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회유와 협박

'벽위편'에 실린 다산의 편지. 이기경에게 보낸 이 편지는 정미반회사 문제를 더 이상 확대하지 말라고 회유하고 은근히 협박하는 내용이다.
말이 퍼지자 일이 커졌다

이기경은 반회에서 자신의 지적 이후 이승훈과 다산 두 사람이 보여준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자리에 함께 했던 진사 강이원이 사람들에게 이승훈과 같이 읽은 서양책 이름과 천주학을 공부하는 절차에 대해 얘기하고 다녔다. 공부를 한 것이지 서학을 믿은 것이 아니란 취지였을 것이다.

성균관 진사였던 홍낙안(洪樂安ㆍ1752∼1812)이 강이원에게서 이 이야기를 먼저 듣고, 이기경에게 사실 관계를 따져 물었다. 이기경이 당시의 정황을 얘기하며, 걱정스럽다는 뜻을 피력했다. 성균관 내부에서 말이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나, 모이기만 하면 이 일로 수런거렸다.

이승훈과 다산 쪽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기경이 과거 시험장에서 라이벌인 자신들을 모함해 이름을 다투려 한다고 선제공격을 했다. 그 결과 이기경은 12월 초에 있었던 응제시(應製試)에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홍낙안은 1787년 12월에 이기경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번 만나 얘기를 듣고 나서 마음속에 큰 근심이 자리 잡았다며, 결코 좌시할 수 없으니 함께 상소를 올려 이들을 징치하자고 주장했다. ‘벽위편’과 ‘동린록(東麟錄)’ 등에 수록된 홍낙안의 편지 한 대목은 이렇다.

“저들은 소굴이 이미 이루어졌고, 사설(邪說)도 유행하고 있으니 드러내놓고 절실하게 타이르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소. 임금 앞에 나아가 들은 것을 한차례 아뢰지 않고는 비록 우리가 입술이 타고 혀가 마르도록 애써봐야 그저 한 차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뿐일 것이오.”

난처한 이기경과 난감한 다산

이기경은 입장이 난처했다. 무엇보다 한때 자신이 이들과 어울려 천주교 책을 본 전력이 있었던 것이 켕겼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이기경 또한 서교(西敎)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손수 책 한 권을 베껴 썼다”고 쓴 바 있다. 다산과 이승훈은 자신의 오랜 벗이었다. 벗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막상 이들이 내놓고 문제 행동을 한 것도 없었다.

이기경은 홍낙안에게 보낸 답장에서 “다만 이들이 지금은 비록 스스로 귀굴(鬼窟)에 빠져들어 스스로 양심을 던져버렸지만, 그 평소의 관계로 보면 모두 지극히 친밀한 사람들이다”라고 하며, 이들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기는커녕 도리어 의심을 일으켜, 자신을 모함해 과거 응시자격을 정지당하게 한 사실을 말하고, 내년 과거에도 일체 응시하지 않음으로써 저들에게 자신이 결코 다른 마음이 없음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맥없는 답장을 보냈다. 공론화가 자신에게도 결코 이로울 수 없음을 이기경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홍낙안이 다시 편지를 보내 이기경을 다그쳤지만 이기경은 더 이상 답장하지 않고 침묵 모드로 들어가 버렸다. 일이 점점 번져가자, 사실 난감해진 것은 다산이었다. 그저 있자니 소문이 자꾸 커져가고, 행동을 취하자니 긁어 부스럼이 될 가능성이 컸다. 다산은 자신이 이기경을 따돌려 만나주지 않았던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이기경에게 달래고 회유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 편지는 ‘벽위편’에만 실려 있고, 정작 다산의 문집에는 빠지고 없다.

버리지도, 버릴 수도, 버려서도 안 된다

다산이 이기경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본다. 수록 전문을 읽는다.

“근일의 일은 차라리 잠들어 깨어나지 말았으면 싶군요. 첫 번째는 이 아우의 죄이고, 두 번째는 형의 잘못입니다. 제가 비밀스런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남을 잘못 믿어 일처리를 그르쳤으니 제 죄를 알겠습니다. 형께서 하루도 기다리지 않고 전혀 다른 의미로 남을 잘못 알았으니, 허물이 없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와서 형은 나를 절대로 버리지 못하고, 또한 버려서도 안 되며, 감히 버리지도 못하리이다. 이 세 가지가 있고 보니, 내가 또 차마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선을 권면한다는 것은 형의 그럴싸한 명분이고,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임은 저의 고상한 태도겠지요. 만약 물이 흘러가고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언덕 위에서 구경하던 자들은 틀림없이 ‘이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우정이다’라고들 할 겝니다. 한번 형께서 쪼개어 둘로 만든 뒤로부터 패공(沛公)의 좌사마(左司馬)가 하나뿐이 아닐 테니, 어찌 유감스럽지 않겠습니까? 다만 형에게 한마디만 부칩니다. 형께서 저를 입으로 끊고, 제가 형을 입으로 끊음은 ‘반회(泮會)’란 두 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감동함을 입게 해주신다면 전날과 같이 즐거울 것이니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이만채가 엮은 ‘벽위편’에 수록된, 다산이 이기경에게 보낸 편지 전문.)

