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신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내 최다선인 7선 국회의원으로 교육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참여정부 시절 ‘실세 총리’로 통했던 그는 25일 집권 여당의 힘 있는 당 대표로 선출되며 화려한 귀환을 알렸다.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이 대표는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당시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두 번 옥살이를 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는 등 이 대표는 민주화 운동의 핵심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는 지금도 이 시절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는 1987년 민주당의 전신 중 하나인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김종인 민주정의당 후보를 꺾은 이후 17대까지 내리 5선을 했다. 19대부터는 세종특별시로 지역구를 옮겼는데, 20대까지 7선을 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본선에서 낙선하지 않아 ‘선거의 제왕’ 별칭을 얻었다.
당의 대표적 전략통인 이 대표는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아 정권 교체에 기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기획력을 인정해 국민회의와 민주당에서 세 차례나 정책위의장으로 기용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 교육부 장관, 참여정부 국무총리 등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총리 재직 시절에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책임총리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국정을 총괄했다. 이 대표가 ‘친노계 좌장’이라 불리는 이유다. 그는 총리 시절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야당 의원들과 공개 설전을 주고받으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소신과 강한 추진력은 강점이지만, 이 때 구축된 독선적인 ‘불통’ 이미지는 여전히 한계로 지적된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추모기념사업에 집중하던 이 대표는 19대 총선 때 세종시에 출마해 국회로 복귀했다. 민주통합당 당 대표에 오르기도 했으나, 문재인ㆍ안철수 후보의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중도 하차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세종시를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하면서 탈당, 무소속 당선된 뒤 복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문재인 후보 선대위원장, 6ㆍ13 지방선거 수석선대위원장을 맡아 당의 승리를 견인했다. 그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 당 대표가 자신의 ‘마지막 소임’이라고 수차례 강조하며 2020년 총선 불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