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 강요 등 군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숨진 신병을 사건 발생 22년 만에 보훈보상 대상자로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 유진현)는 군 복무 중 사망한 이모(당시 20)씨의 부모가 “보훈보상 대상자가 아니라는 결정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서울지방보훈청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1996년 공군에 입대한 이씨는 한 비행단 헌병대대에 배치됐으나 전입 닷새 만에 경계근무 중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망 당시 이씨의 왼팔에는 부대 지휘관 관등성명과 차량번호 등이 적혀 있었지만 군 조사에선 선임의 암기 강요 등 가혹행위가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이씨가 평소 내성적이고 부모님 몰래 학교를 관두고 곧장 입대해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대장과 선임병 등 일부 진술을 근거로 이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으로 종결됐다.

그러나 2014년 이씨 부모의 요청으로 이뤄진 국방부 조사본부 재조사에서 가혹행위가 드러났다. 선임병들이 150~200명의 지휘관, 참모 차량번호와 소대 병사 기수표, 초소 전화번호, 항공기 식별 및 보고요령 등 A4용지 4, 5장 분량의 암기를 강요한 것이다. 압박에 시달린 이씨는 점심을 거르거나 밤에 화장실 등에서 잠을 자지 않으며 내용을 암기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이씨 사망이 순직에 해당한다고 결정했고, 이씨 부모는 보훈청에 국가보훈대상자 등록 신청을 냈으나 거부되자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이씨가 심한 스트레스와 과도한 업무 부담 등 불안 요소가 가중되면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심사위 결정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존중돼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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