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책 읽어?] <15> 배우 박정민

배우 박정민은 책방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내가 본 책, 내가 좋아하는 책, 내가 보여주고 싶은 책, 적당히 그 정도가 꽂혀 있는 아주 작은 책방일 거예요.” 류효진 기자

실없는 농담 속의 실다운 진심이 좋다, 라는 문장을 쓸 줄 아는 이를 만났다. 언제나 좋은 팀에 속해 있을 수는 없어도 언젠가 좋은 팀에 속해 있을 수는 있을 거다, 라는 문장을 쓸 줄 아는 이를 만났다. 배우 박정민의 책을 나는 올해만 세 권을 샀다. 내 책은 안 사도 그의 책은 더 살 분위기다. 누구든 주고 싶어서 누구든 주고 나면 그의 말마따나 당신은 정말 중요한 사람이다, 라고 알아먹을 것 같아서. 그러나 정작 이 문장들의 주인은 저 자신에게 제 문장을 아직 들려주지 않은 모양이다. 조금 수그러든 고개였다. 그래서 내가 말해 주마 했다. 그의 문장을 빌려 이렇게.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고, 당신 지금 아주 잘하고 계신 거다, 라고.

김민정(이하 김)= “며칠 전에 ‘배철수의 음악캠프’ 스페셜 디제이를 하루 맡았더라고요. 목소리가 묵직하니 좋던걸요.”

박정민(이하 박)= “아, 그거 들으셨어요? 아, 들으셨구나. 긴장이 되어서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 라디오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게스트로도 많이 나갔고요. 왜 생각도 못했는데 순간순간 내뱉게 되는 말들이 있잖아요. 그 솔직함이 매력이다 싶은 거예요. 역량이 안 되겠지만 나중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잘 해보고는 싶어요.”

김= “그러니까 그 솔직함이요. 제가 정민씨 책 ‘쓸 만한 인간’ 보면서 어라 이 친구 뭐지? 그랬던 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몸으로 쓰더라고요. 문장도 정확하고 사유를 가지고 리듬도 타는 게 제 글을 장악하고 있더라고요. 특히나 괄호 속 속엣말과 각주를 센스 있게 달 줄 알더라고요.”

박= “너무 그렇게 칭찬을 해주시면 제가 좀… 아무래도 제가 연기를 공부하고 대사를 읊는 사람이니까 글에 제 말맛은 조금 배어 있기도 했겠지요. 실은 그 지점이 제가 요즘 글 한 줄 못 쓰고 있는 이유와 닿아 있기도 한 것 같아요. 사실 그 책은 제가 별로 유명하지 않았을 때 쓴 거잖아요. 물론 지금도 이름 들으면 모두가 아는 완전 유명한 배우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눈치가 너무 보이는 거예요. 제 스스로도 많이 뒤틀려 있다 보니 무슨 말이든 잘 못하겠고… 글 쓸 때는 그러면 안 되는데….”

김= “책이 2013년 6월로 시작합니다. 그새 5년이 지났어요. 돌이켜보면 어떤 시간이었던 것 같은지요.”

박= “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마구 뒤섞인 풍랑과도 같은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동주’가 개봉한 게 2016년이니까 그전까지는 결과물이 신통치 않으니 좌절이 잦았던 것 같고요, 그 후로 오늘까지 보자면 제 감정에 있어서도 격동의 풍파를 겪고 있는 듯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저만 힘든 걸까요? 제가 아무래도 많이 부족해서 그런 거겠죠.”

김=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라 그럴 거예요. 여기 오기 전에 ‘변산’을 음반 걸어두듯 다운로드해서 음악처럼 듣고 왔거든요. 랩도 1년 동안 직접 다 썼다고 들어서요.”

박= “뭔가를 써버릇하는 습관이 있었으니까요. 쓰면 쓸수록 재미를 느끼니까 하면 할수록 퀄리티가 달라지는 걸 알기도 하겠으니까 그냥 했던 거예요.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제가 잘해야만 하는 제 일이니까요. 부족함 투성이죠, 뭐.”

