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13>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거리의 동지’ 박정기옹 장례 치르고 상경
“자식들 죽여놓고 산 세월은 약이 아니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는 아들과의 즐거웠던 시절이 마치 엊그제 같다. 아들의 허망한 죽음 역시 아직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2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국민족민주열사유가족협의회의 ‘한울삶’(한 울타리의 삶)에서 만난 어머니가 사진 속 아들을 쓰다듬고 있다. 홍인기 기자

“우리 한(열)이가 왜 저(기에) 가 있으까… 왜 저 속에 가(서) 들어 있으까잉. 후… 우리 한이 진짜 죽었으까? 내가 지금도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해싸. ‘죽는 게 뭔데?’ 이러고 혼자 물어봐. 우리 한이가 그러면 진짜로 죽었나. (영정 사진 쳐다보며) 내가 너를 진짜 낳았냐. 얼마나 답답허냐. 아이고 답답해. 진짜 답답한 세상이여. 아무 말도 못 허고 죽어버리니, (너는) 좋기는 헌가 모르겠다만은.”

어머니가 앉은 자리는 알고 보니 아들에게로 가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시선은 종종 기자의 어깨를 훌쩍 넘어 아들의 사진으로 헤엄쳐갔다. 어머니에게는 갓 성인이 된 21살에 멈춰 있는, 그래서 아직도 “애기”라 부르는 고 이한열 열사다.

“듣기로는 세계적으로도 이렇게 집(서울 종로구 창신동 ‘한울삶’)에 열사들 사진이 (100장 가까이) 주욱 배치된 경우는 없다는 거여. 여기 있는 이 사람들 사진이 한 장씩 있으면 사람들이 벨로(별로) 관심을 안 두겠지만은, 모아놓으면 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 당한 줄을. (19)70년 (분신한 노동열사) 전태일부터 (19)97년까지 열사들 영정이 있어. 그 이후 노동자, 농민의 죽음은 미처 다 우리가 흡수를 못 허고. 전두환ㆍ노태우ㆍ김영삼(정부)까지 그 정권에서 희생된 사람들 영정 사진은 여기 있는 거여. 그런 일(사망)이 벌어졌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남의 일이라 잊어버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다 보고 있는데 어떻게 여기서 헛짓거리를 허겄어. 어쩔 때는 눈들이 막 나를 따라와. 글서 ‘나 좀 따라오지 마라’고 할 때도 있지.”

세상이 모두 아들을 잊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단 한 사람, 어머니. 배은심(78)씨다.

“한열이가 간지 31년이라고…? 그러네… 꼽아보니까 낳아 기른 (21년) 시간보다 더 갔네. 내가 마흔 아홉에 (한열이가) 그렇게 됐응께. 한열이가 86학번이여.”

“같은 86학번”이라는 사진기자의 말에, 어머니의 입가가 누그러진다. 순간, 마치 다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보는 듯한 미소가 스쳤다.

“어여, 86학번? 지금 쉰 셋이네. (모습이) 저만큼 됐겠어, 우리 한이도. 나는 지금도 받아들 일 수가 없어. 믿기지가 않아… 광주 집에서 이렇게 (밖을) 내다보면 ‘엄마!’ 하고 올 거 같고. 그러니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이 살고 있어.”

박종철 열사의 부친 고 박정기 선생의 장례를 치르고 올라온 지 이틀째였다. 거리의 ‘가족’이자 ‘동지’였던 박 선생의 입관까지 지켜보며, 어머니는 안녕을 고했다.

“글씨. (한열이를) 다시 만날 수 있으까? 나 그것이 참말로 숙제여. 종철 아버지가 (하늘나라) 가서 (아들) 만났으면 만났다고 나헌티 얘기 좀 해주므는 좋을 틴디… 그런 능력이 있으신가, 없으신가. 우리 (전태일 열사 모친) 이소선 어머니도 (작고 후에 와서) 그 소리 않거든. 맨날 (생전에) ‘아멘, 아멘’ 하던데, (아들) 만났으면 만났다고 얘기 좀 해줄 것 아니여. 천당이 정말 있으까, 그럼 나도 만날 수 있으까. (아들 사진 보며) 나를 만나면 저 애가 좋아하까.

