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함은, 또 그것이 흰소리가 아니라 한걸음만 내딛으면 실현 가능한 얘기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짧은 시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일궈낸 덕분이다.

이것이 과학기술 덕택임은 부동의 사실이다. 지난날 과학기술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나라를 세우는 동량이었고, 이제는 그러한 과학입국 단계를 뛰어넘어 국가사회 경영의 주축이 되는 ‘과학경국(科學經國)’ 단계로 들어섰다. 아무리 인문학을 강조한다고 해도, 과학기술이 산업화를 직접적으로 견인하고 민주화의 물적 토대를 구축해냈음은 부인 못할 사실이기에 그렇다. 인간 고유의 역량이나 활동을 인문학보다는 과학기술이 한층 명료하게 규명하고, 인문학적 성취보다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의해 사회가 굴러가는 경향이 우세하기에 그렇다. 그러니 과학기술이 경세(經世)의 주된 역량이 됨은 별로 이상할 바 없어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과학기술이 경세의 주축으로 발돋움한 데는 과학기술 진흥을 견인해낸 여러 법의 제정이 큰 도움이 됐다. 1967년 ‘과학기술진흥법’이 제정된 이래 과학기술 발전 관련 법령이 속속 제정되었고, 학술연구 차원에서는 ‘기초과학연구 진흥법(1989)’, ‘생명공학 육성법(1995)’ 등 당장의 국가적 필요와 중장기적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법령이 꾸준히 제정되어 과학기술의 발전을 견인했다. 또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법(1991)’,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특별법(1997)’ 등이 제정되어, 과학기술 발전 중장기 정책 목표와 방향, 기본계획과 지방의 과학기술 진흥 종합계획 등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여 집행할 수 있었다. 2001년에는 다소 방만하다고 할 정도로 마련된 과학기술 관련 법령으로 인한 행정 낭비를 막고자 ‘과학기술기본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일반 법령 차원에서만 이러했음이 아니다. 헌법 127조에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기함으로써 과학기술 진흥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와 국무총리 산하 ‘국가과학기술심의회’ 등이 설치되어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국가 차원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나름 도모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우리는 일제 잔재와 민족 분단, 군부 독재 같은 악조건 아래서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보란 듯이 일궈낼 수 있었다. 그런데 선진국으로의 도약이 과학기술 한 날개로 과연 가능할까.

불가능한 이유는 너무도 명료하다. 선진국으로 거듭나려면 보편문명을 구현하는 ‘보편국가’가 돼야 하는데, 이는 이른바 ‘모방형’, ‘추격자형’ 국가 발전 전략으로는 불가능한 과업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과학기술이란 날개 하나로는 선진국다움의 모방과 추격은 가능해도, 선진적 궤적을 그려내는 독자적 비행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목하 21세기에서는 날로 격화되는 미국과 중국 간 패권 다툼에서 엿보이듯이 새로운 문명표준을 선점하기 위한 다툼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 경쟁서 지역예선을 뚫고 본선 결승 라운드까지 오르려면, 선발 선진국의 역사가 밝히 말해주듯 인문적 역량의 진흥이 필수적이다.

지난날 국가의 과학기술 역량 강화를 이공계 지원을 통해 실현했듯이, 인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인문계, 곧 인문사회학술을 진흥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인문사회학술 진흥을 위한 제대로 된 법령 하나 없었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치자. 지난 2016년, 사회과학 진흥이 빠진 채 어정쩡하게 제정된 ‘인문학 진흥 및 인문정신문화 진흥에 관한 법률’이라도 달가워하는 처지였어도 별 문제 아니었다고 치자. 헌법에 인문사회학술 진흥을 국가 책무로 규정하기는커녕, 인문의 인조차 언급되지 않았어도 넘어갈 만했다고 치자.

문제는 앞으로다. 비유컨대 월드컵 본선 참여에 의의를 두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더는 인문사회학술 진흥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과학기술 역량의 강화가 관련 법규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듯이, 인문사회학술도 그러한 법적 기반 마련이 시급한 까닭이다. 이를 위해 학계는 물론 국회, 정부, 재계 등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정부 부문에서는 당연히 교육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물론 이 일을 주되게 해야 하는 당사자가 교육부여서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사뭇 회의적이다. 2022년 수능 개편안에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과학기술의 기본인 수학은 물론 과학의 학력 저하를 국가의 이름으로 유도하는 행태를 뻔뻔하게 감행하기에, 인문사회학술 진흥은 고사하고 그간 국가 발전을 이끌어온 과학기술의 미래를 대놓고 갉아먹고 있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어떡하겠는가. 교육부를 폐지하라는 정당한 요구가 묵살되어 교육부가 여전히 국가 차원의 학술 진흥정책을 거머쥐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교육부는 응당 국가 백년대계를 도모하는 안목 위에서 인문사회학술 진흥의 국가 책무를 헌법에 명기하는 노력에 적극 나서라고.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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