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홀로 진행하고 있는 캠페인이 있다. 그건 바로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 남들이 다 하니까 하는 질문은 하지 않기’ 캠페인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질문은 기존에 보편적으로 여겨졌던 생애주기에 따른 질문이다. 청소년에게는 공부는 잘하는지 대학은 어디를 갈 건지 묻고, 성인이 되면 연애는 하는지, 취업은 했는지를 묻고, 사회적으로 결혼 적령기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결혼은 언제 할 건지를 묻는 것이다. 기혼자에게는 아이를 언제 낳을 것인지, 아이가 있다면 둘째는 또 언제 낳을지 묻는다. 그리고 이 질문은 아이에게 다시 되돌아간다. “몇 살이니? 공부는 잘하니?”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말하면 보통 이런 답이 되돌아온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고, 요새 젊은 애들 때문에 도무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면, 안 해 본다면 어떨까? 누군가의 현재를 미완성이라고 여기고 한 사람의 삶을 다음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 진행하는 과정으로만 여기는 질문이라면, 하지 않는 게 더 나은 소통의 방식이 아닐까?

놀랍지만 이 나라 역시 국민, 특히 여성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있는 듯하다. 1968년부터 시행되어 왔다는 출산력 조사를 통해, 이 나라는 나에게 묻고 있다. 탄생부터 2등 번호를 할당받은 국민 1인으로써 당신의 자궁은 다음 세대를 출산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말이다. 날이 갈수록 출산율이 줄어 가는 이때, 인구수 증가에 보탬이 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며 꼬치꼬치 질문을 던진다.

나는 출산력 조사 대상자다. 나는 2016년 말 공개됐던 대한민국 출산지도에서 가임기 여성 인구의 숫자 1로 더해진, 문서에 기록된 가임기 여성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출산력을 가진 가임기 여성으로 언제나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낳아야 하는 존재다. 동시에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나는, 이 나라 법무부에 따르면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임신과 출산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성교의 결과로 임신을 했다면 내 몸에 대한 권리는 내게 없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의지로 임신 중단을 결정할 수 없다. 내가 임신 중단을 결정한다면 그때부터 나는 소중한 다음 세대 인구 1인의 존재를 지운 범법을 저지른 것이 된다. 만약 혼인 관계 바깥에서 아이를 낳겠다고 결정한다면, 미혼모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사회에서 최소의 지원 만을 받으며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동안 나의 경력은 단절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출산율이 떨어져 국가적 위기 상황이니 어서 아이를 낳으라고 말한다.

전문가에게는 출산율이 “체제 붕괴나 경제 위기 같은 뚜렷한 원인 없이” 떨어진 것으로 보이겠지만, 한국 여성들은 원인을 안다. 여성들은 막연한 상황에서 비혼이나 비출산을 결심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대충 출산을 유보하는 것도 아니다. 지하철 노약자석에 해당하는 경우를 알려 주는 그림에서 임신부 위에만 가위표가 쳐져 있는 것을 볼 때, 출산을 위해 휴직했던 옆자리 동료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 아무 데서나 ‘맘충’이라는 단어가 들려올 때, 매일의 일상에서 이 나라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미션임을 깨닫는다. 여성들은 결심한다. 낳지 않는 것이 도덕이라고. 이 땅의 여성들은 ‘낳으면 일단 알아서 자라게 되어 있다’는 무책임한 말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여성에게는 일상이 전쟁이고, 매일의 삶이 위기일진대 ‘이렇게 급속하게 출산율이 줄어든다면 이 나라는 멸망의 길로 갈 것’이라는 협박이 통할 리 만무하다. 우리는 “아이는 언제 낳으실 생각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아이를 곧 낳을 것이고 이왕이면 둘은 낳을 것이라는 대답 만을 무책임하게 기다리는 이 나라에 결코 원하는 답을 해 줄 생각이 없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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