(한열이) 이름을 나는 ‘한아, 한아’ 이렇게 불렀어. 제 동생은 훈열이라 ‘훈아’ 이렇게 부르고. 한열(韓烈)이라는 이름은 지 아버지랑 백부님이 함께 지었을 거여. 어렸을 때는 집에서 ‘상호’라고 부르고 살았어. 출생신고 할 때 한열이라고 했지. 항렬을 따라 지으면서 없는(흔치 않은) 이름 찾아 한열이라고 한 거여. 한열이란 이름이 (뜻이) 강하지. (한열이가 생전에) 글 써놓은 걸 보면, 자기 이름 ‘열’자가 김주열 열사의 ‘열’자 같다고 했더라고. 한열이가 대학교 1학년 때인가 봐. 같이 외갓집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엄마, 내 이름을 한번 바꿔볼까’ 그러는 거야. 글서 ‘왜 이름을 바꿔’ 했더니, 지 이름이 어렵다는 거예요. ‘한아, 이름을 바꿀라믄 힘들어. 법원에 가서 뭣도 해야 허고, 뭣도 해야 허고… 쉽게 안돼. 왜 그러는데’라고 하니까, ‘내 이름을 사람들이 잘 못 외지 않을까. 쉬운 이름으로 (다시) 짓고 싶어’ 하더라고. 그러구선 말았는디, 그러고 얼마 안돼서 사고가 났어. 연세대에 가니까 대자보에 한열이는 없고 ‘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드랑께. 이것이 지가 말한 그 쉬운 이름이었으까. 운동권은 가명을 쓰니까 혁이라고 한 거야. 지금 생각해보믄, 누군가가 이름이 세다고 했을 때 바꿔 줄 것을… 그랬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으까. 지금도 그게 항시 마음에 새겨져 있는 거여.”

어머니의 눈가엔 세월을 따라 눈물의 계곡이 패였다. 홍인기 기자

이한열 열사의 생일은 이달 29일이다. 어머니는 52년 전 산고가 어제인 듯 생생하다.

“양력으로 8월 29일이 (한열이) 출생 날이지. 그때 큰 애(맏누나)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여름방학 끝나고 개학 날이었어. 화순(군) 능주(면) 집에서 낳았지. 암만! 기억이 나지. 누나가 셋이거든. 근데, 태몽에 여자 아이가 나와서 나는 한열이도 딸인 줄 알았어. 그 집 마당에 샘(우물)이 있었거든. 꿈에 그 위로 무지개가 뜨더니 그네를 타고 아이가 내려오는 거야. 보니까 여자 아이여. 그래서 딸인 줄 알았는디, 낳아서 보니까 고추가 달려서 걱정이 순식간에 싹 달아났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젊은 사람들이 ‘미개인인 갑다’ 하겠지만은 ‘넷째도 딸이면 어쩌지’ 그때는 걱정을 한 거예요.

(한열이는) 착했어… 좋은 아들 이었어요. 속 썩인 것도 없고… 내 자랑거리였어요. 그 정도로 무난히 잘 커줬어요. 우리는 종교도 없고, 가족끼리 그저 서로 믿는 걸로 (의지하고) 살았어요. 한열이 밑으로 세 살 차이 나는 막내까지 2남 3녀. 나름대로는 잘 살았어요.”

어머니가 이 넷째 아들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애들이 학교에 맨날 뭔가는 빠쳐(빠뜨려) 놓고 다닌단 말새(말이야). 수업에 필요한 거 뭐 놓고 갔다는 거지. 그러믄 거리가 먼디, 내가 택시를 타고 갖다 주러 가. 가믄 나는 그렇게 웃어싸. 선생님도 보고, 아들도 보고, 그러니까 좋은 거여, 그게. 또 우리 이한열이는 맨날 실장하고 있으니까. 가서 보믄 키가 이렇게 커가지고 이쁘지. 내 평생에 그때가 최고로 좋았어. 아무 걱정이 없었지.

