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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배 집회, 진한 간절함 담은 약자들의 투쟁법

입력
2018.09.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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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송전탑반대 대책위 소속 주민들이 지난 해 10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신고리 5ㆍ6호기 백지화 염원 108배'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인터넷 캡처
밀양송전탑반대 대책위 소속 주민들이 지난 해 10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신고리 5ㆍ6호기 백지화 염원 108배'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인터넷 캡처

한국 사회에서 108배는 웰빙 운동이기에 앞서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 수단이기도 하다. 최근 막을 내린 한국철도공사(코레일) KTX 여승무원 복직 문제, 지난해 우리 사회를 양분했던 탈원전 문제 등 108배가 인상적인 역사의 한 장으로 기억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KTX 승무원들의 복직 투쟁은 지난달 코레일과 특별채용에 합의하며 대장정을 마쳤다. 2006년 파업 개시 이후 4,526일, 햇수로는 13년 만이었다. 완전 복직이 아닌 특별채용 형식이라는 점에서 갈등의 불씨가 남아있긴 하지만, 기나긴 시간에도 여론에서 멀어지지 않고 사측의 양보를 받아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투쟁으로 기억될 참이다.

특히 고비마다 선택했던 108배가 투쟁 성공에 주효했다는 평가다. KTX 승무원 노조는 지난해 부산역에서 복직 기원 108배 집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올해 1월 서울역, 5월 대전역에서 108번의 복직을 위한 절을 올렸다. 간절한 굴신(屈身)을 지켜보며 시민들은 “KTX 승무원들이 여태 투쟁하고 있었는지 몰랐다”며 다시금 격려를 보냈다. 유례없는 폭염과 열대야가 덮친 올해 여름, 서울역 천막에서 59일 동안 이어진 ‘복직 염원 108배’는 그 절정이었다.

승무원 A씨는 당시 108배 투쟁을 ‘조용하고 작은 승리’로 기억했다. 그는 “처음 108배를 했을 땐 불자도 아닌 나로선 ‘이게 무슨 효과를 발휘할까’라고 의문을 가졌다”며 “그런데 이력이 쌓여 108배를 하면서도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는 상황이 자주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확성기 소리, 투쟁가, 팔뚝질(손을 치켜들며 구호를 외치는 동작)로 부당함을 알릴 땐 인상을 쓰던 시민들이 조용한 투쟁을 시작하자 시선을 멈추고 집회장소 주변에 게시한 글과 자료를 읽는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다. A씨는 “한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동작을 108번 차분히 반복하는 행위에는 굳이 크게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진한 간절함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며 “투쟁에 지친 동료들이 몸과 마음을 다시 가다듬는 기회도 됐으니, 여러모로 108배 투쟁은 우리 내부에 조용하지만 작은 승리의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경남 밀양에 사는 노인들도 지난해 10월 108배를 통해 자신들의 투쟁을 세상에 알렸다. 자신들을 ‘밀양송전탑반대 대책위 소속의 할매ㆍ할배’라고 소개한 이들은 신고리 원전 5ㆍ6호기 건설 재개 여부에 대한 공론화위원회의 대정부 권고안 발표가 있었던 그 달 20일까지 4박5일간 정부서울청사 청와대 국회 광화문광장 앞에서 ‘신고리 5ㆍ6호기 백지화 염원 108배’ 투쟁을 벌였다. “지금 밀양 송전선로에는 신고리 1~3호기의 전력이 흐르고 있다. 소음으로 잠을 못 이루고, 전자파로 인해 생태계의 미세한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고리 5ㆍ6호기까지 들어오면 밀양 주민들은 어떻게 ‘전기고문’을 견디며 살아야 하냐.” 공론화위의 건설 재개 권고로 이들의 염원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절절한 호소만큼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았다.

‘강성’ 이미지가 강한 노조들도 종종 108배 투쟁을 한다. 2015~2016년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통합 과정에서 전국금융산업노조 외환은행지부 조합원들도 그랬다. 외환은행지부는 “하나금융지주가 노사 협상에 성실히 응하는 것이 먼저”라며 “금융당국은 하나-외환은행의 통합 예비인가를 강행하지 말라”고 주장하며 당시 서울 태평로에 있던 금융위원회 청사 앞에서 108배를 올렸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몹시 추웠던 연초 어느 날 외환은행 노조원들이 빨간 띠를 머리에 매고 침묵 속에 108배를 하는 것을 봤다”며 “투쟁의 진정성이 확실히 느껴지면서 ‘적어도 돈 때문에 아귀다툼하는 것을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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