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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410년 태종의 결단에서 배운다

입력
2018.08.27 18:18
수정
2018.08.27 18:5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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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났던 날이니 아직 100일은커녕 석 달도 안 됐다. 그 감격, 그 감동은 어디로 가고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다시 한번 우리 대통령의 신통력에라도 기대를 걸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트럼프의 변덕에 또 한 번 기대야 하는 걸까?

1410년 태종 10년 5월 1일자 ‘태종실록’에서 지혜를 얻어 본다. 이날 실록에는 의정부에서 여진족의 한 부족 두목인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에게 유화책을 쓸 것을 제안하며 이렇게 말한다.

“동맹가첩목아가 이대두(李大豆)를 보내 화친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대두(大豆)가 돌아오면 자제를 보내 입시(入侍)하겠다’라고 했는데 이는 분명 거짓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짓이라고 지레 짐작할 수는 없으니 대두에게 의대(衣襨)를 주어 보내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약간의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의대(衣襨)란 왕실의 옷으로 귀한 선물이다. 원래 동맹가첩목아는 조선과 가까웠는데 점점 소원해지다가 다른 부족들이 무슨 일로 함경도 일대를 공격할 때 그쪽 편이 돼 함께 조선을 쳤다가 화해를 요청해 온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그것을 거짓이라고 지레 짐작할 수는 없으니(不逆詐)”라는 부분이다.

이 말은 원래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있는 공자의 말이다. 사실 신하가 임금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할 경우에는 불경(不敬)에 해당한다. 임금이 어떤 말을 했는데 혹시 그것이 거짓은 아닐까라고 의심을 품는 것은 바로 역사(逆詐)이기 때문이다. 윗사람의 말을 함부로 넘겨 짚어서는 안 되는 것도 역시 이에 해당한다.

사실 불역사(不逆詐)는 오랫 동안 불신을 쌓아 온 당사자들이 화해로 나아가려 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라 할 수 있다. 상대방의 말을 처음부터 거짓일 거라 여기면 화해는 애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자는 위령공(衛靈公)편에서 이런 말도 했다.

“말이 좋다고 해서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좋은 말까지 내버려서도 안 된다.”

이것만으로도 지금의 우리와 북한,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조금씩 풀어갈 수 있는 지혜를 조금은 얻어 낼 수 있다. 너무 믿지도 말고 너무 불신하지도 않는 그런 태도 말이다.

그런데 불역사(不逆詐)라는 구절이 포함된 문장 전체를 보면 강조점은 조금 달라진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이 나를 속일까봐 지레 짐작하지 말고 또 남이 나를 믿어 주지 않을 거라고 억측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을 미리 알아차리는 사람(先覺者)이야말로 뛰어나다(賢)고 할 것이다.”

선각자(先覺者)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공자의 강조점은 함부로 예단은 하지 말되 결국 일의 실상과 진행 방향을 빈틈 없이 잡아내는데 있었던 것이다.

다시 실록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동맹가첩목아의 화해 제스처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거절하는 것이 좋을까?

"상국(上國-중국)에서 우리 사신을 대접하는 데에도 반드시 두텁게 할 만한 일이 있은 연후에야 우리에게 의대(衣襨)를 주었다. 지금 동맹가첩목아가 군사를 거느리고 도둑질을 자행해 경원(慶源)을 파괴하고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사로잡아 가 자기 부족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고, 또 자신을 안정시키려는 계책을 꾀해 대두를 보내 화친을 구하는데 지금 우리가 저들의 죄를 성토(聲討)하는 거사(擧事)가 없고 도리어 의대를 주게 되면 겁약한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태종은 동맹가첩목아의 제안을 거절했다. 물론 의대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차근차근 국경을 튼튼히 했고 아들 세종 때에 이르러 함경도는 확실한 우리 땅이 됐다. 공자에게 못 배우면 600년 전 우리 역사에서라도 지혜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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