고등학교 때 한열이가 학교 끝나고 올 때마다 내가 마중을 갔어요. 집 근처에 광주(지방)법원이 있었는데, 스쿨버스를 거기서 내렸어. 밤 11시면 하차를 하니까 10시쯤 되면 내가 집을 나서요. 가는 길이 머니까 무서워서 뒤도 못 돌아보고 가도 아들 만나러 강께 좋았지. 그 놈 생각하고 부지런히 가는 거여.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참 좋았드만. 가믄서 빵 하나 사고 우유도 하나 사고 그것 든 까만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가서 한이 만나면 먹으라고 줬지. 한번은 만나서 돌아오는디 한이가 그래. ‘엄마, 요즘 가정실태 조사를 하는데, 슬픈 사람이 너무 많애.’ 왜 그러냐니까, ‘엄마가 없는 친구도 있고, 아빠가 없는 애도 있고, 슬픈 사람이 많애’ 하는 거여. 그럼서 ‘엄마, 나는 그런 게(슬픈 사정이) 없어서 좋아’ 하드라고. 그래서 내가 ‘아이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무섭다’ 했는데, 2년 뒤에 저러고 돼버렸다잉...”

어머니는 영정 속 아들을 바라봤다. 남의 불행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이 죄스러울 만큼 착하고 순한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나고 자란 아들 역시 마음이 깊고, 낙천적이었다.

“한이가 고3 때 서울대학교 경영대 시험을 봤는데 떨어져 브렀거든. 그간 어려움 없이 잘 커줬으니, 세상 맛을 모르잖애. 그래서 내가 한열이 보고 그랬어요. ‘떨어졌다고 섭섭허게 생각하지 말고 1년 더 세상을 배와바(배워봐). 그런 의미에서 재수하는 거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해.’ 그러니까 한열이도 ‘엄마, 내 생각도 그래’라더라고.

연세대에 들어가서는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 집을 얻어놓고 지 셋째 누나랑 살았어요. 누나가 영어교육과를 나와서 인천으로 발령을 받았거든. 거기가 (연세대와 인천의) 중간이래. 근디 지 누나가 나헌티 그러는 거여. ‘엄마, 암만해도 한열이 옷에서 최루탄 냄새가 나싸.’ 그거를 알고 내가 맨날 한열이한테 전화를 하는 거여. 하지 마란다고 않겄어. 그러니까 ‘한아, 비리를 보고도 가만히 있으면 못쓰고. (학생) 운동도 할 줄 알아야지. 근디 뒤에서 해라, 뒤에서. 앞에 가지 말고 뒤에서 해’라고 했다고. 아침마다 전화를 하니까, 하루는 한이가 이래요. ‘엄마 아들을 왜 못 믿냐’고. ‘(엄마 말대로) 뒤에서 한다고 했는데 왜 아침마다 전화 하느냐’고. 그러면서 승질을 내는 거지. 하이고… 근디… 딱 사건이 나고 보니까 젤 앞에 가 서 있던 거여, 얘가…”

어머니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루는 내가 개봉동 집에 가서 한열이랑, 지 누나랑 새벽 2시까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그런 적이 있어요. ‘왜 공부를 않고 그런 거(학생운동)를 하냐’고, ‘내일 엄마랑 같이 집에 가자’고. 그러니까 이한열이 뭐라고 하냐면, ‘엄마, 나 약속이 돼있어. 나는 그 약속을 안 지키면 위선자가 돼’ 이렇게 나오는 거야. 나도 승질을 내면서 ‘엄마 말은 말이 아니고 느그 동료들 약속만 약속이냐’ 이랬지. 그래도 자기는 못 간대. 그러다 아침 8시쯤 되니까 가방에다 책을 죄 넣어 갖고는 ‘엄마, 가요’ 하더라고. ‘곰곰 생각해보니까 안 가면 안되겠어. 엄마 말을 안 들으면 안되겠어’라는 거여. 같이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디, 지금도 (고속도로) 휴게소 가면 파는 그, 뭐이냐… 왜 오뎅(어묵)국. 그것을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아들 주고 하나는 내가 먹는데, 가만히 보니까 한열이가 맛~있게 먹는 거여. 그걸 보니 내가 내 거를 다 먹을 수가 없잖애. ‘한아, 이거 더 먹어’ 하니까 한이가 두 그릇을 다 먹으브렀다. 그게 그렇게 이뻐 갖고 속으로 내가 ‘아이고, 잘 먹네’ 했던 기억이 나. 그러니 내가 지금도 휴게소 가면 그 오뎅국을 못 사먹는다. 그걸 사먹을 수가 없는 거여. 눈에 (예전에 잘 먹던 한열이 모습이) 다 보이니까. (광주) 집에 가서 ‘한아, 왜 못 온다고 해놓고 왔어’ 그러니까 ‘지금 엄마 말 안 들으면 안될 거 같아서 왔어’ 그러는 거여. 그 소리에 ‘이 놈이 그래도 엄마 말 거역을 안 하네’ 해서 또 이쁜 거여.”

