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부이며 수도자인 필자는 수도원에서 살기 때문에 혐오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기란매우 어렵습니다. 또 혐오가 요즘 그렇게 문제가 되는지 피부로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뉴스를 통해 보면 혐오가 삶의 곳곳에서 흔하게 부닥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혐오주의’라는 말도 있는지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여러 백과사전들이 정의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작권 때문에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혐오주의란 성별이나 성(性)적 지향, 종교, 인종, 지역, 문화 등 특정 대상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차별 행위 등을 가하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혐오(嫌惡)란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싫어하고(嫌) 미워한다(惡)는 뜻인데 인간은 누구나, 아무리 덕인이요 성인이라 할지라도, 싫어하는 것이 있고, 싫은 감정이 미움의 감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요즘 왜 주의화(主義化)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혐오주의의 갑작스러움과 과격함에 충격이 더 클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유교의 영향이랄까, 선비정신의 영향이랄까, 감정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삼가야 할 것으로 보았고, 특히 군자는 감정을 격하게 표현하는 것을 아주 금기시했지요. 그런데 감성의 시대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에 있는 우리는 감성 또는 감정이 이성이나 의지보다 우리 마음에 더 영향을 미치는 세상을 살고 있고, 그 감성이나 감정을 억누르지도 않고 자유롭게 그리고 마음껏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에 우선 표현 빈도가 높아졌습니다. 사실 저만 해도 요즘 세대가 싫다는 것을 그때그때 그리고 또박또박 표현하는 것에 깜짝깜짝 놀라고, 좋다는 것도 ‘완전 좋다’고 하든지 ‘대박’이라고 하든지 그렇게 강하게 표현하는 것도 생경스럽지요. 그렇습니다. 혐오가 주의화하는 데는 감정 표현의 자유로움과 빈번함만이 아니라 그 표현의 과장과 극단화가 더 큰 몫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요즘 분노를 끝까지 표현하는 것처럼 혐오의 감정도 끝까지 표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봐야 할 또 다른 측면은 혐오란 앞서 봤듯이 싫어함과 미워함이 합쳐진 것인데 싫은 것이 미움으로 발전하는 것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는 싫어할지라도 가급적 싫은 것이 미움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좋고 싫은 것은 자기중심적이고 그래서 좋고 싫은 것이 너무 분명하고 강하면 그것을 좋은 거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자기 취향이기에 어쩔 수 없고 그리고 관계적으로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싫은 것이 미움으로 발전하면 미움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관계적 에너지이기에 이 에너지가 파괴적으로 뻗치면 물리적 폭력이든 감정적 폭력이든 폭력이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싫은 것이 미움으로 발전하면 싫다는 단순한 감정이 폭력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또 봐야 할 것은 혐오의 집단화입니다. 한 방울의 물은 아무리 오염되었을지라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지만 오염이 전염이 되어 집단화하면 혐오의 그 폭력성이 더 큰 힘을 지니게 되겠지요. 요즘 인터넷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표현에 명암이 있고, 청와대 국민청원이라는 것도 순작용과 역작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표현의 자유가 주어질 때 자체 정화의 작용도 있다고 믿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자체 정화가 잘되려면 먼저 혐오 같은 나쁜 감정이 미움과 폭력이 되고, 이것이 집단화하면 엄청난 폭력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자체의 지성과 성찰이 우리들 안에 성숙하게 자리 잡고 역할을 해야겠지요?!

김찬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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