김= “특히나 수첩에 적어두었다는 이 구절이요. ‘가만히 보면, 모두가 의외로 살아 있다.’ 이건 시의 문장이다 싶었거든요. ‘의외로’를 어떤 자리에 갖다 놓을 줄 알더라고요. 혹시 책 제목도 직접 지은 건가요?”

박= “워낙에 중구난방인 글들이라 이게 한데 묶일까, 책이 될까, 그랬거든요. 책 제목도 ‘박정민’이라고 하고 말까 그랬는데 출판사에서 후보로 몇 개를 보내주시더라고요. 그중 ‘제법 쓸 만한 인간’이 있었는데 제가 거기서 ‘제법’만 빼자고 했죠. 제법이라는 표현이 뭔가 사람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것 같아서요.”

책 쓰는 배우 박정민과 책 만드는 시인 김민정이 서울 한남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류효진 기자
김= “‘의외로’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제법’은 안 되는 거죠(웃음). 어쨌거나 이 책을 보면서 좋아하는 작가 중에 박민규 소설가가 있겠구나 싶은 확신은 들었어요.”

박= “네, 김영하 작가님과 박민규 작가님 책은 빼놓지 않고 다 읽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동네 서점 안에 있는 팬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손님은 없지, 시간은 잘 안 가지, 바로 옆에 서점이 붙어 있지 하니까 책이란 걸 한번 읽어나 볼까? 하다가 친구가 말했던 제목이 생각나서 부지불식간에 김영하 작가님의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집어 들게 되었는데, 책이 얇잖아요. 읽는 데 시간도 안 걸리고 되게 재밌더라고요. 특유의 냉소적인 문체나 발상 자체가 너무 웃긴 거예요. 만화책 보듯 읽었던 것 같아요. 길거리에서 막 웃으면서 보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이런 웃긴 책을 또 보고 싶은 거예요. 기숙사 생활을 했던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방을 쓰던 친구의 책상에서 어렴풋하게 봤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책의 이미지가 떠오르더라고요. 어쨌든 이 두 작가님을 통해 세상에 이런, 이런 세계가 다 있었구나, 하면서 스무 살 무렵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김=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죠? 책에서도 보니까 삶의 어떤 중요한 순간마다 만난 사람들, 그들이 해준 말을 지침으로 삼곤 했더라고요.”

박= “이준익 감독님이 ‘동주’ 준비할 때 그러셨어요. 과정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자고, 요. 영화에 인생을 걸지 말고 그 영화를 같이 찍는 사람에게 인생을 걸어라, 라고요. 그 말씀을 듣는데 순간 머리가 뽀개지는 느낌이 들면서 자동 저장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대부분 그런 말들이죠. 스무 살 적 내게 박원상 선배님이 술 드시고 목이 마를 때 물을 생각하듯이, 자연스럽게 다가올 그때를 기다려. 충실히, 성실히, 절실히, 길게, 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그런 말들이 마음에 자연스럽게 품어지는 거예요. 물론 그래서 왜곡이 될 적도 있지요. 필요한 말들만 기억을 하니까요. 그걸 잘 가려야 하는 일이 앞으로의 제 숙제 중 하나겠죠.”

김= “어릴 적 하고 싶은 일이랄까, 되고 싶은 사람이랄까, 그런 꿈이 혹 있었는지요.”

박= “어느 정도의 동경과 상상으로 영화감독이 되고는 싶었어요. 감독이 되어 내 영화에 내가 나오면 영화배우도 되는 거겠지, 얕게 생각도 했고요. 어쨌든 그런 꿈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첫해 한예종을 쳤는데 당연히 떨어졌죠. 보니까 박찬욱 감독님이 철학과를 나오셨더라고요. 그래서 수능으로 그해 고대 인문학부에 들어갔는데 아쉬움이 남는 거예요. 다시 도전을 해서 다음해 8월에 한예종에 갔죠. 결과가 나오니까 입학할 때까지 한 여섯 달 정도가 떠요. 해서 연극하는 박원상 선배님을 찾아갔어요. 그땐 아저씨라 불렀던 분인데 하여간에 그분 연극하시는 연습실에 거의 매일 놀러갔어요. 그랬더니 어느 순간 그 극단의 스텝이 된 거예요. 많이 배웠죠. 그 시간들이 너무 재밌었어요. 그런데 모든 준비가 끝나고 8시가 되면 무대에 조명이 집중되잖아요. 순간 거기 내가 없다는 사실이 인지된 거예요. 내가 거기 없는 그 느낌이 되게 쓸쓸한 거예요. 무대 위에 서고 싶다, 하는 마음이 어느새 커져 있던 거예요. 결국엔 영화과에서 연기과로 아주 어렵사리 전과를 했지요.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 저 무대 위에 서고만 싶다는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몰라요.”