그 때가 1987년 4월, 이 열사가 변을 당하기 두 달 전이었다.

“그러고선 어머니날(어버이날)이 돌아왔다, 인자. 한이가 매년 카네이션을 줬거든. 재수할 때도. 그 때는 인자 2학년 땐디 기다려도 편지도 없고 전화도 없고… 그러니 밤쯤 되니까 내가 안절부절 해. ‘이놈 자식이 이제 다 컸다고 엄마도 잊고 아빠도 잊고 집도 다 잊어브렀나.’ 이튿날 아침 10시쯤 되니까 (우편)배달부가 뭘 던져놓고 가. 보니까 편지야. ‘엄마, 올해 어머니날은 바빠서 못해드렸지만, 내년에는 내가 카네이션 갖다 달아드릴게’라고. 그게 좋아서, 직장 가 있는 지 아버지한테 전화까지 해서 ‘아들이 이렇게 편지에 써 놨고만. 역시 아들이 내 활력소고만’ 하고 자랑을 했어. 그게 잊어지믄 좋은데 엊그저께 같아. 왜 못 잊으까 몰라…”

아들의 육필 편지는 이한열기념관에 가 있지만, 모든 글자 하나하나는 어머니 마음에 각인돼 있다.

어머니는 그저 세월에 끌려온 것이지, 세월이 약은 아니라고 했다. 시간이 갈수록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에 더 깊이 사무친다. 홍인기 기자

“(마지막으로 본 건) 그 해 6월 6일이여. 5일날 아침에 인자 누나들허고 같이 집에 내려왔어. 연휴였나 그래요. 와선 방에 꼬불치고(틀어 박혀서) 누웠는 거여. 지는 그때도 뭔가를 알았는가 어쩠는가는 모르겄어. 지 누나가 자꾸 옷에서 최루탄 냄새가 난다고 해쌌으니까, 내가 종강하자마자 집으로 빨리 오라고 (당부를) 했단 말예요. 한이가 7일날 저녁에 7시쯤 올라갔는데, 내 기억에 그때도 해가 있었나 봐. 밝았어. 내가 ‘잘 가’ 하니까, 문을 다시 열드만 손을 막 흔들면서 ‘엄마, 종강하면 빨리 오께’ 그려서, 내가 ‘응, 빨리 와’ 했지. 그러곤 9일날 그렇게 돼버린 거여…”

어머니는 아들이 잘못 된 데 자신의 책임은 없는지, 지금도 매일 반성문을 쓴다.

“우연이었나, 아니면 내가 뭘 잘못 했나… 그 (학생)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학교에 보내지 말고 집에다 가둬놨어야 했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던 그 순간 기억도 또렷하다.

“큰 애가 교편을 잡아서 그 애 딸(손녀)을 내가 키워줬어요. 그 날(6월 9일) 낮잠을 자는디 한 오후 5시경이었나. 잠을 푹 잔 게 아니라, 가윗잠을 잤어요. 자고 있는데 누군가 막 나한테 막 고함을 지르는 거 같애. 아무리 눈을 뜨려고 해도 안 떠지더라고. 여잔디, ‘왜 잠을 자고 있어!’라는 거여. 그 소리를 듣고는 눈을 바딱 떠서 보니까 한 (오후) 5시 반쯤 됐더라고. 좀 있으니까 전화가 오는 거야. 한열이가 위급허다고. 위독허다는 건지, 위급허다는 건지 그때는 뭔 소린지 모르는 거지. 병원에 가니까 진짜 우리 한열이더라고. 정신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고, 하늘이 무너진 거여. 세상이 변해 버린 거여. 암 것도 안 보이는 거여.”

