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한 미래 걱정에 공부하는 직장인들

#1
‘자기 위치’ 불안해하는 직장인
현재보단 미래에 대한 절박감에
관심사나 부족한 부분 공부 나서
시간ㆍ돈 등 아낌없는 투자 바람
“동료들도 뭐든 배우고 있어요”
#2
“두 번째 기회 오면 낚아채야죠”
4차 산업혁명 등 변화의 시대에
사회 트렌드를 ‘자기 것’ 만들기
코딩 수업 4명 중 3명이 회사원
인강ㆍ앱 활용 공부도 능수능란
|||

10년 차 반도체 회사 엔지니어 양지웅(가명ㆍ37)씨는 요즘 인공지능(AI), 머신러닝(ML), 딥러닝(DL) 공부에 한창이다. 버스를 타고 출ㆍ퇴근하는 동안 해외 대학 유명 강의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코세라(Coursera)’에서 제프리 힌튼 토론토대 교수 등 세계적 석학의 강의를 꼼꼼히 챙겨 본다. 퇴근 뒤 집에서도 시간 날 때마다 교수들이 내는 과제를 하고, 기말고사 문제를 푼다. 뿐만 아니다. 양씨는 5월 한 달 동안 일요일마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 전문 학원을 찾아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코딩ㆍ데이터마이닝 특강을 들었다. 2시간 이론 수업 뒤 주어진 과제에 대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직접 짜는 3시간짜리 실습을 경험했고, 요즘 주말에는 강의 내용을 복습한다.

반도체는 최고 호황, 하지만 엔지니어는 ‘미래가 안 보인다’

양씨가 파고드는 분야는 자신의 직무와 직접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시간과 돈을 들이는 이유는 뭘까. 재미있어서? 하고 싶어서? 아니다. “5년 후, 10년 후 모습에 대한 불안감 때문입니다.” 경제 전반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호황인 분야가 반도체다. 사실상 한국 경제를 짊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불안감이라니.

양씨는 지금의 국내 반도체 업계를 고인 물에 비유했다.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로 나뉘는데 지금까지 국내 반도체 업계는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다. 하지만 앞으로 메모리 반도체 성장세가 한계에 부딪혀 시스템 반도체가 대세를 이루리란 전망이 지배적임에도 국내 업계의 준비가 부족한 상황이다. “선배들은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이룬 성과에 만족하는 분위기죠.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쥐고 있는 걸 지키는 데 관심을 더 많이 갖고 있어요. 제 또래 연구원들은 그래서 앞날을 걱정하고 다들 뭔가 합니다.”

양씨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그로 인한 절박함에 내몰려 배우기에 나서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평소 관심 분야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4050세대가 은퇴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하는 공부와 다르게 앞이 창창할 것 같은 2030 직장인들이 ‘열공’ 중이라는 게 눈에 띈다.

코딩, 데이터마이닝 수강생 4명 중 3명은 직장인

직장인과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하는 직무교육 전문 교육기관 DS스쿨 관계자에 따르면, 비전공자를 대상으로 한 코딩, 데이터마이닝 강의 수강생 4명 중 3명이 직장인이고, 이중 회사 지원이 아닌 자비로 비용을 감당하는 인원이 절반에 이른다. 강성희 대표는 “2, 3년 전부터 대다수 강의가 한 달 전 마감될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라며 “기술을 비롯한 사회 트렌드가 워낙 빠르게 바뀌다 보니 자신의 위치에 불안해하는 젊은 직장인들이 많아서이다”라고 분석했다.

직무교육 전문기관 DS스쿨이 마련한 코딩, 데이터마이닝 주말 특강을 듣는 직장인들이 주어진 주제에 대해 프로그램을 직접 만드는 실습을 하고 있다. 수강생 4명 중 3명은 직장인이라는 게 DS스쿨 측의 설명이다. DS스쿨 제공

양씨 역시 단기적으로는 AI와 관련 분야에 반도체 기술을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지 모색하기 위한 것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이직을 고려하고 이를 위해 준비하는 측면이 있다. “회사는 AI 등 새로운 분야는 별도 조직을 두거나 해외 관련 기업을 인수합병(M&A)하는 식으로 대비하고 있지만 그런 정보를 전체 구성원과 공유하지 않아요. 결국 스스로 알아서 준비하지 않고서는 갑자기 닥쳐올 변화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제 자리는 어느 순간 사라질지 모르죠.”

