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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실세 총리 지낸 ‘친노 좌장’...추진력 강하지만 독선적 이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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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실세 총리 지낸 ‘친노 좌장’...추진력 강하지만 독선적 이미지도

입력
2018.08.26 15:32
수정
2018.08.26 22:34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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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때인 2004년 6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해찬 신임 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참여정부 때인 2004년 6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해찬 신임 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이해찬 신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내 최다선인 7선 국회의원으로 교육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참여정부 시절 ‘실세 총리’로 통했던 그는 25일 집권 여당의 힘 있는 당 대표로 선출되며 화려한 귀환을 알렸다.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이 대표는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당시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두 번 옥살이를 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는 등 이 대표는 민주화 운동의 핵심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는 지금도 이 시절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는 1987년 민주당의 전신 중 하나인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김종인 민주정의당 후보를 꺾은 이후 17대까지 내리 5선을 했다. 19대부터는 세종특별시로 지역구를 옮겼는데, 20대까지 7선을 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본선에서 낙선하지 않아 ‘선거의 제왕’ 별칭을 얻었다.

1988년 12월 국회에서 열린 광주특위청문회에서 이해찬 의원이 5ㆍ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학살 현장을 촬영한 사진을 들고 증인들을 추궁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8년 12월 국회에서 열린 광주특위청문회에서 이해찬 의원이 5ㆍ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학살 현장을 촬영한 사진을 들고 증인들을 추궁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의 대표적 전략통인 이 대표는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아 정권 교체에 기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기획력을 인정해 국민회의와 민주당에서 세 차례나 정책위의장으로 기용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 교육부 장관, 참여정부 국무총리 등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총리 재직 시절에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책임총리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국정을 총괄했다. 이 대표가 ‘친노계 좌장’이라 불리는 이유다. 그는 총리 시절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야당 의원들과 공개 설전을 주고받으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소신과 강한 추진력은 강점이지만, 이 때 구축된 독선적인 ‘불통’ 이미지는 여전히 한계로 지적된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추모기념사업에 집중하던 이 대표는 19대 총선 때 세종시에 출마해 국회로 복귀했다. 민주통합당 당 대표에 오르기도 했으나, 문재인ㆍ안철수 후보의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중도 하차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세종시를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하면서 탈당, 무소속 당선된 뒤 복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문재인 후보 선대위원장, 6ㆍ13 지방선거 수석선대위원장을 맡아 당의 승리를 견인했다. 그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 당 대표가 자신의 ‘마지막 소임’이라고 수차례 강조하며 2020년 총선 불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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