그 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처음 들은 것도 병원에서였다.

“그때 병원에서 내려다보믄 재활병동 환자랑 가족이 보였어요. 그걸 보면서 ‘우리 한열이도 의식만 돌아오면 내가 저렇게 (휠체어를) 밀고 다니게 돼도 그렇게 평생 살아야 되겠다’ 각오를 했어요. ‘의식만 돌아와라. 평생 나랑 살자’고… 근디 그것이 안되드만… 어쨌거나 일어나서 나랑 같이 살수 있기를 원했지. 그러니 (한열이를 살려내라) 구호고 뭐고 들리지도 않았지. 아니 왜 ‘살려내라’고 하냐, 아직 안 죽었는데.”

그러나 아들은, 황망하게도 가버렸다.

“7월 1일 아침에 깨고 보니 새벽 6시여. 꿈을 꿨는디, (한열이) 아빠가 한열이를 안고 논두렁을 가. 꽃병 하나를 들고. 내가 ‘우리 한이 이러면 안 된다’고 울다 일어나니까 그 때인 거여. 일어나선 올 것이 왔는갑다, 하고 (한열이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밤 10시에 갑자기 중환자실서 격리실로 가는 거여. 우리 한열이 손을 막 만져보니까 힘이 하나도 없어… 그러고 5일날 죽었으니 며칠 전부터 그게 (꿈에) 보였나 봐.

철통같이 믿던 아들이 그랬으니 인자 내 (이유를) 알아야 안 되겄어요? 49재 지내고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노동자들이 집회를 할 때도, 아마 7, 8월쯤 됐을 거예요. 거기를 내가 갔어. 정문부터 (백양로를 따라) 가는디, 걸어 가기는 허는디 내 발이 땅에 닿아 가는지 날아가는지 모르겄는 거여. 실감이 안나. 우리 아들이 뭣하다가 그렇게 됐으까. 그런 죽음들이 생기면 옛날에는 정부에서 사람들의 삶을 왜곡을 했어. 내가 (집회를 쫓아다니면서) 학생들 대열 속으로 들어가서 보니까 사수대란 게 딱 있어. 사수대는 뭣을 하는 곳인고 (물어)보니까, (집회에 참여한) 애들이 못 흩어지게 좁혀주는 사람들이래. (한열이가) 제일 앞에서 그 역할을 했으니… 엄마한테 걱정 말라고 했던 놈이. (내가) 생각하는 거지. ‘이 놈이 엄마를 돌려(속여) 먹었네.’ 왜 그랬으까잉. 거기서부터 나는 대중들하고 길에서 살았지.”

어머니의 연설은 유명하다. ‘진짜’라서 그렇다. 원고도 없고, 매끄럽지도 않지만, 한숨 소리마저 감동을 주는 이유다.

“(연설은 이한열 열사) 발인할 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때 (유족 인사는) 식순에도 없더라고. 자기들 할 말만 다~ 허고 나서 이제 곧 끝나겄더라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승질이 나. (손을 드는 모양을 하면서) 그려서 ‘나도 한 말씀 드릴란다’ 했지. 사람들이 깜짝 놀랬지. 내가 ‘이 놈들, 살인마’라고 욕헌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인 거여. 그것도 안허고 새끼를 보내버리면 이 애미, 애비는 뭣이냐… 멍청이가 돼버리는 거지. 우리 아들이 삶을 다 못살았잖아요. 하고 싶은 거 다 못했잖아요. 그때 내가 그랬어. ‘한열아, 니가 못했던 거 엄마가 죽을 때까지 할란다. 뭣인지는 몰라도 니가 못다한 거 엄마가 열심히 할란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그때 약속을 한 거여.”

1987년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진 지 이틀째인 6월 11일, 중환자실 앞에서 어머니 배은심(가운데)씨가 큰 누나(왼쪽 첫번째) 등 가족과 함께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머니는 그날로부터 거리의 어머니가 됐다.

