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00만원’ 자격요건 후폭풍
“투기세력 핀셋 규제 안 하고
봉급생활자만 숨통 죄는 격”
갭투자 감소세도 감안 안 돼

# “무주택 가구는 소득 상관 없어”
정부, 하루 만에 말바꾸기
30일 서울 시내 한 시중은행 앞에 전세자금대출 홍보 현수막이 부착돼 있다. 연합뉴스

“진지에 적군(투기세력)이 몇 명 침투했다고 아군(서민)이 죽거나 말거나 폭탄을 쏟아붓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 살짜리 딸을 둔 배모(39)씨는 30일 한국주택금융공사의 전세자금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전세대출 자격요건을 부부합산 연 소득 7,000만원 이하(신혼부부는 8,500만원)로 강화한다는 전날 정부 발표에 분통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했다. 부모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결혼 생활을 시작한 ‘외벌이’ 중견기업 과장인 배씨의 연 소득은 7,200만원이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서울 도봉구 전용면적 65㎡ 아파트에 월세로 살고 있다. 배씨는 “연봉 7,000만원이 넘는다고 해도 세후는 5,000만원 선이고 월세 120만원과 생활비, 아이 보육비 등을 빼면 저축도 힘들어 언제쯤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 지 까마득하다”며 “투기세력을 잡으려면 시장 감시ㆍ감독을 강화하거나 핀셋 규제를 해야지 왜 가진 것 없이 열심히 사는 샐러리맨들의 숨통을 죄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 안양시 전세 아파트(59㎡ㆍ3억1,000만원)에 살고 있는 결혼 2년차 33살 동갑내기 부부도 정부 발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해 대기업 연구원으로 입사한 남편과 출판업체에서 6년 간 일해온 아내의 합산 연봉은 8,600만원이다. 이들은 "숫자만 보면 고액 연봉자 부부 같지만 빚을 갚기 전에는 아기를 가질 생각도 없다“며 “열심히 준비해 괜찮은 직장에 입사한 맞벌이 부부들은 모두 전세대출도 못 받는다는 말이냐"고 푸념했다.

정부가 전세대출보증 불가 기준으로 부부합산 연 소득 7,000만원을 설정한 뒤 실수요자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기준선이 낮아 대상 가구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대다수 연봉 생활자의 현실을 모른 채 정책을 집행하려 한 것 아니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현재 국내 소득 상위 30%인 8분위(월평균 588만2,435원) 가구부터 연 소득이 7,000만원을 초과한다. 더구나 신혼부부의 경우 맞벌이가 늘어나면서 부부합산 연소득이 8,500만원 이상인 가구가 26%에 이른다. 고소득이라고 몰아 전세 대출을 해 주지 않을 경우 애꿎은 실수요자들의 피해가 커질 수 있는 셈이다.

정부가 타깃으로 삼은 ‘갭투자’가 최근엔 소강 국면으로 가고 있다는 점도 감안되지 않았다. 정부가 폭탄 낙하지점 자체를 잘못 잡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30일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전국 아파트 전세가율은 지난해 12월 68.7%를 찍은 이후 매월 떨어져 지난달 67.7%까지 낮아졌다. 특히 서울 강남권은 59.2%까지 떨어졌다. 전세가율이 낮아졌다는 것은 매매가격과 전세가격 차이가 커졌다는 뜻으로, 통상 전세가율이 낮아질 수록 갭투자는 줄어든다. 서초구의 한 부동산중개사무소 대표는 “집값과 전셋값 차이가 10억 원을 넘어서면서 강남에선 갭투자가 사라졌고, 오히려 노원 등 강북지역에서 갭투자 매물이 나오는 실정”이라며 “최근 전세를 끼고 집을 사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주택 실거주 수요라 투기세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실수요자들의 불만이 커지자 정부는 하루 만에 부랴부랴 정책을 바꿨다. 금융위원회는 이날 보도참고 자료를 통해 “무주택 가구에 대해선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전세자금대출 보증을 받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고소득자 기준 자체와 1주택자 적용 방침은 유지하기로 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구체적 내용은 관계부처와 협의해 확정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권일 부동산인포 팀장은 “부적절한 고소득 기준도 문제지만 정부가 성과 내기에 급급해 허술한 정책을 내놓았다 다시 회수하는 게 더 큰 문제”라며 “박원순 서울시장에 이어 금융위도 정책 신뢰도를 떨어뜨리니 시장에선 ‘정부 말 듣지 말고 일단 집부터 사자’는 심리가 더 커지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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