 또 50리 길을 되돌아가 김한동(金翰東)의 집에 이르러서야 이진동이 청암정(靑巖亭)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내 다산은 내각의 관문을 들이밀며 이진동과 함께 한밤중에 죽령을 넘었다. 이진동은 다산의 주선으로 단양 사는 오염(吳琰)의 집에 머물렀다. 이진동은 죽을 뻔한 목숨을 다산 덕분에 간신히 건졌다.

 ◇“남인 억울함 풀어달라” 상소 올린 이진동 

다산은 왜 자신과 직접 상관도 없는 일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총대를 멧을까? 문제의 원인이 된 이진동의 상소 사건이란 무슨 얘기인가? 여기에는 채제공의 복귀 이후, 남인 세력의 정치적 복권과 맞물린 긴 사연이 숨어 있다.

이진동이 상소를 올린 것은 한 해 전인 1788년 11월 8일의 일이었다. 이해는 1728년 무신년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난이 일어난 지 꼭 60년째 되던 해였다. 당시 영남 사람 대부분이 반역에 동조했다는 누명을 써서, 이후 60년간 남인은 과거 시험장 출입이 제한되고, 조정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 도산서원의 훈감(訓監)으로 있던 이진동이 당시 반란 진압에 앞장 섰던 영남인의 공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들어, 기록을 하나하나 찾아내 이른바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이란 책자를 만들었다.

무신창의록 첫 페이지와 표지. 이인좌의 난 등으로 60년간 출사길이 막힌 영남 남인들의 복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신창의록 첫 페이지와 표지. 이인좌의 난 등으로 60년간 출사길이 막힌 영남 남인들의 복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또 노론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렸던 영남 남인 조덕린(趙德鄰)과 황익재(黃翼再)의 원통한 사정을 토로하고, 이들의 신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상소를 이 책과 함께 올렸다. 영남 남인들의 오래 맺힌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탄원했다.

 ◇남인의 복권을 반대한 노론 

정조는 이들이 올린 상소문과 ‘무신창의록’을 본 뒤, 우의정 채제공에게 앞뒤 상황을 묻고 이 책을 영남으로 내려보내 중요 부분을 뽑아 간행케 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치가 않았다. 예전 조덕린이 억울하게 죽고, 그의 손자 조진도(趙進道)가 급제 후에 덕린의 후손이라 하여 합격이 취소된 처분을 회복시켜 달라는 요청이 쟁점이 되었다. 당시 정쟁적 입장에서 노론은 이 일의 번복을 자신들의 정당성에 대한 남인들의 정면 도발로 받아들였다.

결국 노론은 발끈해서 불측한 흉계라고 대들었다. 당시의 처결이 정당했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정조는 노론의 바람과는 반대로, 사흘 뒤인 11월 11일, 소두(疏頭) 이진동과 김상관(金相寬), 정장간(鄭章簡) 등 8명을 궁중으로 들게 해서 반나절 동안이나 이들을 접견했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충정을 격려하는 수백 마디의 전교(傳敎)를 내리고, 심지어 이진동에게 임금 앞에서 큰소리로 이를 읽게 하기까지 했다.

글을 읽는 시골 선비 이진동의 목소리가 우렁우렁했다. 끝에 가서는 감격해서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임금은 “이 글을 가지고 영남으로 가서 부로들에게 짐의 뜻을 알게 하라”고 했다. 그들이 물러가자,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초야의 선비가 처음으로 임금이 있는 자리에 올랐는데도 신색(神色)이 변하지 않고 행동거지가 절도에 맞으니 참으로 재상감이다. 장하다. 내 장차 크게 쓰리라.” 이휘재(李彙載ㆍ1795-1875)가 쓴 ‘족조욕과재이공행장(族祖欲寡齋李公行狀)’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운산문집 권11에 실린 이진동 행장. 남인의 정치적 복권을 위해 정조 앞에 나아간 이진동의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다.
운산문집 권11에 실린 이진동 행장. 남인의 정치적 복권을 위해 정조 앞에 나아간 이진동의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해를 넘겨 조덕린을 신원하고, 그의 손자 조진도의 합격을 회복시키는 조처를 내렸다. 노론의 당로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정조는 묵살했다. ‘사암연보’에서 그저 지나치듯 적어둔 이 사건의 이면에는 채제공의 복귀 이후 이를 발판 삼아 정계로 발돋움하려는 남인과, 이를 견제하는 노론 간의 치열한 수 싸움과 정쟁의 노림수가 깔려 있었다.

 ◇동물적 정치 감각 지녔던 다산 

해가 바뀌어 1789년 홍억(洪檍)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그는 홍대용의 아버지였다. 노론은 제2, 제3 이진동의 출현을 경계해 아예 싹을 자르기로 했다. 노론의 지시를 받은 홍억은 구실을 만들어 이진동을 죽이려고 그의 체포를 명했다. 상황이 몹시 다급했다. 숨가쁜 상황에서 마침 이곳을 지나던 다산의 도움으로 이진동은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났다. 다산은 상경 즉시 이 일을 사촌 처남 홍인호와 함께 정조에게 보고했고, 격노한 정조는 홍억을 파직시켜 버렸다.

다산의 기민한 일 처리는 남인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판서 권엄(權𧟓)이 호협호의(豪俠好義)의 행동이라며 다산을 크게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다산은 답장에서 울산에서 안동으로 돌아올 때 이진동의 근심이 있음을 듣고, 그저 지날 수 없어 함께 죽령을 넘었던 것인데, 벗들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뿐이라며 겸손의 뜻을 비쳤다. 영남 남인들은 이 사건으로 다산에게 큰 덕을 입었다. 훗날 ‘여유당전서’ 간행 당시 영남 쪽에서 큰 비용이 마련되었던 사정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젊은 날의 다산은 정치적 감각이 남달랐다. 그는 벼슬길에 오른 이후 채제공 사단의 참모와 돌격대장 역할을 도맡았다. 그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당시 복잡한 정쟁의 전면에서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가려운 데를 먼저 긁었고, 행동 뒤에는 반드시 결과를 얻어냈다. 채제공이든, 그를 이용해 정권의 무게 중심을 남인 쪽으로 옮겨 오려던 정조에게든 다산은 간이 딱 맞았다. 다산은 예쁜 짓만 골라서 했다. 노론이 남인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이진동을 해치려 했던 음모는, 다산의 구출로 인해 긁어 부스럼이 되어, 정국의 주도권을 남인에게 넘겨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후 남인들은 채제공의 날개를 얻어, 차츰 중앙 정계로의 복귀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1792년의 저 유명한 영남 만인소와 이를 이어 안동 도산서원에서 실시된 특별 과거 또한 이진동의 ‘무신창의록’과 다산의 이진동 구출 사건이 발판이 되었다. 다산은 이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멋진 데뷔전을 끝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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