“그 이후부터 집도 비아(비워) 놓고 서울로 갔어. 아침밥 차려 놓고 서울 가서 집에 돌아오면 어떤 때는 밤 12시도 되고, 새벽 2시도 되고. 나는 (다른) 자식들한테 미안한 거는 없어요. 내가 그랬어요. ‘다 갈칠 만큼 갈쳤으니(가르칠 만큼 가르쳤으니) 니들대로 잘 살아라. 이한열이는 말을 못하니까 나는 말 못하는 사람 편에 서서 살겠다’고, ‘내가 (한열이와) 함께 산다’고 한 거지. 그래도 지금은 쫌 후회가 돼. 그때 (1987년에) 막내가 고3이었는데, 지도 충격이니 뭔 정신으로 공부했겄나. 막내 수발도 지 누나가 다 했고, 나는 그 이후부터 엄마 노릇, 할머니 노릇도 못해봤지. (한열이) 아버지도 5년 뒤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해마다 6월이 오면 그것이 오는 거여, 마비가. 그러다가 중풍이 돼버린 거여.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지. 아버지는 말할 수 없이, 아들을 제일 좋아한 사람이거든. 그러니 그 충격으로… 긍께 집안이 그때부터 정신 없는 집안이 돼아쁘렀어.”

어머니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의 마지막 순간 한마디가 궁금하다.

“이게 항시 마음에 남아있는 거예요. 한열이가 (최루탄을) 딱 맞았을 때 ‘엄마!’ 했는지, 안 했는지. (이)종창이가 (최루탄을 맞은) 한열이를 부축하고 갈 때 한열이가 ‘내일 시청에 가야 하는데’ 이 소리를 했다고 해. 그러므는 그것은 그 뒤니께, 직격탄을 맞는 순간에는 뭐라고 했을까, 엄마를 불렀으까… 또 최초 쓰러졌던 사진이 있을 틴디 그 사진이 왜 안 나오까. 어딘가 그 사진이 있을 거 같은데. 그것이 항시 궁금했는데 작년에 외신 기자(네이선 벤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가 그 사진을 내놓은 거 아녀. 그걸 보구서 ‘이 사진이다. 내가 기달렸던 게 이 사진이다. 이제 볼 거 다 봤다’ 했어. 음성은 못 들었어도, 현장을 봤으니까. 어디 도망 가다 스러진 게 아니고, 정문에서 (최루탄을) 맞은 게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 거예요.”

지난 해 네이선 벤은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이한열기념사업회에 최초 공개하는 현장 사진을 제공했고, 이를 한겨레가 보도했다. 사진엔 이한열 열사의 피격 전후 모습이 담겼다.

“꿈이 그렇게 안 뀌어. (아들) 꿈을 꾸고 싶어서 ‘오늘 저녁에는 자기 전에 꿈 좀 꿔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할 때도 많은데 이상하게 안 꿔져.”

어머니는 아직도 해마다 6월이 되면 연세대에 걸리는 아들의 사진을 보고는 ‘왜 내 아들이 저기에 있지’ 싶다고 했다.

“내가 그 뒤로 (집회) 현장에 가도, 1990년대 초까지는 ‘자네들 열심히 하라’ 소리는 못했어. 잡혀가면 죽고 하니까. 형사들 보고도 ‘느그도 한번 당해봐라’ 소리도 못했다. 그게 얼마나 아픈 건데. 자식들 죽여놓고 미쳐서 다니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그걸 아니까 차마 그 말은 못했다. 세월이 약이라는 건, 타인의 얘기지. 본인은 아니여. 해당이 안돼. 약이 아니니까. 세월이 지나가면 갈수록 어떻게 보면 (그리움이) 더 짙어지는데. 그걸로 끝난 게 아니잖어요? 자식이란 것은, 죽었다고 해서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여. 우리 애기가 살아있으면 지금쯤은 이랬겄지, 하는 욕심을 부리는 거지. 가슴에 묻어졌냐고? 그랬는지 어쩠는지. 나는 같이 산다고, 같이 다닌다고 하고 있으니까. 나는 어디 가면 ‘둘이다’ 하거든. 남들 보기에는 혼잔데 나는 둘이여. 그러니 무서운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고 둘이 다닌디 뭐가 무서워.

