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경기 과천 국군기무사령부의 모습. 뉴시스

계엄이라는 유령이 한국사회를 떠돌고 있다. 국군기무사령부가 지난해 3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선고 직전 ‘전시 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했다가 최근에 공개된 10쪽짜리 문건이 해묵은 혼령을 불러낸 주술 역할을 했다.

박근혜정부는 정말 촛불집회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면 이를 구실 삼아 계엄을 선포하기로 모의했을까. 아니면 유사 시를 대비한 실무 차원의 검토 문건에 불과한 걸까. 전자라면 여권 주장처럼 촛불민심을 뒤엎는 쿠데타 시도나 내란 음모다. 반면 후자라면 현 정부 적폐청산 드라이브에서 대표적인 영점조정 실패 사례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23차에 걸친 촛불집회는 6개월 동안 단 한 번의 유혈 폭력사태도 발생하지 않은 한국판 명예혁명이다. 갤럽의 마지막 조사에서 지지율 5%로 추락한 박 전 대통령 상황을 되돌아보면 과연 폭력사태를 꼬투리 삼아 계엄을 기획하고 실행을 지시할 에너지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룩한 지 30년이 지났다. 아프리카처럼 하루 아침에 군부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도 계엄 논란에 불을 댕긴 건 문재인 대통령이다. 인도ㆍ싱가포르 해외 순방 중이던 문 대통령이 지난 10일 계엄 문건 사건과 관련해 독립수사단을 꾸리라고 지시했다는 청와대 발표는 여러모로 미스터리다. 청와대는 사안의 위중함, 심각성, 폭발력 등을 감안했다고 설명했지만, 과연 이게 대통령이 해외 출장 중에 긴급히 결재할 정도로 시급한 사안인지 궁금하다.

대통령 해외 순방 중에 쿠데타 모의가 발각된 것도 아니고, 설령 쿠데타 모의라 하더라도 1년 4개월 전 작성돼 지금은 캐비넷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낡은 문서 속 내용일 뿐이다. 전광석화같은 특별수사단 발족이 필요할 만큼 증거인멸이나 범인도피가 진행됐을 리 만무하다.

기무사의 정치개입 습관을 이번 기회에 끊을 필요는 있다. 기무사가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을 사찰하고 진보세력을 종북이라고 규정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다. 계엄까지 검토한 건 월권이나 권한 남용이다. 내부 문건 폭로로 기무사 개혁바람이 불면서 존폐 위기에 몰리자 조직적으로 보수야당에 선을 대며 구명운동을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현 정부는 또 적폐청산이냐는 여론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미 공무원 사회는 4대강 사업,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에 대한 적폐청산으로 바짝 엎드려 있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장관 지시에 따라 정식으로 보고된 내부 참고용 문건이 초유의 특별수사를 불러온다면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적폐청산의 표적이 된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 측은 ‘정말 쿠데타 모의라면 국방부 공식석상에서 논의하겠냐’고 항변하고 있다. 수사의 초점은 문건 작성을 누가 지시했는지, 누구에게 보고됐고, 어디까지 실행 준비가 됐는지로 좁혀지겠지만, 한 전 장관이 부인하면 범죄의 의도성을 입증하기 쉽지 않다. 잘못하면 모기 보고 칼 빼 드는 격이 될 수 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에게 적폐청산은 지상명령이고, 지난 1년간 가장 성과를 내온 분야다. 하지만 적폐청산이 정권 운영의 만병통치약이 될 순 없다. 두 차례에 걸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이미 영세 상공인과 취약 근로자 간 ‘을 대 을’의 갈등으로 번질 조짐이다. 대통령 주재 규제혁신점검회의를 시작 2시간 전에 전격 취소했을 정도로 정부의 시름은 깊고, 혁신성장의 물꼬는 아직 터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적폐청산만 집착했다간 자기가 잘 못하는 것을 외면하고 싶어 자기가 잘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심리로 비치기 딱 좋다. 공부 못 하는 학생들도 원래 자신이 잘하는 과목만 공부하는 경향이 있다. 당장 특별수사단 발족 지시에 대해 ‘대통령이 해외에 나갔으면 외교에 전념할 일이지’라는 냉소적 평가가 적지 않다. 지금은 계엄이라는 유령과 싸울 때가 아니다. 김영화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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