돌려 말한 다산의 말뜻은 이렇다. ‘이번 일은 내 죄와 너의 잘못이 반반이다. 내 죄는 너를 믿고 모임에 잘못 끌어들인 것이고, 네 잘못은 남을 엉뚱하게 모함해서 구석으로 내몬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너 또한 떳떳치 못하다. 너는 나를 버려서도 안 되고, 버릴 수도 없고, 감히 버리지도 못한다.(不必棄, 亦不可棄, 亦不敢棄.) 이 상태에서 서로 없던 일로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네가 시작한 전쟁이니 네가 끝내라. 그리고 우리 둘의 기억 속에서 ‘반회(泮會)’란 두 글자를 지워 버리자. 네가 내 뜻을 따라준다면 예전의 우정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삼불기론(三不棄論)’을 편 것인데, 말은 온건하게 했지만 사실은 협박에 가까웠다. 이 편지는 앞뒤가 잘린 발췌다.

젊은 날의 다산은 혈기가 넘쳤고, 단도직입적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고 구차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또래 그룹의 리더였고, 행동대장이었다. 직선적이고 구차하지 않은 다산의 성격과 행동은 훗날 다산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하고, 위기에서 건져내기도 했다.

홍낙안의 직격

이기경의 미온적 태도에 실망한 홍낙안은 그저 물러서지 않았다. 칼을 확실하게 뽑아야 할 시점으로 판단했다. 해가 바뀌어 1788년 인일(人日), 즉 1월 7일에 인일제(人日製) 과거가 열렸다. 홍낙안은 답안으로 제출한 대책문(對策文)에서 ‘서양에서 흘러 들어온 일종의 사설(邪說)이 점차 타오르는 형세에 있음’을 들어 실명만 거론하지 않았을 뿐 정약용과 이승훈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유명묵행지배(儒名墨行之輩)’ 즉 겉으로는 유학을 하는 체 하면서 실제 행실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 같은 이단을 행하는 무리들을 정조준해서 나라의 장래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목청을 한껏 높였다. 그리고 그들이 을사년 봄과 1787년 여름의 사건에서 이미 그 단서가 드러났다고 했다.

을사년 봄 사건은 명례방 추조적발사건인데, 1787년 여름의 사건은 그 내용이 궁금하다. 다산이 1787년 4월 15일에 부친과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쓴 시 ‘파당행(巴塘行)’에 묘한 대목이 있다. “이때 부친을 모시고 초천으로 가다가 밤에 당정촌(唐汀村)에서 묵어 잤다. 이때 와언(訛言)이 크게 일어나 시골 마을이 소란스러웠다.” 또 그 시 중에 “적병 온단 말만 하고 적병은 보이지 않아, 정한 방향 없이 가니 바람 맞은 나비일세(但道兵來兵不見, 去無定向如風蝶)”라고 한 내용이 있다. 반란이 일어나 역도들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한다는 풍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관청에서 군대를 점호하고 법석을 떨자 온 마을이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광경을 묘사했다.

1789년 이기경과 다산이 문과에 급제한 뒤 초계문신에게 치르게 한 과시방(課試榜). 이기경이 1등이고 다산은 4등이다. 이기경은 당시 촉망받던 신진기예다.

이 사건은 앞서 제8화에서 잠시 소개한 제천의 김동철이 정감록 신앙을 유포하다 복주된 사건을 가리킨다. 을사추조 적발사건과 김동철 정감록 역모 사건을 나란히 둔 것으로 보아, 정감록 신앙이 서학과의 연장선상에서 위천주(僞天主), 즉 재림 예수의 코드로 인식된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한번 살피겠다.

홍낙안의 직격탄으로 다산의 1785년 봄 을사추조 적발 사건과 1787년 여름의 김동철 모반 사건, 그리고 겨울의 정미반회사가 공론의 수면 위로 다시 한번 떠올랐다.

무거운 은혜

다산은 홍낙안과 함께 인일제 과거에 응시했다. 근신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도 놀라웠다. 인일제에서 다산은 지차, 즉 2등으로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788년 1월 7일자 기사에 그 성적이 나온다. 같은 날 홍낙안이 다산을 처벌하라는 답안을 공개적으로 작성했고, 임금은 그 글을 읽은 상태에서 다산의 답안지를 높은 등수로 올렸다. 개의치 않는다는 확실한 의사 표시였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한방이 허공만 갈랐다. 홍낙안은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다산은 ‘인일에 희정당에서 임금을 뵙고 물러나와서 짓다(人日熙政堂上, 謁退而有作)’란 시에서 “부족한 나 무거운 은혜를 입어, 머물게 해 돌아보심 내리셨다네(疎逖承恩重, 淹留賜顧頻)”라고 썼다. 제목 옆에 ‘이때는 대책 때문이었다(時因對策)’이라고 썼다. 자신이 쓴 대책의 답안지를 보고 임금이 특별히 불러서 칭찬했다는 의미다.

임금은 이 자리에서 다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동안 지은 책문이 몇 수인가?”

“20수입니다.”

더 분발하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다산이 다시 큰 물의를 일으킨 직후, 정작 문제를 제기한 이기경은 제풀에 위축되어 과거를 포기했고, 다산은 홍낙안이 자신을 저격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당히 그 자리에 나아가 답안을 제출했다. 임금은 다산에게 높은 등수를 허락해 다산에게 칼끝을 겨눈 홍낙안의 대책문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다산은 임금의 이 같은 태도를 서학에 대한 암묵적 용인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까.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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