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신기욱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외부로부터의 시각 중요성
美서 활동 대표적 동북아 전문가
국내 시각에 ‘외부의 시선’ 더해
대북정책 등 효과적 로드맵 제시

한국 특유의 종족적 민족주의
한국사회 움직이는 중요 원리로
혈연 기인한 단일민족주의 주목
산업화ㆍ통일 등 ‘통합 담론’ 역할

‘통합 민족주의’로 한계 극복
민족주의 배타ㆍ억압성 극복 위해
다양성 허용하는 민주주의 결합
제도 개혁ㆍ문화 혁신 밑바탕으로
신기욱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미국의 비주류 정권이기에 한국의 적극적 노력이 있다면 북핵 문제에 또 다른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돌고래 외교론'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100년 우리 지식인들의 무대가 한반도에 제한돼 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다음 외국으로 나가 그곳에서 연구와 학문을 이어 간 지식인들이 적지 않다. 이 기획에서 앞서 다뤘던 장하준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늘 외국에서 활동해 온 우리나라 출신의 또 한 명의 지식인을 살펴보려고 한다. 신기욱이 바로 그 인물이다.

신기욱을 다루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그는 미국에서 활동해온 주목할 만한 한국학자다. 다른 나라에서 우리 역사와 사회를 연구하는 것을 한국학이라 부른다. 한국학이 가장 크게 발달한 곳은 미국이다. 오랜 한미관계의 역사와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자연스레 한국학을 활성화시켰다. 신기욱은 브루스 커밍스, 제임스 팔레 등을 이은 대표적인 한국학자이자 동북아 국제관계 전문가다.

둘째, 그는 민족주의에 대한 뛰어난 사회학자다.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함께 모더니티의 핵심 요소를 이뤄 왔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식민주의에 맞서는 투쟁 이념으로 민족주의가 갖는 함의는 각별했다. 광복 이후 민족주의는 모더니티의 형성 과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기욱의 민족주의 연구는 우리나라 밖에서 우리 사회 민족주의를 분석하는 외부로부터의 시각을 대변하고 대표한다.

식민지 근대성의 탐구

신기욱은 1961년 경기 부천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다음 아이오와대, 캘리포니아주립대(UCLA)를 거쳐 스탠퍼드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쳐 왔다. 또 그는 스탠퍼드대 아시아ㆍ태평양연구소 소장을 맡아 한미관계, 남북관계, 동북아 국제관계를 연구해 왔다. 사회학과 국제관계는 그의 학문적 정체성을 이루는 양대 분야라 할 수 있다.

신기욱은 일제 강점기 사회운동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신기욱이라는 이름이 국내 지식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국학자 마이클 로빈슨과 함께 편집한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Colonial Modernity in Koreaㆍ2001)’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우리말 번역본에는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넘어서’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이 주목받은 까닭은 식민지 시대를 탈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 이 책의 저자 다수는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모두 비판하는 관점을 취한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를 위한 헤게모니가 어떻게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정체성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추적한다.

이 저작은, 신기욱과 로빈슨이 밝히듯, “민족주의 거대 담론의 볼모로 잡혀 있는 역사 주체들과 침묵을 강요당한 목소리들을 복원함으로써 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식민지 사회상”을 재현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을 번역한 도면회가 지적하듯, ‘식민주의’보다는 ‘근대성’ 분석에 치중하고 있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Ethnic Nationalism in Koreaㆍ2006)’는 신기욱의 대표 저작이다. 민족주의의 다양한 이론적 토론을 바탕으로 신기욱은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ㆍ정치ㆍ유산을 분석하고 그 미래를 전망한다. 민족주의를 주목한 까닭에 대해 그는 말한다.

“과연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는 무엇일까. (...)유교주의, 가족주의, 집단주의를 한국사회의 구성원리로 거론하지만 내게는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혈연에 기인한 단일민족주의 내지 의식이다. 특히 한국인의 단일민족주의를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한국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기욱은 한국 민족주의를 ‘종족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로 파악한다. 종족적 민족주의는 혈통과 인종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을 부각시키는 담론이다.

