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앞으로 30년 후에 아들이 어떻게 자라나 있으면 좋을지 아들의 꿈과 희망에 대해 써 보면 돼.” 안무가의 설명을 듣고 바닥에 깔린 흰 천을 편지지 삼아 엄마 제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어떤 연유로 한국 땅에 오게 됐는지도 알지 못하는 아이는 그 옆에서 천진하게 뛰어 논다. 양궁 활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니키는 자신이 만든 활을 들고 무대 위를 누비고 고향의 노래를 부른다. 제니와 니키는 무슬림의 불교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한 방글라데시 난민 줌머족이다. 이들을 비롯해 4명의 난민과 5명의 한국 무용수, 그리고 그들 사이를 잇는 흑인 이민자 무용수가 한 무대에 선다. 목숨 걸고 국경을 건너 와 타국에서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몸짓으로 풀어낸다. 파도소리와 함께 바다를 건너는 장면으로 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음달 1일 개막하는 제21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ㆍ시댄스)에서 초연되는 ‘부유하는 이들의 시’의 장면이다. 16일 오전 연습이 한창인 서울 혜화동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연습실에서 만난 윤성은 안무가는 “난민들이 겪는 상황을 안무가가 상상해서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민을 섭외했다”고 말했다. “제가 난민이 돼 보지 않아서 다 아는 게 아니잖아요. 난민마다 사연도 저마다 다르고요.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담아내려고 했어요. 허구가 아닌 다큐멘터리예요.”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난민 섭외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윤 안무가는 난민 포럼까지 찾아가 관계자들을 만나며 직접 섭외에 나섰다. “섭외 작업에 비하면 춤 작업은 일도 아니에요(웃음). 예술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편안하게 전달해야겠다는 책임감과 단단함이 생긴 것 같아요.” 방글라데시 난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해 음악도 새로 만들었다.
‘부유하는 이들의 시’에는 올해 일우사진상 수상자이자 ‘난민 사진가’로 알려진 성남훈 사진작가도 참여한다. 성 사진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이 무대 위에 걸리고 영상이 어우러진다. 작품의 주요 오브제인 전구는 시리아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열차 안에서 난민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것이다. 윤 안무가는 “성 작가님의 사진 중에 이 전구가 눈에 띄었다”며 “작품에서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빛의 의미로 쓰였다”고 말했다.
윤 안무가는 평소에도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인권존중과 교육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번 작품 이후에는 어린이 난민, 제주도의 예멘 난민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작품까지 연작을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도 한국전쟁 이후 난민국가로 지정된 적이 있어요. 언젠가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균형이 깨지면 우리가 또다시 난민이 될 수도 있죠. 진정성 있게 이들의 이야기를 대변해주면서, 이 나라에 사는 난민들이 있으니 한 번 더 관심 있게 봐달라는 취지가 강합니다.”
‘부유하는 이들의 시’를 비롯해 8편의 난민 특집 작품이 시댄스를 통해 한국 관객을 만난다. 개막작은 이탈리아 출신 안무가 피에트로 마룰로가 이끄는 인시에미 이레알리 컴퍼니의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이다. 시리아 출신 안무가 미트칼 알즈가이르가 자신의 삶을 담은 ‘추방’도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집도 영토도 없는 난민의 실상을 춤으로 이야기한 ‘추방’은 2016년 프랑스 유명 국제무용대회인 파리 당스 엘라르지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시댄스는 다음달 1~19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문화광장에서 열린다. 26개국 60개 단체의 53개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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