김= “사실 그렇게 중간에 전공을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 아니에요.”

박= “돌이켜보면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기가 그때였던 것 같아요. 그 중에 소설이요. 꽂히고 미쳐서 읽었던 시절 같아요. 특히 ‘인간실격’이요. 제가 여기 인터뷰 오면서 오늘 가서 무슨 책 얘기를 하지 그러다가 책장에 가만 서서 책들을 보는데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 있잖아요. 퀴퀴한 그 냄새가 이 책에서 나더라고요. 대학교 1학년 때 읽었거든요. 권했던 친구가 소설 속 인물 ‘요조’에 빠져 있을 땐데 다 읽고 나서는 제가 더 깊게 빠진 거예요. 그 책 보면 왜 죽고 싶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은 죽었을까, 죽었겠지, 막 이러면서 밤에 우울해지고 새벽 감성이 되어서는 아무 소리도 없이 그냥 막 흘러내리는 눈물을 누운 채로 경험해야 했던 나날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잘 안 변하는 것 같아요. 저는 안심이란 걸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안 나거든요. 늘 불안에 떨어요. 성격인 것 같아요. 성격이 운명이다, 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이 그러고 보면 맞다 싶어요.”

김= “셰익스피어가 나와서 말인데… 특히나 매료되었던 희곡 작품들이 궁금해지거든요.”

박= “제가 너무 좋아한 희곡 작가는 윤영선 선생님이셨어요. 수업 시간에 ‘G코드의 탈출’이라는 작품을 제 식으로 발표하게 되어 꼼꼼하게 읽게 되었는데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비극의 끝이라고 해야 하나, 희망의 끈은 한 가닥도 찾아볼 수 없는 절망 덩어리인 작품이었어요. 제가 이 작품을 얼마나 좋아했냐면 묵히고 묵혀놨다가 2014년에 혜화동 1번지에서 연극으로 올리기도 했다니까요. 협찬 하나도 안 받고 우리 돈 300만원을 가지고 1주일 공연했는데요, 전회 매진이었어요. 물론 한예종 선후배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대신 초대표가 없었어요. 만 원씩 다 받았어요. 제 팬들도 많이 와주셨고요. 순 매출만 600만 원이 났다니까요. 처음 그 작품을 접했을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감정에 호소하기 바쁜 연기를 했는데, 볼 때마다 다른 감동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텍스트를 천천히 느리게 뜯어 먹는 것처럼 보는 편이에요. 이해가 안 되면 그 문장에 오래 머무는 편이고요.”

김= “글과 연기력이 받쳐주는 사람이라 그런지 직접 모노드라마를 써서 무대 위에 서보면 어떨까. 영화보다 저는 연극 무대 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정민씨를 상상해봤거든요.”

박= “아… 그거 쉽지 않은데, 그런데 제가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였는데… 그걸 어찌 아셨지(웃음)? 워낙에 쥐스킨트를 좋아해요. ‘향수’를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요. 하루는 제가 깊이에 대한 강요를 느끼게 된 순간이 있어서 인터넷 검색 창에 ‘깊이에의 강요’라고 쳐봤는데 세상에나, ‘깊이에의 강요’라는 책이 정말 있는 거예요. 그것도 쥐스킨트의 작품으로요. 이건 좀 이상한 일이다, 이건 좀 놀라운 일이다, 바로 서점으로 튀어가서 그 책을 보는데 확 와 닿더라고요. 거기 실린 세 편의 에세이는 여전히 생생히 기억나요..”

