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초격차’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자격으로 임시주주총회를 진행하던 권오현 당시 부회장. 초격차 전략으로 압도적 1위를 달성하게 한 주인공으로 꼽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반도체의 신화’라 불리는 권오현(66)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이 펴낸 경영서다. 권 회장은 서울대ㆍ카이스트ㆍ스탠퍼드대를 거쳐 1985년 미국 삼성반도체연구소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1992년 64메가 D램 세계 최초 개발을 시작으로 LSI(대규모집적회로) 사업부 사장, 반도체부문(DS) 총괄사장, 부회장을 거쳐 회장에 올랐다. 2017년 10월 삼성전자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는 자리에서 경영 일선 퇴진을 선언했다.

권 회장의 트레이드마크는 무엇보다 2008년 시동을 건 ‘초격차 전략’이다. 초격차란 이미 1등을 하고 있음에도 “2등이 1등을 따라잡을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차이를 벌리는, 아예 격(格)을 달리 해버리는 전략”이다. 삼성전자 사상 최대 실적은 초격차 전략의 결과다.

다른 결과도 있다. 권 회장은 이런 성과에 힘입어 2017년 243억원의 연봉을 받아 3년 연속 국내 최고 연봉자가 됐다. 이는 삼성의 오너 이재용 부회장의 8억7,100만원은 물론, 신동빈 롯데 회장의 152억원,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109억원, 정몽구 회장 80억원 등 대기업 오너 일가들을 훨씬 앞지르는 수준이다. 등기이사로 연봉이 공개된 2013년부터 계산하면 그가 가져간 연봉의 합은 62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치도 나온다.

이런 권 회장이 처음 풀어놓는 경영 이야기라면 군침이 돌 만하다. 권 회장을 수십 차례 만난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정리했다. 책은 시장 반응을 살피기 위해 초판 5,000부를 찍었으나 이내 매진됐고 이어 3만부를 급히 재인쇄했다. 정작 삼성 사람들도 아직 구해보지 못했다는 말이 돈다. 다만 반도체에 대한 구체적 얘기는 없다. “산업의 특성상 설명을 자세히 해드릴 수는 없었다”고 양해를 구해뒀다.

책은 크게 두 가지 축이다. 하나는 최고경영자의 냉철한 리더십이다. 가령 이런 얘기다. 내년 사업계획은 올해 8~9월 조직도를 그리는 데서 시작한다, 사람에 맞춰 조직도를 그리는 게 아니라 조직도에 맞춰 사람을 배치한다, 적임자가 없다면 억지로 가져다 앉힐 게 아니라 비워두거나 겸임시킨다 등.

2010년 5월 경기 화성에서 열린 삼성전자 반도체 16라인 기공식.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적자를 기록했지만 초격차 전략에 따라 삼성전자는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왼쪽부터 당시 권오현 사장, 이건희 회장, 최지성 사장, 이재용 부사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보상 원칙으로는 ‘4P 시스템’을 제시한다. 성과(Performance)에는 돈(Pay)을, 잠재적 성장역량(Potential)에는 승진(Promotion)을 준다. 성과엔 능력 외 여러 요인이 개입하기 때문에 실적 좋다고 승진 잔치를 벌이다가는 나중에 곤란한 지경에 빠진다는 충고다. 동시에 보상 자체는 확실하고 충실해야 한다.

조직 내 ‘폭탄 제거’는 어떨까. 권 회장은 ‘사일로(Silo)’와 ‘야생마’를 주적으로 지목한다. ‘창고’란 의미의 사일로는 주변과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왕국을 구축한 이들을 말한다. ‘이 분야는 우리 것’이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뭉친 집단이다. 경영 쪽에서는 소니의 실패를 상징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야생마’는 오만방자하고 부정적 태도로 조직 분위기를 망치는 이들이다. 당연히 이들은 성과가 안 좋지만, 설사 성과가 좋더라도 장기적으론 조직에 독이다.

권 회장은 이들에 대해선 ‘전배’, 곧 다른 업무와 부서로 보내는 전환배치 카드를 꺼내 들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전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로 인해 깨닫는 바가 없다면 사표를 받아내야 한다. 사일로를 박살내고 야생마에게 사표를 받아내는 것 또한 리더의 중요한 일이다. 물론, 따로 한 챕터를 떼내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고 공공기관은 다르다는, 나름의 안전판도 마련해뒀다.

책의 또 다른 축은 기업문화다. 반도체 신화의 주인공, 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밥 먹듯 야근하는 엄청난 중노동’을 떠올린다. 권 회장은 이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삼성전자 내부에서 권 회장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문화를 관철시킨 사람’으로 꼽힌다. 일의 ‘성과’뿐 아니라 일의 ‘철학’에서도 존경받는 이유다.

초격차
권오현, 김상근 지음
쌤앤파커스 발행ㆍ336쪽ㆍ1만8,000원

실제 사장이 된 뒤 권 회장은 부하직원들이 주말에 출근해야 한다는 이유로 월요일 회의를 없애는 등 회의를 대폭 축소했다. 회의를 해도 보고서를 브리핑하는 방식 보다 차 한잔 들고 원탁에 앉아 이야기 나누는 걸로 바꿨다. 스스로 ‘칼퇴근’의 모범을 보였을 뿐 아니라, 퇴근 뒤 메일을 열어본다거나 지시한다거나 하는 일도 절대 하지 않았다. 자기가 움직이는 순간 부하직원들이 움직여야 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권 회장은 그걸 ‘CEO는 뇌처럼 일한다’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는 하지 않는다’ ‘임원이 되면 일하는 시간이 아니라 일하는 실력을 늘려야 한다’ ‘고위직에 오르는 순간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의 목록을 만든다’ 등으로 정리해뒀다.

그러면 ‘일하는 실력’은 어떻게 키울 것인가.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독서는 좋은 방편이다. 권 회장은 “1년에 70~100여권의 책”을 읽었다. 모두 다 읽었다거나, 모두 다 유용하진 않았다. “그 중에서 약 3분의 1 정도에서만 영감을 얻었다.” 책 종류는 가리지 않는 ‘잡독’ 스타일이지만, 가장 좋아한 건 ‘진화’에 대한 책이었다 했다. “모든 조직은 자신의 옵티멈(Optimum), 즉 최적에 다가가려고 하기” 때문에 기업하는 이에게 진화 이야기는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영감을 준다는 설명이다.

오직 성공가도를 달렸을 것 같은 권 회장이지만, 스스로 콤플렉스라 생각한 것도 있었다. 그 얘기도 진솔하게 풀어놨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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