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코리아타임즈 박지원 기자

‘안희정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본의 아니게 성폭력과 성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시민의 변화된 인식과 열망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수행비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법원의 ‘무죄’ 판결에 반발하는 시민들이 지난 주말 거리를 뒤흔들었다. 지난 18일 오후 5시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성차별ㆍ성폭력 5차 끝장집회’는 무려 2만여명이 참여했다. 지난 5월 17일 진행된 4차 집회에 2,000여명이 참석했고 이전 집회 참가자가 1,000~1,500여명 수준이었던 걸 감안하면 10배에 달하는 수치다.

더욱이 주목할 사실은 성차별ㆍ성폭력 반대집회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집회ㆍ시위에 무관심했던 시민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여성 시위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집회ㆍ시위 양상이다.

기성세대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고3 딸의 설득에 처음 시위에 나서게 됐다는 이모(58)씨 부부는 “이번 판결은 철저하게 가부장과 기득권 질서를 보여줬다”면서 “남성과 여성,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가 너나 할 것 없이 동참해 성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 선후배 사이라는 김동현(23)씨와 이승준(27)씨는 “성차별, 성폭력 반대는 남녀 문제만이 아닌 시민으로서 평등하게 대우받고 이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아나갈 ‘권리’ 문제”라며 “남성도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집회 참가 동기를 밝혔다.

이날 집회는 특히 부부와 연인들이 함께 참여한 모습도 쉽게 눈에 띄었다. 체육교사로 일하는 최하란(41)ㆍ정건(45)씨 부부는 “목소리를 내야지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촛불집회를 통해 배웠는데, 이번 집회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성은 나이를 불문하고 재삼 확인된 법의 보수성에 분노를 드러냈다. 20대 딸을 두고 있다는 이모(55)씨는 “과거 나를 비롯한 386세대 여성들이 여성인권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내 딸들만은 정말로 여성이 동등한 권력을 갖는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저는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하다’는 김지은씨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는 박모(28)씨는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사회에서 김지은씨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을 것”이라며 “김지은에 연대하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여성 전체를 위한 목소리 내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촛불 집회를 방불케 한 정도로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던 이날 성차별 반대 집회는 올해 초 서지현 검사를 비롯해 수치를 가감 없이 드러내 권력에 맞섰던 피해 여성들의 미투 대열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화는 여전히 멀었다는 인식의 발로라는 분석이 많다. 특히 안 전 지사의 무죄 판결로 법적, 사회적 편견의 강고한 장벽이 재확인됐다는 데 남녀 모두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보수적인 50대 남성까지 여성 문제에 거리로 나오는 건 고무적인 현상"이라며 "조직 문화 속에서 남성들도 한번쯤은 성폭력 목격자였을 것이기에 여성 가족구성원을 떠올려 문제의식 공유해 거리에 나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집회에서 김지은씨가 참가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연대를 호소했다. 김씨는 “너무 힘들어서, 죽어야 제대로 된 미투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며 “법원의 질문에 일관되게 답했고 많은 증거를 제출했는데, 그런 제 목소리를 제대로 들으셨습니까”라고 재판부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러면서 “왜 안희정에게는 미안하다면서 그리 여러 차례나 농락했는지, 왜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는지, 왜 휴대폰을 파기했는지 묻지 않는가”라고 편파적 판결에 의구심을 보이기도 했다.

김지은씨 편지대독 이외에도 이날 집회에서는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한국여성의전화 고미경 상임대표, 최영미 시인의 발언이 이뤄졌다. 주최 측은 이날 집회에 시민 2만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했다. 사회비평가 박권일씨는 “이날 집회는 나이와 성별에 국한되지 않은 보편적인 시민들의 저항의 장이라는 느낌이었다”며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제5차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무죄와 관련해 사법부를 규탄하고 있다. 연합뉴스

관련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