4년째 플라톤 공부하는 바이오 제약 회사의 약사

약대를 나와 바이오 제약 회사인 셀트리온헬스케어에서 일하는 10년차 직장인 강희정(32)씨는 3년 전부터 철학, 문학 등 인문학 고전 독서 토론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다달이 발제를 맡은 사람이 책 말고도 관련 논문 등 추가 자료를 공부해 토론할 내용을 챙겨 오고, 나머지는 책을 읽고 와 의견을 주고받는다.

토론 대상은 미국 세인트존슨 칼리지의 ‘인문학 고전 100권 리스트’에서 고른다. 이 대학은 재학생 모두에게 4년 내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부터 데카르트, 셰익스피어, 밀턴, 톨스토이, 니체, 마르크스, 제임스 조이스까지 읽고 토론하도록 한다. 교수도 토론에 참여할 뿐 별도 강의와 시험이 없다. 그런데도 뉴욕타임스는 ‘미국 최고의 학사 과정’으로 뽑았다.

강씨의 인문학 공부는 업무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전 직장(한국화이자)에서부터 지금까지 국내ㆍ외 제약업계 트렌드를 파악하고 신약 개발 정보를 구하고 국내외 석학들의 의견을 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실험실에서 연구개발하는 대신 회사 앞날에 대한 전략을 짜는 일을 하고 있다. “이공계 출신으로 상황을 파악할 때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팩트와 원리를 중요시했어요.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람과 그의 생각에 대한 고찰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어요.” 새로운 약을 하나 개발하는 복잡한 과정도 결국 여러 사람이 각자 역할을 해내야 완성되기 때문에 의학적 기술 못지않게 소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외국인 직원들은 업무 관련뿐 아니라 다양한 주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이 있고 이걸 소신 있게 말합니다. 그때 ‘아 내가 부족하구나’라고 뼈저리게 깨달았죠.”

잘 나가는 바이오 제약회사에 다니는 강희정씨는 4년째 인문학 고전 독서 토론 모임에 100% 출석율을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신약 기술이라도 사람을 상대로 설명하고 그들을 설득해야 빛을 낼 수 있다는 깨달음이 이공계 출신이면서도 인문학 공부에 열심히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게티이미지

강씨는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철학, 고전을 찾아 읽어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쉽지 않았다. 중고교 시절까지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주로 추리 소설을 읽었던 터라 인문학 서적은 낯설었다. 그러던 때 지인으로부터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소개받았다.

비록 책을 다 읽지 못해도 모임은 빠지지 않으려 애썼다. 책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 각자 어떤 입장과 접근 방식을 갖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플라톤이 쓴 ‘고르기아스’. 소크라테스, 고르기아스, 폴로스, 칼리클레스가 수사술, 훌륭한 정치가의 덕목, 행복한 삶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책을 읽을 무렵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촛불집회 국면이었다. “정치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죠. 그런데 촛불집회를 바라보면서 국민 한 사람이 투표를 통해 정치인을 택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됐죠. 신기하게 고르기아스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고요.”

뛰어난 기술도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빛을 낸다는 깨달음

인문학 공부를 거듭할수록 많은 변화를 느끼게 됐다. 대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전에는 대화할 때면 ‘저 사람 말이 맞을까’하는 것을 중요하게 따졌지만, 이제는 ‘왜 저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라는 질문을 중심에 놓게 됐다. 스스로 ‘이건 팩트다’라고 확신이 설 때까지 말하기를 주저했지만, 이제는 토론을 즐기게 됐다. 회의 때도 과거에 비해 자신감을 갖게 됐고, 내용도 훨씬 풍부해졌다.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새로운 시대 흐름을 남들보다 빨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경쟁력을 높이려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게티이미지
|||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자기 계발도 있지만 남들보다 한발 앞서가기 위해 공부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등 새로운 흐름을 최대한 빨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언제 다가올지 모를 ‘두 번째 직업’의 기회를 주도적으로 낚아채려는 의도다.

