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검찰 압수수색을 받는 도중 집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란 영화의 주인공 감독 구경남(김태우 분)은 속물적인, 그래서 현실적인 캐릭터다. 자신을 추켜세우는 평론가 발언에 홀로 웃음 짓지만, 자신의 권위나 위상을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겐 목소리를 높이거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며 못마땅해 한다. 허울뿐인 권위가 뭉개질라치면 정색하면서 “네가 뭘 아냐?”며 무시해버리곤 한다.

그런 구경남은 영화계 대선배인 원로 감독 때문에 체면을 구긴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는 갑작스런 질문에 현학적인 용어들을 잔뜩 늘어놓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이어 원로 감독의 “모든 게 다 중요하지”라는 간단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 평생을 살아낸 답변에 존경의 눈길이 쏠리는 것을 보고 따라 하다가 망신 당한다. 권위라는 건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모습을 타인들이 인정하고 존중할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거다.

예전에 본 영화를 떠올리고, 존중이니 권위니 생각하게 된 건 최근 한 부장판사와의 식사 자리에서 나눈 대화 때문이다. 법조계 ‘핫이슈’로 떠오른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그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대법관 권위, 대법원장 권위를 높이려고 상고법원 설치에 무리수를 둔 것 같다”며 “앞으로 재판 결과가 존중 받지 못하고 사법부의 ‘영(令)’도 서지 않을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현직 부장판사를 한숨 짓게 한 건 상고법원 추진 과정에서 벌인 일들 때문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상고심(3심) 사건 중 사회적 파장이 크거나 판례를 변경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만 대법원이 맡고, 상대적으로 단순한 민ㆍ형사 사건은 상고법원에 맡기려 했다. 대법원에 사건이 몰리면서 신속한 재판이 이뤄지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취지였지만 반발에 부딪혔다. 헌법에서 규정한 3심제에 어긋나 위헌 소지가 있다거나 대법관 수를 늘려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는 주장이 쏟아지는 등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렸지만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추진에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법원행정처는 청와대 등과 재판 거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제안을 하고, 양 전 대법원장 정책 방향과 다른 성향의 판사들을 뒷조사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문건들을 다수 생산했다. 이들 문건을 작성하고 작성하도록 지시한 주체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목되고 있지만 임 전 차장이 양 전 대법원장의 허가 없이 움직였으리라곤 상상하기 어렵다.

이들은 왜 그토록 상고법원에 집착 했을까. 정말 국민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필요했다면 상고법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설득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법관 증원 의견은 대법원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 묵살됐다고 한다. 오히려 위법의 경계선을 넘어서까지 상고법원을 추진했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상고법원 설치로 생기는 고위 법관 임명권을 쥐려고 했던 것 아니겠냐”며 “대법원장이 주어진 것보다 많은 걸 가지려 했던 것 같다”고 했다.

사법부 권위는 요직 임명권이 아니라 올바른 재판에서 나온다. 묵묵히 증거와 진술을 판단하고 치우치지 않으려 고민해서 쓴 판사의 판결문을 보며 우리는 사법부를 존중했고 그 권위를 인정해왔다. 대법원장은 그런 사법부의, 우리 사회 마지막 정의의 보루로 여겨졌던 사법부의 큰 어른으로 존중 받아왔다.

하지만 그릇된 방식으로 권위를 세우려던 양 전 대법원장은 이제 검찰 수사선상에 오르게 됐고, 언론을 피해 내빼던 임 전 차장은 희화화되고 압수수색까지 받았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국민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을 비난하고, 몰아붙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면서 해 왔던 일들을, 그들이 필요 이상으로 높이려 했던 법대 앞에 서서 낱낱이 설명해야 한다.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딱, 아는 만큼만 말해라.”

안아람 사회부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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