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산문집 ‘언젠가, 아마도’
4년간 여행잡지에 연재한 글 58편
“여행의 목적은 공간 이동이 아닌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것”
김연수 작가를 서울 세종로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손에 든 노란색 표지의 책이 여행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다.그는 이를테면 ‘아날로그 여행자’다. “오랫동안 기다린 책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통독해야 마땅하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면서 구경해야 한다”고 했다. 김주성 기자

소설가 김연수(48)의 여행은 끝나고 비로소 시작되는 여행이다. 돌아와서도 여행자로 남는 여행, 완전히 끝날 때를 기다리는 여행이다. 그 알 듯 모를 듯한 여행의 기술을 여행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에서 일러준다. 책 속 김 작가는 여행 프로페셔널 같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노란색 트램을 타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1년 만에 실현하고, 고래회를 안주로 ‘라스트 드링크’를 즐기기에 딱인 일본 나가사키 공항 스시집 위치를 꿰고 있다. 노르웨이 올레순, 스페인 살라망카, 남아프리카공화국 드라켄즈버그 산맥까지, 별별 곳을 다닌다.

“제가 여행을 즐기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얼마 전 만난 김 작가는 놀랍게도 그렇게 말했다. 가장 최근 다녀온 여행지를 기억하지도 못했다. “모르겠어요. 작년이었을까요? 일본인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어쩐지 배신감이 들었다. 그토록 자주 여행 글을 쓰고, 이따금 TV 여행프로그램에 성실한 여행자로 출연한 건…

“그간 여행의 반은 일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소설 취재 때문에 한 겁니다. 저는 정주형 인간이에요. 소설도 (경기 고양시) 일산 작업실 책상에서만 써요.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직장 한 곳에 평생 다녔을 겁니다(웃음). 어쩌다 소설가가 되고 보니 살아왔던 성격으로만 소설을 쓸 순 없더라고요. 소설가는 정주하던 곳에서 벗어나 낯선 경험을 일부러라도 계속해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고 하려고 노력합니다. 책 속 글은 제가 소설가가 됐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글인 거지요.”

소설가 김연수의 여행법은 요약하자면 ‘열심히 기록하지 않기’다. 수첩, 펜을 늘 들고 다니기는 한다. 보이는 걸 죄다 적고 그림도 그리는데, 돌아오면 수첩을 아무 데나 던져 두고 잊는다. 사진은 찍지 않는다. 그런데, ‘취재 여행’이라고 하지 않았나… “사진으로 찍은 건 글이 되지 않더라고요. 사진 속 정보는 대개 필요 없는 정보입니다. 저한테는 정보의 관계성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소설의 화자가 존재하기 전엔 어떤 배경이 필요한지 모르는 거지요. 아무리 사진을 많이 찍어 와도 소설 쓸 때 보면 ‘다른 걸 찍었어야 했구나’ 하게 돼요. 경치가 아니라 이를테면 건물 바닥 무늬 같은 거요.”

김주성 기자

책에 실린 짧은 글 58편은 여행이 끝나고 한참 뒤의 이야기들이다. 시간을 체로 걸러 남은 알맹이 이야기, 사진으로는 도무지 안 되는 걸 채워 주는 이야기. “프랑스 파리에 간다면 에펠탑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에게 남아 있는 사건들, 저와 여행지 사이에 벌어지는 화학작용 같은 게 중요해요. 마음을, 기억을 뒤져서 남아 있는 것들을 썼어요.” 그에겐 여행의 목적이 “공간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것”이니까. 책엔 정말로 정보라곤 거의 없다. 2013년부터 4년간 여행 잡지에 연재한 글이니, 있다 해도 검증해 봐야 할 거다. 여행자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책의 미덕이다. 책의 한 대목.

“여행이 어땠냐고 가족이나 친구가 묻는다면 ‘응, 좋았어’ 정도로만 말하고 그 여행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길. 마치 예전에 여행에서 찍은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듯이. 사나흘 뒤, 아니 어쩌면 잊어버렸다가 몇 주가 지난 뒤에야 그 사진을 찾으러 갈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코닥이나 후지 등의 로고가 인쇄된 종이봉투를 받아 들고 사진을 꺼내보면, 그 여행에서 자신이 얼마나 다채로운 풍경을 보았는지를 보고 놀랄 것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해야만 여행이 완전히 끝났었다. 그러니 돌아온 뒤에도 여행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가지시길.”

김 작가는 계간 문학동네에 장편 ‘웃는 사람, 희조’를 연재 중이다. ‘아주’ 오랜만의 소설 발표다. “마흔 살을 지나고서부터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어요(웃음). 점점 나빠지는 것 같은데도 세상은 존재해야 할까, 나는 살려고 굳이 노력해야 할까… 답을 찾으려고 소설 안 쓰고 다른 책을 많이 봤습니다. 답을 찾지 못해서 이야기로 풀어 보자 했어요. 이야기를 쓰다 보니 답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아주 상세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면 어쨌거나 인생에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나빠지는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려면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런 깊은 고민에서 나온 때문인지, 새 소설은 16, 17세기 아시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큰 세계’를 그린다. 그래서, 즐겁게 쓰고 있다는 말일까. “아이고, 답답합니다. 겨우겨우, 그냥 겨우겨우 쓰고 있어요. 다시는 역사소설 같은 거 안 쓸 거예요. 제 반경 500m 안에서 벌어지는, 고양이 찾아주고 뭐 그런 이야기만 쓸 겁니다(웃음). 장편 연재는 실패의 과정이에요. 생각대로 된다면 그게 오히려 문제지요. 소소한 실패부터 큰 실패까지 생겨요. 큰 실패가 생기면 연재가 중단되는 거고, 소소한 실패들을 견뎌가면서 끝까지 큰 실패를 하지 않는 게 최종 목표지요.” 김 작가는 이달 18일 한국 소설 강의를 하러 미국 시애틀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다음 연재 마감을 해야 하는데… 모르겠어요, 몰라요. 시애틀 북쪽 어디 캐나다 같은 데로 사라져 버리렵니다(웃음).”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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