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채당(蔡黨)과 홍당(洪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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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칼끝이 채제공을 겨누자
따르던 남인들 앞다퉈 거리둬
최측근인 조카 채홍리마저 배신
다산 처가인 홍씨 집안과 손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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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채ㆍ反채 따라 대채ㆍ소채 갈리고
이후 채당ㆍ홍당으로 갈등 고착화
정조는 반대에도 채제공을 우의정에
80년 만에 남인 재상 탄생하자
같은 남인이어도 소채ㆍ홍당은 사색
채제공이 우의정으로 발탁될 즈음인 65세 당시 초상의 초본. 오른쪽 글씨엔 ‘영의정 문숙공’이란 표기가 자랑스럽게 적혀 있지만, 80년만의 남인 재상이라 여러 정치적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일까. 정작 체제공 자신은 너무 피곤해 보인다는 이유로 이 그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온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권력 앞의 줄서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벽파에게 복수를 꿈꿨지만 이를 뒷받침 해 줄 대안 세력이 없었다. 남인에게 그 기대가 쏠렸다. 그 중에서도 채제공(1720~1799)은 영조가 정조에게 “나에게는 순신(純臣)이요 너에게는 충신(忠臣)”이란 평가를 남겼던 인물이다. 정조는 처음부터 노론 벽파를 견제하는 대안 세력의 수장으로 채제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조 즉위 초반 정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홍국영이 1780년에 실각했다. 영의정 서명선이 눈치 빠르게 채제공을 홍국영의 두둔 세력으로 몰아 직격했다. 여기에 사도세자 추존 문제와 역모 세력의 배후설을 보태 채제공을 연신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1780년 대사간 조시위(趙時偉)의 상소를 신호탄으로 채제공에 대한 집요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를 죽여야만 끝날 기세였다.

노론 벽파의 칼끝이 연일 채제공을 겨누자, 그는 도성 밖에 나가 살며 숨을 죽였다. 채제공은 이제 끝났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목숨을 거둬가는 것이 시간 문제였다. 권력의 속성은 무섭다. 큰 권력이 흔들리면 새 줄서기가 시작된다. 잡고 있는 줄이 썩은 동아줄로 판명난 뒤면 너무 늦다. 문제는 썩은 동아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 때 일어난다. 뒷감당을 할 수 없는데다 배신자의 낙인까지 찍힌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숱한 정객들이 단 한번 판단의 결과로 아예 사라지거나 화려하게 부활했다.

채제공 중심으로 결속되었던 남인 세력에 동요와 균열이 왔다. 줄을 잘못 서면 자신들의 미래가 사라질 판이었다. 등골에 진땀이 흘렀다. 눈치 보기가 시작되었다. 채제공에게 긴요한 일로 편지를 쓰면서도 뒤탈이 무서워 편지 끝에 자기 이름을 적지 않았다. 채제공은 그런 편지를 받을 때마다 “어찌 그리 겁들을 내는가?” 하며 분노했다.

의도적 도발

남인 이재기(李在璣ㆍ1759~1818)가 쓴 ‘눌암기략(訥菴記略)’은 이 같은 줄서기의 현장을 생생하게 중계한 책이다. ‘눌암기략’은 1783년에 일어난 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전라도 나주에 미강서원(眉江書院)이 있었다. 지금의 미천서원(眉泉書院)이다. 건물이 낡아 곧 허물어질 지경이었다. 그곳 유림들이 서원 원장을 여러 차례 지낸 채제공을 찾아와 재건축을 위한 경비 지원을 호소했다. 채제공은 당시 노론의 집중 포화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 나설 처지가 못 되었다.

“강원도관찰사 채홍리(蔡弘履)를 찾아가 내 부탁이라 하고 청해 보게.”

채홍리는 채제공의 집안 조카였으나 의리로 치면 부자간이나 같았다. 유생들이 채제공의 편지를 받아들고 한걸음에 원주로 달려갔다. 웬 걸 이들은 감영 안으로 한 발짝도 넣지 못했다. 채제공의 편지를 가져왔다는데도 답이 없었다. 이들은 원주의 여관방에서 여러 달을 하염없이 관찰사의 하회만 기다리다 아무 성과 없이 나주로 돌아갔다.

소문이 금세 퍼지자 남인 내부가 동요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도적 도발이다.”

실제로 그랬다. 조카 채홍리는 집안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아버지와 다름없는 채제공을 먼저 도발했다. 다시 안 볼 작정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었다.

음덕을 쌓으시지요

이 일이 있기 세 해 전인 1780년의 일이다. 처음 노론의 공격이 시작되자 채제공은 도성을 떠나면서 채홍리에게 남아 동정을 살피라고 했다. 하루는 채제공이 채홍리에게 연통을 넣어 동대문 밖 촌가에서 만나자고 했다. 허름한 차림으로 채제공이 도착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죽이려 드니, 내가 죽게 될 모양이다. 네가 정민시(鄭民始ㆍ1745~1800)를 찾아가 나를 위해 말을 해다오.”

말투가 비장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채홍리가 정민시를 찾아 갔다. 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 아이가 누구요?”

“내 늦둥이라오.”

채홍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대나 나나 이미 늙었소. 그대는 이 아들이라도 있지만 나는 그마저도 없소. 이 아이를 위해 음덕이나 쌓아 두시구려.”

“무슨 말씀이시오?”

“내 아저씨가 죄 없이 죽게 생겼소. 그저 보기만 할 참이오?”

정민시가 안색을 바꿨다.

“여론이 지금 저 지경이니, 난들 어떡하겠소?”

