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 작가. 사계절출판사 제공

‘결핍’이라는 말을 다시 썼다. ‘이해’도, ‘동정’도, ‘관계’도 다시 썼다. 결국 독자의 마음을 다시 쓴다. ‘산책을 듣는 시간’은 그런 소설이다. 청소년소설 신인상인 사계절문학상 올해 수상작이다. 심사에서 ‘그냥’ 소설로 문학상에 내도 손색 없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글 쓰려고 극장, 출판사, 고시학원, 방송국, 무인 경비회사, 절, 선거 캠프, 식당, 카페 등에서 ‘알바’만 하며 살았다는 정은(39) 작가의 데뷔작이다.

주인공 10대 소녀 수지는 듣지 못하는 농인이다. 엄마, 할머니, 고모와 산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빠는, 아빠에게 맞은 기억이 없으므로, 좋은 아빠라 여긴다. 외로운 것, 듣지 못하는 것이 수지에겐 결핍이 아니다. 늘 외로웠고, 늘 듣지 못했으니까. “부족한 것보다는 아예 없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이미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수지의 진심이다.

수지는 못 듣는 게 아니다. ‘남들처럼 듣지 않는’ 능력이 있는 거다. 수지는 구름이 흘러가며 내는 소리를 듣고, 건반에 반사된 빛의 춤으로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수지는 수화를 모른다. 엄마와 둘만 아는 몸짓으로 대화하고, 추상과 은유로 세계를 이해한다. 화장대 의자는 ‘엄마가 곧 외출한다’는 뜻이기도, ‘수지가 (앉아서) 반성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귀가 되었다’는 말은 ‘영영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엄마는 수지가 슬픔을 아는 게 싫어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알려주지 않는다.

수지는 한민이라는 소년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이 뭔지 모르는 채로. 전색맹이어서 흑백으로만 세상을 보는 소년의 마음은 텅 비어 있지만 수지에겐 따뜻하다. 슬픔을 몰라서 갑갑하다는 수지를 한민은 이렇게 위로한다. “슬퍼하는 법을 발명해 봐. 너처럼 슬퍼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슬플 수 있어서 기쁠 거야.” 시인이 되겠다는 수지에게 시인 임명장을 써 준다. “지구 시인으로서 시를 써서 지구의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못한 것도 같이 담아 세상이 불안정함을 널리 알려도 좋고 혼자서만 알아도 좋다. 시를 안 쓰고 시인인 척만 해도 좋다.”

수지의 충만한 행복은 인공 와우(달팽이관) 장치를 달면서 끝난다. 소리가 들리는 건 광명이 아니라 고요의 박탈이다. 너무 많이 들리는 불편을 참을 수 없다. “이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굴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정상이 되었다며 기뻐하는 꼴이라니, 배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 엄마, 고모가 차례로 떠난다. ‘장애인’ 수지는 홀로 설 수 있을까. 여느 장애인 드라마와 다른, 원망하는 사람도, 희생하는 사람도, 극복하는 사람도 없는 결말이 여운을 남긴다. “(인공 와우 수술) 실패해도 못 듣기 밖에 더 하겠냐. 뇌가 망가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수지 할머니의 말이다. 그리고 이 다정한 소설이 들려주는 말이다.

산책을 듣는 시간
정은 지음
사계절 발행∙180쪽∙1만1,000원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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