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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도 형량도 몰랐다… 평생 죄인으로 낙인찍힌 4ㆍ3 수형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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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도 형량도 몰랐다… 평생 죄인으로 낙인찍힌 4ㆍ3 수형인들

입력
2018.09.03 20:11
수정
2018.09.03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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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도 숨겨온 비밀 꺼내

무죄 증명할 마지막 기회 찾아

재판기록 없어 법리다툼 치열할 듯

[저작권 한국일보]지난 3월 19일 오후 제주시 이도2동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제주4ㆍ3재심 청구소송의 2차 재판을 앞두고 재심 청구인 김평국 오희춘 부원휴 현창용(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씨가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들은 1948년~1949년 4ㆍ3당시 내란죄 혐의로 군법회의를 통해 징역 1년~5년형을 받고 복역했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경찰의 감시와 연좌제로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고 호소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지난 3월 19일 오후 제주시 이도2동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제주4ㆍ3재심 청구소송의 2차 재판을 앞두고 재심 청구인 김평국 오희춘 부원휴 현창용(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씨가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들은 1948년~1949년 4ㆍ3당시 내란죄 혐의로 군법회의를 통해 징역 1년~5년형을 받고 복역했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경찰의 감시와 연좌제로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고 호소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제주 서귀포시 하효동에서 태어난 오희춘(85) 할머니는 2016년 자식들에게 70여년간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놨다. 그는 1947년 어느날 동네 주민이 “육지에서 물질하게 해 주겠다”며 건네 종이 한 장에 지장을 찍은 이후 평생 가슴에 4ㆍ3사건의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살아왔다. 주민이 건네 종이는 해녀 모집 종이가 아닌 남로당 가입문서였고, 그는 4ㆍ3사건이 발생한 1948년 10월 서귀포경찰서로 잡혀간 후 군법회의를 거쳐 전주 형무소를 끌려갔다. 오 할머니는 형무소에 도착하고서야 자신이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억울하게 10개월의 옥살이를 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처녀가 징역살이’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가슴 속에 평생 묻어놓고 살아왔다. 하지만 2016년 4ㆍ3도민연대를 통해 다른 4ㆍ3사건 수형 생존자들을 만나 후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줄 재심 신청을 결심하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 할머니를 포함해 4ㆍ3수형 생존자 18명은 지난해 4월 19일 제주지방법원에 4ㆍ3 당시 이뤄진 불법적인 군사재판에 불복해 70여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고, 1년 5개월만에 법원이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많게는 100세를 앞둔 할아버지와 적게는 80세를 훌쩍 넘은 할머니들이 70년 세월이 지난 이제야 가슴에 품어온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온 셈이다.

4ㆍ3수형인들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는 군사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아 전국 형무소에 수감됐던 제주도민들로, 2,530명에 이른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불순분자라는 이유로 총살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됐다. 재심을 청구한 수형 생존자들도 1948년 12월 제주도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구형법의 내란죄위반, 1949년 7월 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의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죄, 이적죄 등으로 1년~20년 사이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피해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군ㆍ경에 의해 끌려가 재판을 받았고, 형무소에 가서야 자신의 죄와 형량을 알았다. 이들은 겨우 살아서 고향인 제주로 돌아왔지만, 다시 연좌제의 굴레가 씌어져 평생을 고통을 받아왔다.

수형 생존자들이 이번 재심 결정으로 어렵게 다시 정식 법정에 서게 됐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4ㆍ3사건 당시 불법 군사재판 과정에서 수형 생존자에 대한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 등 재판 기록은 현재 남아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재심은 유죄 판결을 다시 판단하는 절차로, 판결이 없다면 재심은 불가능하다. 재심 청구 이전 유일하게 남아있는 공식자료는 이름과 나이, 직업, 형량, 수감교도소 등이 기재된 ‘수형인명부’뿐이었다. 하지만 재심 결정을 위한 재판 과정에서 4ㆍ3당시 불법감금 된 사람들에게 형 집행을 요구하는 군 집행 지휘서 등 추가문서들이 증거로 제시됐다. 수형인들은 또 범죄경력증명서에 나온 수감기관 명과 지역이 수형인명부와 일치하고 있으며, 생존자 진술을 통해 당시의 구속과 재판의 위법성이 인정되는 만큼 재심이 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4ㆍ3 당시 군법회의가 실체적 정당성이나 절차적 적법성 여부를 떠나 당시 재심청구인들의 형벌법규 위반 여부 및 그 처우에 관한 사법기관의 판단이 있었고, 그에 따라 재심청구인들이 교도소에 구금됐다고 인정된다”며 “또 재심청구인들에 대한 불법구금 내지 가혹행위 등 재심사유가 존재한다”고 재심개시 결정 이유를 밝혔다.

재판 기록 없는 전국 최초의 재심 청구 사건에 대해 법원이 재심 결정을 내리면서 향후 법정에서 검찰과 변호인간의 치열한 법리다툼이 펼쳐질 전망이다.

제주=김영헌 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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