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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트로이 가는 길

입력
2018.09.14 18:2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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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해본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남들처럼 반듯하게 정규교육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고고학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렸을까?

슐리만은 유년기부터 호메로스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들과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성직자였던 아버지가 틈만 나면 역사를 파고들면서 어린 아들에게 갖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던 까닭이다.

그리고 여덟 살 때 그림책에서 불타는 트로이 성벽을 본 슐리만은 다짐했다. ‘이렇게 단단한 성벽이 있었다면 분명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내가 반드시 땅속에 묻힌 트로이의 보물을 찾아내고 말겠어.’ 아버지는 트로이 전쟁이 호메로스가 지어낸 상상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타일렀지만 아들은 곧이듣지 않았다. 불과 몇 년 전, 전설로만 떠돌던 폼페이의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던 것이다.

고고학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라틴어와 영어, 그리스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아이는 잘 알았다. 어린 슐리만의 목표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좌초했다. 가난한 그의 집에는 아들에게 학교 공부를 시킬 돈이 없었다. 다만 그 시절 슐리만을 버티게 한 건 트로이 유적 발굴에 대한 염원이었다고 한다. 식민지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그는, 기회의 땅 아메리카로 가서 트로이 탐사에 필요한 큰돈을 모으자고 마음먹었다. 선실 심부름꾼으로 어렵사리 아메리카행 배에 올라탔지만 오래지 않아 배는 풍랑으로 난파했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는 네덜란드 해안으로 떠밀렸다.

또다시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하는 삶. 하지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삶임을 입증하듯, 암스테르담에 있는 무역회사의 잡일꾼으로 취직한 그곳에서 슐리만의 천부적 재능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 상인들로부터 물건을 사고파는 짧은 기간에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 것이다. ‘포텐이 터진’ 그는 잽싸게 다른 회사의 통역관으로 자리를 옮겨 러시아어를 배운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갔다. 다른 무역상들보다 한발 빨리 인디고와 수은을 수출해 그야말로 떼돈을 벌었다. 불과 스물여섯 살에 그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이제 골드러시 붐이 이는 미국으로 갈 차례였다. 지난번 난파했던 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호화여객선에 몸을 맡긴 6주간의 선박여행 중에 스웨덴어와 폴란드어를 배웠다고 전해지지만, 언어란 게 천부적 재능만으로 그리 빨리 습득 가능한 것일까. 어쨌든 금광 도시 새크라멘토에 도착하자마자 은행을 열고 금광석과 사금을 달러로 교환해주며 또다시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고 하니 돈 냄새를 맡는 후각만큼은 타고났던 듯하다.

충분한 돈을 모은 슐리만은 사업을 접고 세계여행에 나섰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 아테네를 근거지로 정한 뒤 16번째 언어로 그리스어를 배우고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꼼꼼히 읽으며 탐사할 장소를 분석했다. 많이 배우신 사람들이 무모하고 어리석다고 비웃든 말든, 그는 지금의 터키 히사를리크 언덕으로 올라가 작업에 돌입했다. 발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고 한다. 얼마쯤 파내려 가자 오래된 유물들이 층층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학계의 조사 결과 슐리만이 발굴한 곳은 그가 그토록 오래 염원하던 트로이임이 밝혀졌다. 전설 속에 묻혔던 기원전 2000년의 세계가 실재하는 역사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자, 많은 사람을 들뜨게 할 또 하나의 판타지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그 판타지의 공간으로 가는 중이다. 어릴 적 슐리만 이야기를 듣던 때부터 짝사랑처럼 대책 없이 그리워만 하던 곳. 전설과 역사가 교차하는 트로이를 눈앞에 두고 마음이 제멋대로 후들거리고 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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