“그대가 건져주지 않으면 내 아저씨는 죽을 것이요. 보답을 바라지 못할 곳에 은혜를 심어두는 것이 음덕이 아니겠소? 이 아이를 위해 복을 쌓는 셈치고 부디 애써 주시오.”

며칠 뒤 재상들의 연명 상소가 나왔을 때, 정민시만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채홍리는 채제공에 대한 공격이 날로 가팔라지는 것을 보고, 이후 채제공을 떠나 오히려 노론 쪽으로 붙었다. 이 와중에 미강서원 사건이 터졌다.

대채(大蔡)와 소채(小蔡), 두 과부의 싸움

먼저 청파(靑坡)의 도곡(桃谷) 즉 복사골 남인들이 채홍리와의 절교를 선언하는 통문을 돌렸다. 반응은 뜻밖에 시원치 않았다. 남인의 원로 목만중(睦萬中ㆍ1727~1810)은 채제공과 각별한 사이였는데도, 통문을 돌린 복사골 남인들을 격하게 나무라며 통문을 갈기갈기 찢었다. 이 일 이후 남인은 여전히 채제공을 따르는 ‘대채(大蔡)’와 채홍리를 편드는 ‘소채(小蔡)’로 갈렸다. 대채를 공개적으로 표방한 이는 다섯 손가락을 꼽기도 어려웠다.

다산은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에서 “당시 채제공이 노론에게 쫓겨나 도성 밖에 살았다. 채홍리와 목만중 등이 모두 채제공을 배반하였고, 지조가 굳세지 못한 자들은 쥐새끼 모양으로 양쪽을 오가는 자가 많았다”고 썼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자, 다투어 줄을 바꿔 섰다.

이재기가 ‘눌암기략’에서 다시 말했다. “우리 남인들이 100년간 연좌되어 벼슬에서 쫓겨나, 실로 형세나 이익을 다툴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하루 아침에 한 방에서 창을 잡는 변고가 있게 되니, 아! 또한 몹시 불행한 일이다.”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싸우지 않느냐고 누가 말하자 그가 대답했다. “서인이 죽도록 싸우는 것은 나아가고 물러나는 즈음에 이익과 손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 남인의 경우는 두 과부가 싸우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어찌 우습지 않은가?”

채당(蔡黨)과 홍당(洪黨)의 전쟁

정작 당사자인 채제공은 재앙의 기색이 하늘을 덮었는데도 위축된 기미가 없었다. 기상이 대단했다. 평소의 수양 없이는 안 될 일이었다. 그는 문제 앞에서 구차스럽지 않았다. 곧장 직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인들마저 채제공에게 등을 돌린 형국이었다. 오직 광암 이벽의 동생 이석(李晳ㆍ1759~1819)이 장용영(壯勇營) 무관으로 있으면서 자주 채제공을 찾아가서 임금이 그를 그리워한다는 밀지를 전하곤 했다. 의연함의 바탕에 믿는 구석도 있었던 셈이다.

채홍리는 같은 남인인 홍수보(洪秀輔) 홍인호(洪仁浩) 부자와 손을 잡고 반채(反蔡) 연대를 확대시켰다. 대채와 소채의 분열이 이후 채당(蔡黨)과 홍당(洪黨)의 대립구도로 고착되었다. 남인들 내부의 갈등은 골이 이미 깊이 팼다.

눌암기략의 첫 페이지. 남인 내부의 알력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다산은 이 소란의 정중앙에 애매하게 끼어 있었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은 채제공에게 의리를 지킨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산이 남긴 ‘선부군유사(先府君遺事)’에 그 내용이 보인다. 홍수보는 족보상으로는 아내 홍씨의 오촌 당숙이었고, 홍인호는 6촌 처남이었다. 하지만 홍수보와 장인 홍화보는 사실 친형제간이었다. 후에 홍수보가 다른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촌수가 벌어진 것일 뿐이다. 다산의 혼인 당일 꼬마 신랑이라고 놀렸다가 경박한 소년이란 대구로 혼쭐이 났던 홍인호는 실제로는 아내 홍씨의 사촌오빠였다. 그는 당시 임금의 최측근인 승지로 있으면서 수험생 시절의 다산에게 임금의 각별한 관심을 전해주던 메신저이기도 했다.

다산은 채당이었다. 둘이 갈렸을 때 다산은 처삼촌과 사촌처남의 편에 서지 않았다. 이 어정쩡한 위치가 두고두고 다산에게 뒤탈이 되었다. 부부의 금슬도 이로 인해 적지 않게 금이 갔던 듯하다. 결혼식 날 한방씩 주고받았던 장난꾸러기 처남매부 사이는 점차 틈이 벌어져 나중에는 원수처럼 변했다.

80년 만의 남인 재상

궂은 세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백척간두에 서서 목숨이 경각에 달리기도 했다. 1786년 12월, 정조는 채제공을 다시 서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1788년 2월에는 재상들의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채제공을 우의정에 앉혔다. 80년 만에 남인이 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조정의 반발이 예상 밖으로 거셌다. 정조는 그들이 내세우는 채제공의 죄안을 하나하나 직접 해명하면서, 앞으로 한번 만 더 이 문제로 채제공에 대해 시비한다면 무옥(誣獄)으로 처리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아 논란을 단번에 잠재웠다.

소론의 서명선이 영의정에 앉고, 노론의 김종수가 좌의정을, 남인의 채제공이 우의정을 맡아 이 삼두마차로 확실한 상호견제의 황금구도를 세웠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 것이다. 채제공이 완전히 끝난 줄 알고 그를 타격하는데 힘을 보탰던 남인의 소채와 홍당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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