류효진 기자
김= “개인적으로 정민씨의 글을 더 많이 보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박= “그러려면 저는 정말 배우로 사는 제 자신에게 시간 투자를 많이 해야 해요. 제가 알고 있는 재능 있는 배우들은 상상만 해도 실현을 잘하는 걸 저는 언제나 실현해봐야 실현할 수 있으니까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집에서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죄책감이 엄청 몰려오는 거예요.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시나리오 한 줄이라도 더 봐야 하는데. 지금 ‘타짜 3’ 준비하고 있으니 카드라도 한 번 더 만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도 저를 괴롭혀서요, 지금 책방을 준비하고 있어요.”

김= “책방이요?”

박=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글을 쓸 제 시간을 갖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작업실 같은 책방을 하나 내서 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거기서 책도 보고 글도 쓰려고 마음을 먹었어요. 내가 본 책, 내가 좋아하는 책, 내가 보여주고 싶은 책, 적당히 그 정도가 꽂혀 있는 아주 작은 책방일 거예요. 분당에 있는 동네 책방일 거니 아주 작을 거거든요. 실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고 싶은 마음이 아주 크게 있어요. 제가 그때 책을 안 읽은 게 너무나 후회가 되거든요. 그때 책을 많이 읽었다면 좀더 폭넓고 다양한 감정에 예민한 배우가 되어 있을 것 같거든요. 책에도 제가 썼지만 책을 통해서라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고, 좌절한 자를 사랑할 수도 있고, 형사가 되어 범인을 쫓을 수도 있고…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전 정말 서점으로 가서 그 어떤 책도 좋으니 잘 읽힐 만한 책을 한 권 사서 집으로들 돌아가면 좋겠어요.”

김= “뭐랄까, 그건 좀 욕심 같기도 한걸요. 중고등학교 아이들이나 대학생들에게 진짜 권하고 싶은 책이 있으려나요.”

박= “‘파리대왕’이요. 제가 ‘파수꾼’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 감독님이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시나리오를 쓰셨다고 하더라고요. 읽으면서 느낀 게 어디에도 정치란 게 존재하는구나. 저도 그때 어린 나이였으니까 뭔가 싸하게 다가온 게 있었어요. 또 최근 1년 동안 봤던 책 중에 가장 좋은 건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이반일리치의 죽음’이었어요. 책 읽을 때 음, 거의 표시를 안 하는데 한 권에 한 서너 개 정도 밑줄 그으려나요. 근래 읽은 책 중에서 기억나는 문장은 ’커플들, 행인들’에서 마주한 건데 “모든 사랑은 등 뒤에 유토피아를 만든다”, 그 문장을 보고 그래, 이 절망이지 하며 밑줄을 그었던 기억이 나요.”

김= “요즘에는 무슨 책을 읽고 있나요?”

박=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번갈아 읽고 있어요. 러시아 소설들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어렵잖아요. 그래서 아주 천천히 읽고 있는데 좀 익었더니 읽을 만해요. 그리고 마르케스는 처음인데 흥미롭더라고요. 저는 제가 볼 책은 제가 꼭 사서 봐요. 팬이 선물로 주신 책 가운데 기억나는 작가는 마루야마 겐지요. 워낙에 에세이 많이 내셔서 어떤 책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책 읽다가 반해서 이력을 찾아보니 정말 말도 안 되게 독자적인 삶을 사시더라고요(웃음). 그렇게 읽다 반해서 소설 ‘달에 울다’는 제가 사서 봤지요. 글만 봐서는 기타노 다케시가 쓴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호기심에 기타노 다케시를 쳐보니까 또 그의 책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사서 보니까 그 글은 기타노 다케시 같지가 않은 거예요.”

김= “뭣 좀 먹고 갈래요?”

박= “죄송해요. 저 다음에 먹을게요. 제가 다음달 12일부터 ‘타짜 3’ 촬영에 들어가거든요. 몸을 좀 만들어야 해서요.”

김= “그래요. 브런치는 그럼 나 혼자의 런치로…”

김민정 시인ㆍ난다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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