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오랫동안 속으로 타일러 왔다. 정신차려, 아직 다 해 본 건 아니잖아.’

한때 천재소년으로 불리며 한국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천문학자 송유근씨. 지난 월요일, 그가 결국 박사학위 취득에 실패하고 군에 입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몇몇 언론은 이를 두고 한국 사회가 영재 한 명도 제대로 못 품는다며 비판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영재교육 시스템이 송유근씨와 같은 천재를 키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며, 냄비처럼 들끓는 여론이 한국에서 천재를 말살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억지로 천재를 만들려 했던 어른들의 욕심이 이런 비극을 낳았다고 말한다. 실제 대학교 관계자 측은 송유근씨가 박사 학위 논문 최종심사에 불합격한 까닭이 “기본적인 것을 갖추지 못해서”라고 밝혔다. 송유근씨는 2015년에도 1저자로 참여한 논문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자 철회한 적이 있다. 이 때도 논문이 2002년 출판된 지도교수의 프로시딩과 겹치는 부분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그 차이가 변변찮다는 학자로서는 뼈아픈 비판을 받았다.

그는 만 7세 때 대학교에 입학하는 등 특별한 재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순간 보여 준 빛나는 성취가 진정 새로운 지평을 여는 종류의 천재성이라고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송유근씨가 과학자로서 용납하기 힘든 실망스런 모습만 보여 준 것처럼 말이다.

어떤 아이가 천재적 업적을 남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송유근씨처럼 돋보이는 학업적 성취를 거둔 경우에도. 답이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답이 없는 문제를 찾아내는 능력은 다르다. 세상에 없던 답을 찾아내는 능력 또한 당연히 다르다.

후자의 능력에 필요한 건 여유다. 단순히 놀게 해 준다는 게 아니다. 존재하지조차 않는 문제에, 세상 누구도 모르는 답을 내기에 이를 때까지 천착하기 위해선 당연히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어린 아이에게 천재라는 틀을 씌우고, 지도교수를 붙이고, 무리한 교육과정을 밀어붙이며 내릴 수 없는 로켓에 올려 태우는 것이 진짜 천재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일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육의 병폐로 주입식 교육과 줄세우기를 지적한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영재교육은 고도화된 지식을 가르치기 마련이고, 모두에게 영재교육을 제공할 수 없다면 줄을 세워야 하는 순간도 오기 마련이다.

문제는 온전히 거기에 집착할 때다. 집착은 자연히 여유를 빼앗는다. 우리가 예언자가 아니라면 천재든 영재든 그걸 미리 찾아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영재들에겐 영재들을 위한, 천재들에겐 천재들을 위한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건 교육과정일 뿐이다. 절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성취가 넘쳐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가도, 성취가 모자라면 잠시 쉬어 가는 연속선상에 있어야 한다.

이런 집착으로 영재교육이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학습에 부담을 느껴 흥미를 잃고, 자신이 배운 게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영재교육만의 문제는 아니다. 송유근씨가 온몸으로 짊어졌던 집착의 무게는 사실 그의 몫만은 아니다.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내 능력에 과분한 기대를 받고 그걸 차마 저버릴 수 없었던, 열 몇 살쯤 겪은 한 번의 실패가 내 모든 인생을 부정하는 것 같았던 경험. 그것은 사실 집착이었다.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첫 대사다. 끝내 고도는 오지 않고, 고도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렇게 말한다. ‘자, 그럼 갈까?’ ‘그래, 가세.’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천재를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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