(2016년 말 ‘박근혜 탄핵정국’ 때) 촛불을 보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얼마나 울었는 줄 아는가. (사람들이) 다 잊어버렸는 줄 알았는데 안 잊고 간직하고 있었더라고. ‘옛날에도 그랬으면, 최루탄이 없었으면 우리 한열이도 안죽었을 틴디’ 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근데 지금 기무사서 뭐가 나와 싸서 (계엄령 문건 보도를) 보니까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뻔 했어.”

어머니는 아들을 “한이”라고도, “우리 애기”라고도 했다. 아들이 간 지 31년이 지났지만, 낳을 때부터 기를 때까지 아들의 매 순간이 생생한 듯 표정에 드러났다. 홍인기 기자

아들의 죽음은 어머니의 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뭐가 달라졌냐고… 그것이, 참 어려운 얘기인데. ‘달라졌다’라고도 못하겠고, 달라진 줄도 모르겠고. 내가 좋은 게 없어.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뭔가 내 마음 구석에는 보이지 않는 게 있어. 주변에서 뭔가를 만족해 하면은, 안심이 되고, 불안해하면 같이 불안해지고 그러기는 헌디. 그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 ‘아, 좋아!’ 그 소리는 안 나와. 아마 나는 통일이 돼도 그럴 거여.”

생의 가장 큰 기쁨이 사라진 결과다.

“이런 거는 배웠지. 자기 주장을 하고 권리를 찾을 줄 알고 허는 거. (권리는) 누가 갖다 주지를 않애. 그 전에는 아예 모르고 살았지. 우리 애기(한열이)도 대학교 가서 비디오도 보고 유인물도 보고 하면서 멍청허니 산 게 후회가 됐든가 봐.”

이 어머니의 생을 지금까지 붙든 건 무얼까.

“내가 삶의 도를 어떻게 알겄냐. 되게 어려운 질문인데.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한다냐. 그렁께… 암튼 항시 내 맘에는, 내가 부자 되고 잘 살고 이걸 생각한 게 아니었어. 예를 들자면, 우리 한열이 생각이 안 있었겄는가. 불의를 보면 못 스쳐가고 투쟁 현장에도 들어갔고 이런 것을 생각허는 거여. 나도 거기에 맞게 살고 싶고, 아들 눈에 보이든 않든, 엄마가 아들 욕을 먹이면 안 되는 것이지. 아들이 눈에 안 보여도 나는 아들하고 같이 살기 때문에 아들의 삶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에 갖고 있어. 바람? 내가 뭣을 바래고 사는 사람은 아니여. 그냥 살어. 뭐이 좋겄는가. 뭣이 좋은 세상인가.”

어쩌면, 말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그것. 아들을 다시 만나는 그것.

“나 그것이 참… 숙제여. 기독교 믿는 사람들이 들으믄 욕허겄다만은 천당이 있으까. 그러믄 (한열이를) 만날 수 있으까. 만나믄 저 애가 좋아하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당연히 좋아하겠죠!’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어머니는 반문한다.

“내가 혼 내는데? 왜 너 먼저 갔느냐고 혼 내놔야지. 엄마 먼저 가야 하는데 왜 먼저 갔냐고 혼낼 거여. 근디, 그런 얘기할 여유가 어딨겄어. 그래도 (한열이는) 능청 맞아서 ‘엄마, 엄마’ 할 거다. 만날 수 있으까? 만날 거 같으면 내가 더 열심히 살고. 할 말은 많애. 잊어버리면 큰 일이다야. 그래도 만나면 좋아 갖고 (혼낼 일은) 다 잊어버릴 거다야. 그챠?”

상상뿐인데도, 어머니의 눈은 벌써 아들과의 재회에 가 있었다.

이 인터뷰에는 더 붙이고 뺄 말이 없었다. 어머니의 말은 그대로 진심의 고갱이였다. 그 자체로 역사였다. 구술을 가능한 한 그대로 살린 건 그 때문이다. 그 존엄에 감히 사족을 더할 재주가 기자에겐 없었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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