빅데이터 공부위해 발품팔기 마다 않는 핀테크기업 임원

빅데이터로 부동산 가치를 추정해 제공하는 부동산 핀테크기업 ‘빅밸류’의 공동창업자 김진경(41) 변호사는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과 법률정책’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발제자, 토론자가 아닌 청강자였다. AI 윤리, 자율주행차와 드론 등 인간을 위한 AI 원칙, 4차산업혁명과 개인정보보호법의 법적 과제 등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뿐만 아니다. 그는 지난해부터 기회만 닿으면 한국기업법무협회, 대한변호사협회 등이 마련한 4차 산업혁명 관련 토론회, 심포지엄을 쫓아다니고 있다.

“핀테크는 새로 떠오르는 분야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동시에 법적 체계가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아 미리 챙겨두지 않으면 사업적으로 어떤 혼란을 겪을지 알 수 없어요.” 대학원 같은 정규 커리큘럼이 있다면 그 공부를 하면 될 일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는 노릇. 잘 나가는 변호사, 게다가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 그럼에도 김 변호사는 공부에 소홀하지 않는다.

김 변호사는 부동산을 전문 영역으로 삼아 왔다. 부동산 소송에 특화된 법무법인에서 일하다 증권사 투자은행(IB) 본부 대체 투자팀에서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부동산 금융 실무를 맡았다. 그리고 3년 전 금융, 정보기술(IT), 법무 등 서로 다른 분야의 네 사람이 만나 빅밸류를 세웠다. 이 회사는 지난해 1월 국내에서 처음 지도 기반 연립, 다세대 시세 서비스 ‘로빅’을 출시했다. 12월에는 주소 검색 기반 자동시세 솔루션 ‘빌라시세닷컴’을 선보였고, 올해 초 신한은행과 공급 계약을 맺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건국대 부동산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여느 대학원처럼 학술적 연구는 많지 않지만 대신 여러 전문가로부터 실무 현장의 경험과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어 최대한 열심히 다니려 한다.

최장 주 52시간제 시행을 전후해 직장인들의 근무 형태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면서 자기 계발을 위해 시간을 써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특히 불투명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트렌드와 기술을 익히려거나 남들이 잘 배우지 않는 외국어를 자신의 무기로 삼으려고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이탈리아어를 미래의 무기로 삼겠다는 IT회사 직원

국내 한 통신회사의 송지영(가명ㆍ37) 차장은 이탈리아어 공부에 한창이다. 넉 달 전부터 통신회사 직원답게 스마트폰과 IT를 최대한 활용하는 게 눈에 띈다.

먼저 인터넷 강의(인강). 기본적인 문법, 단어 학습코너가 잘 마련돼 있는 ‘레아 선생님의 이탈리아어 강의’를 반복해서 듣고 있다. 다음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이탈리아노’. 하루에 새로운 단어 10개를 외우도록 이끌어준다. 최근에는 언어교류 희망자를 연결해주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이탈리아 유학생을 만났다.

송 차장이 이탈리아어 공부에 처음 손을 댄 계기는 이탈리아인 친구에게 깜짝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 알게 된 이탈리아 친구가 결혼식에 저를 초대했어요. 그동안 영어로만 대화를 나눴는데 친구에게 이탈리아어로 결혼 축하와 제 소감을 얘기해 주고 싶었어요.”

그의 이탈리아어 공부는 친구 결혼식이 끝나고도 계속될 것 같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비하면 희소성이 높은 이탈리아어를 도리어 자신의 강점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탈리아어를 알고 나서 매주 교황의 이탈리아어 강론을 조금씩 알아듣게 됐고, 성악 가사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계기로 회사가 정시 퇴근을 독려하고 휴가 사용도 최대한 보장하면서 자기계발의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도 여건이 됐다. “동료들을 봐도 다들 뭐든 배우고 있어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준비도 하고 개인적 만족감도 느낄 수 있는 이탈리아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관련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