주목할 것은 종족적 민족주의에 내재한 양면성이다. 신기욱에 따르면, 종족적 민족주의는 한편에서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를 위한 ‘개발 윤리’의 기초를 이뤘고, 나아가 통일 과정에서도 통합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정체성들을 주변화시키거나 억압함으로써 인권과 시민권의 침해를 정당화했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해 신기욱은 종족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인들에게는 단순히 잘못된 통합을 장려하고 그것에 대한 순응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는 인종의식에 호소하기보다는 대중 사이의 다양성과 유연성을 허용해 줄 민주적 민족정체성을 촉진할 제도적 틀이 필요하다. 한국인들은 단순히 종족적 한국동포로서가 아니라 민주적 정치조직의 평등한 시민으로서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요컨대, 신기욱은 민주주의의 상상력을 강조한다. 민족주의에 내재된 배타성과 억압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그 출신이 어느 나라든 모두가 민주주의 사회의 평등한 시민으로 더불어 생활할 수 있도록 제도 개혁과 문화 혁신을 동시에 이뤄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위태로운 인종적 민족주의에 대한, 미래의 통일 한국이 가져야 할 통합의 민족주의에 대한 신기욱의 이러한 충고는 이론적ㆍ실천적으로 숙고할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이후 신기욱은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다룬 저작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하나의 동맹, 두 개의 렌즈(One Alliance, Two Lensesㆍ2010)’가 한미동맹에 대한 한국의 렌즈와 미국의 렌즈를 비교한다면, 한국학자 데이비드 스트로브, 조이스 리와 함께 쓴 ‘남북관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Tailored Engagementㆍ2014)’는 대북정책에서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맞춤형 ‘인게이지먼트’ 로드맵을 제시한다. 그는 한국이 강대국들 사이에 낀 ‘새우’가 아니라 이제 ‘돌고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견국가로서의 한국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하는 게 그의 ‘돌고래 외교론’이다.

신기욱의 저서들. 외부인의 시각으로 한국의 식민지 경험과 민족주의 문제 등을 논한다.

신기욱은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외부의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 왔다. 우리 사회 문제를 파악하는 시각이 하나일 순 없다. 외부의 지식인이 제안하는 ‘외부로부터의 시각’은 우리 사회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해 온 ‘내부로부터의 시각’에 넓이와 깊이를 더한다. 우리 학문과 사상에 대한 신기욱의 기여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식인의 세계화

신기욱의 삶은 지식인의 세계화를 돌아보게 한다. 지식인이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는 것은 오랜 역사를 갖는다. 서양에서 고대 그리스 지식인들은 지중해 각 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춘추전국시대 지식인들은 여러 나라를 유랑하면서 자신의 학설을 다채롭게 펼쳤다. 지식이 보편적이듯 지식인 역시 세계적인 존재다.

“자기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상냥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보는 사람은 완벽하다.”

12세기에 서유럽에서 활동했던 성 빅토르 수도원의 위고가 남긴 말이다. 이 말에 담긴 의미가 외부로부터의 시각이 내부로부터의 시각보다 더 탁월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의 시각은 내부로부터의 시각이 갖는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분석적 섬세함이 부족할 수 있다. 위고의 말에 담긴 메시지는 분석 대상인 사회에 대해 지식인이 가져야 할 거리와 그 거리 속에서 이뤄져야 할 성찰의 중요성에서 찾을 수 있다.

21세기에 세계화가 비가역적인 한, 지식인의 세계화 현상 또한 갈수록 두드러질 것이다. 신기욱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 사회를 미국 등 서구사회에 제대로 소개하고, 한미 간의 상호이해를 높이고 교류도 활성화하는” 일이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가올 미래 100년 우리 지성사에서 지식과 지식인의 세계화 경향은 더욱 증대할 것이다. 자연과학은 이미 보편화돼 있고, 인문ㆍ사회과학에서도 국가 간 비교 연구와 지구적 차원의 학문 교류가 더욱 활발히 이뤄질 것이다. 지식과 지식인의 세계화가 이렇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 학문과 사상은 더욱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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