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노 시게키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1
패전으로 정치 역사 단절된 日
헌정체제 자체가 미군 작품인 탓
전후 역사 아무리 돌아봐도
“지킬 것이 없다” 결론 도착해
억지로 만들려다 아베 정권 탄생
#2
반공-경제 밖에 없는 빈곤한 보수
한국 보수주의에도 시사점 던져
지난 2일 일본 나고야 지방재판소 앞에 모인 시위대가 아베 신조 총리가 통과시킨 안보관련법제가 일본 헌법에 위배된다고 비판하며 행진하고 있다. 아베의 우경화는 곧 일본 보수주의가 흐리멍덩하기 때문이라는 게 우노 시게키 교수의 주장이다. 나고야 =교도 연합뉴스

“스스로를 ‘보수’라 칭하는 사람 중 다수는 ‘리버럴’이나 ‘좌익’에 자의적 이미지를 그린 뒤, 이를 샌드백처럼 두들기는 것으로 자신의 ‘보수’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상상 속의 적을 상대로 헛된 주먹을 휘두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보수주의는 더 이상 ‘어른’의 사상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젊은이의 보수화’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지 오래지만 ‘분별’없는(혹은 ‘어리석게 행동하는’) 고령의 보수주의자도 많다. 무엇보다 인간의 ‘성숙’을 논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온갖 가짜 뉴스를 내걸고 태극기 성조기에 이스라엘 국기까지 흔들어 대며 군복을 입거나 부채춤 추면서 스스로 ‘보수’ 단체라 주장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집회 비슷한 것이, 일본에서도 벌어지나 보다. 속 시원하긴 한데, 우리 상황이 더 자극적이라 심심한 감이 있다.

속 시원한 걸로는 이런 얘기도 있다. “보수주의가 정치체제의 계속을 주장하는 입장이라면 메이지 유신과 패전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정치적 단절을 경험한 일본에 보수주의는 좀처럼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는 급진적 서구화에 반발한 내셔널리스트는 존재했다. 하지만 메이지 헌법 체제를 전제로 그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입장을 가졌던 이들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보수란 한마디로 지키겠다는 건데, 뭘 지킬까 되돌아보니 딱히 보이는 게 없더란 얘기다. 지킬 게 없는 보수주의라니.

앞의 것과 달리 이건 제법 묵직한 돌직구다. 메이지유신, 패전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망국, 식민지, 독립, 분단, 전쟁, 쿠데타, 민주화를 겪은 우리에게도 ‘보수주의’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칭 ‘보수’들이 그렇게나 상찬하는 박정희 시절을 떠올려 보라.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만 밝으면 새마을을 만들었는데, 남는 게 뭐 있었겠는가.

그래서 정치철학ㆍ정치사상사를 공부한 도쿄대 교수의 이 책은,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식상한 제목을 달고 있음에도 4장 ‘일본의 보수주의’의 경우 통째로 밑줄을 그어 가며 읽을 수밖에 없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 보수주의는 이렇다. 무엇을 지켜야 할지 잘 모른다. 그러니 주섬주섬 ’반공’과 ‘경제성장’만 주워들었다. 보수주의가 이렇게 모호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자민당은 거대 정당으로 오래 집권할 수 있었고,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 또한 가능했다. 동시에 냉전이 해제되자 보수의 원심력이 강해져 보수가 분열됐을 뿐 아니라 그 와중에 지금의 아베 정권 같은 극우성향 정권이 등장했다. 지킬 게 없는 흐리멍덩한 보수주의는 한때 행운이었으나, 그 때문에 지킬 걸 억지로 만들어 내려 한 보수주의는 골칫덩이가 됐다.

저자의 출발점은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한길사ㆍ‘성찰’)이다. 알려졌다시피 버크는 이 책으로 프랑스혁명을 비판했다. 그보다 조금 덜 알려졌다시피 버크는 자유의 투사였다. 국왕과 맞서고 식민지 미국의 독립을 옹호하기도 했다. 자유의 투사가 프랑스 혁명을 반대한 이유는 ‘구체적 제도를 통한 자유의 유지, 보호, 확산’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구체적 제도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헌정 체제다. 저자는 여기서 ‘근대의 보수주의’를 끄집어낸다. ‘변화가 싫다’, ‘우리 전통이 좋다’는 식의 보수적 주장, 태도는 언제 어디서나 다 있다. 이건 근대의 보수주의가 아니다. 근대의 보수주의는 이런 복고주의, 내셔널리즘을 뛰어넘어 버리고 지킬 것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이다.

에드먼드 버크.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18새기 중반 영국 의회에서 그는 자유의 투사였다. 그는 자유의 보존 확대를 위해서라도 기존 제도 관급에 대한 존중이 중요하다 주장했다. 연암서가 제공

이 두 논리를 결합하면 결론은 ‘우리가 지킬 헌정 체제는 어떤 것이냐’다. 오늘날 일본 헌정 체제는 전후 초대 총리 요시다 시게루(1878~1967) 때 만들어졌다. 이 책의 과감한 도전은 저자가 요시다의 뿌리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지목한다는 점이다. 이토는 메이지헌법 초안자이지만, 독일제국헌법을 가져오는 바람에 일본 민주주의를 방해했다고 비판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저자는 “메이지헌법을 전제로 하면서 그에 내포된 자유주의 논리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사실상 그 후의 입헌 정치와 정당 정치를 준비”시킨 사람이 이토라는 옹호론을 펼친다.

저자의 이 옹호론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곱씹어 봐야 할 건 저자가 굳이 이토를 요시다의 버팀목으로 가져다 쓰는 이유다. 그것은 전후 일본의 헌정체제가 너무나 취약하기 때문이다. 저자도 선선히 인정한다. 전후 일본의 헌정체제란 패전으로 인한 것이어서 ‘빨간펜 선생님’ 미군정의 작품이다. ‘전후 일본’을 지키자는 보수주의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운 이유이자, 아베 정권의 탄생 이유다. 그래서 이토를 요시다에 가져다 대는 건 ‘전후 일본’은 미군정의 외압이 아니라 이토의 머릿속에 이미 있었다라고 주장하는 작업이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역사 속에서 연속성을 발견하고 보수해야 할 보수주의의 영지가 지금이야말로 필요하다”는 저자의 간곡한 호소다.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우노 시게키 지음ㆍ류애림 옮김
연암서가 발행ㆍ236쪽ㆍ1만5,000원

시선을 우리에게 돌려보자. 한국 보수주의의 위기론은 많다. 일본 보수주의를 향해 ‘반공하고 경제성장 빼고 제발 무엇을 지킬 것인지부터 정하라’는 저자의 호소를 참고한다면, 우리 보수주의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1987년 헌법과 이전 헌법, 그리고 유진오(1906~1987)부터 조소앙(1887~1958)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제헌헌법 제정 과정을 어떻게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제대로 이해할 것이냐다. 지킬 게 없는 흐리멍덩한 보수주의는 필연적으로 극우로 흐른다. 그 속살 정도야 우리는 이미 올누드 수준으로 구경하고 있다.

보수주의 입문서를 지향했지만 일본 정치 현실에 명백히 개입한 책이다. 그래서 버크의 ‘성찰’에서 시작하지만 지금 미국 공화당을 뒷받침한다고 꼽히는, 그래서 끊임없이 조롱당하는 리처드 위버의 ‘이념은 실현된다’(‘Ideas Have Consequences’ㆍ미번역)와 러셀 커크의 ‘보수의 정신’(지식노마드)까지, 일련의 보수주의 저작을 남김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평가해 뒀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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