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엘리 아비비(Eli Avivi)

#어린시절 시오니즘 동참 전력
15새때 민병대 조직에 들어가
유대인들 팔레스타인 이주 도와
정규 교육 못받고 선원 생활도
#기질적.자생적 히피
천혜의 은둔지 아크지브 정착
정부의 잇단 방해 시도에도
'평화.사랑' 이념 독립국가 수립
#전세계 히피들의 성지로
아랍인 웨딩촬영 영업으로 생활
우드스탁 본뜬 락페스티벌 열자
수천명 몰려 다큐 소재되기도
엘리 아비비는 국적법상 이스라엘 시민이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세운 초소형국가 '아크지브랜드'의 대통령이라 여겼던, 중동의 드문 히피였다. 1952년 이스라엘 북단의 빈 마을 아크지브에 정착한 이래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이스라엘 국가 권력과 시오니즘의 구심력에 맞서며 자유와 평화, 사랑의 히피적 이상을 추구했다. 물론 그 과정은 아비비가 전쟁이라 불렀을 만큼 험난했다. Akzivland 페이스북.

세속주의 시오니즘(Zionism)의 핵심은 이스라엘 국가 건설이다. 그건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닮았다. 현대 시오니즘 운동의 이론가이자 선동가로, 오늘날 이스라엘 시민들이 국부쯤으로 추앙하는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은 1896년 책 ‘유대 국가’에서 국가의 완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는 단순히 우리의 복장, 관습, 전통, 그리고 언어를 되찾는 외적 동질성(external conformity)뿐 아니라, 느낌이나 태도까지도 동일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 물샐 틈 없는 일체주의는 구약 ‘이사야’의 “흩어짐(exile)은 하나의 심판이요,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시 ‘뭉침(ingathering)’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상에 기반한다.(최창모 저 ‘중동의 미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참조.)

19세기 말 본격화한 시오니즘 운동은 2차대전의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더 맹렬해졌고, 이런저런 곡절을 거쳐 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실현됐지만, 헤르츨의 이상은 국가 건설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종교 이데올로기이기도 했다. 민족의 뭉침을 방해하는 온갖 사상들(이를 테면 자유주의)이나 물리적 제약들(예컨대 협소한 영토문제)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시오니스트에게 보편인권과 자유ㆍ정의ㆍ휴머니즘 같은 근대적 가치는 저 바빌론의 시대서부터 이어져 온 신의 지침 안에서만 대접 받는다. 이스라엘 독립선언문이 “모든 이웃 국가들과 그 국민들에게” 제안한 “평화와 우호, 협력과 유대”도 근본적으로는 내 편에게만 유의미하다.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이라고도 불리는 48년의 1차 중동전쟁부터 근년의 가자 전쟁(Gaza War)까지, 분쟁은 빼고 국제 사회가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만 10여 차례를 치렀다. 온전한 뭉침을 위해 전쟁을 하고 전쟁을 위해 더 굳게 뭉치는 저 시오니즘의 증식회로 안에서, 이스라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민족) 구심력과 장악력을 발휘해왔다.

엘리 아비비(Eli Avivi)는 그런 이스라엘의 히피였다. 그는 건국 직후인 50년대 초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시오니스트 국가권력에 맞서, 히피들의 선량한 미덕이라 할 만한 자유와 평화, 탈권위, 억압 없는 사랑과 게으름을 추구했다. 국가의 압력과 알력에 맞서던 끝에 자신의 여권을 찢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71년 레바논 접경의 빈 마을 아크지브(Akhziv)에 초소형국가(micronation) ‘아크지브랜드’를 수립, 스스로 대통령이 됐다. 자칭 “오만의 술탄에 이은 중동 최장수 권력자”로서, 중동 국가로는 유일하게 단 한 번도 무력 분쟁에 개입하지 않은 ‘업적’을 남긴 그가 5월 16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향한 유대인의 ‘알리야(이주)’는 시오니즘의 확산과 함께 본격화해, 1882년 2만4,000명에 불과하던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숫자는 48년 63만 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당시 아랍-팔레스타인 인은 약 2배인 118만 명이었다. 그 해 아랍 연합군과의 전쟁(1차 중동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이스라엘 첫 총리가 된 다비드 벤구리온(1886~1973)은 이듬해 7월 ‘귀향법(이민법)’을 제정하며 “유대인의 귀향권은 국가보다 우선한다”고 선언했다. 벤구리온은 ‘마법의 양탄자 작전’(예멘 유대인 4만5,000명 비밀 집단 이송 작전)’ 같은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공세적 이민정책으로 민족의 뭉침에 총력을 기울였고, 그 기조는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있다. 2013년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전체 인구(2018년 기준 844만 명)의 75%, 아랍계는 21%다.

엘리 아비비는 나치 집권 이전 순수 시오니즘의 이상에 부푼 ‘호베베이 시온(시온의 예찬자들)’의 이민 행렬 끝자락인 1930년 이란 케르만샤(Kermanshah)의 유대인 부부에게서 태어났다. 일가는 아비비가 2살이던 32년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지중해 연안도시 텔아비브(Tel Aviv)로 이주했다. 당시 영국의 유대인 정책은 오락가락했고, 팔레스타인 이민을 불허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들에게 영국은 독립국가 건설의 걸림돌이었고, 일부 청년들은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해 영국에 맞서기도 했다. 아비비는 “청소년 시절 나는 악동이었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철도 레일에 장애물을 갖다 놓고 영국인들의 철도 운행을 방해하는 등 사보타주를 벌였고, 그 때문에 여러 차례 군인들에게 붙들려 재판을 받기도 했다. 다행히 아버지가 판사와 친분이 있어 벌금형으로 풀려났다”고 말했다.(goworldtravel.com) 아버지의 직업은 알려진 바 없다.

그는 15세 되던 45년 이스라엘 국방군의 전신인 민병대 조직 ‘하가나(Haganah)’의 해군부대 팔-얌(Pal-Yam)에 입대했다. 주요 임무는 유럽의 유대인 ‘불법’ 이민자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거였다. 47년 영국이 발을 빼고 이듬해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뒤 그의 부대는 국방군으로 흡수됐다. 하지만 국가보다 바다를 더 좋아하게 돼버린 그는 원양어선의 어부로 취직해 약 4년 간 북해서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지중해와 북대서양을 누볐다. 선박 수리 차 약 1년간 런던에 머문 적이 있다지만 당시는 히피 문화가 똬리를 틀기 전이었고, 그로선 전후 런던의 어수선함이 그냥 불편했을 것이다. 그는 시절 탓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구 주류 히피문화의 세례도 받지 않은, 기질적ㆍ자생적 히피였다.

아크지브는 이스라엘 북단 레바논 접경의 지중해 연안 마을이자 엘리 아비비가 세운 아크지브랜드의 '영토'다. 국기(아래)는 인어와 마을의 오래된 건물(박물관)을 모티프로 아비비가 디자인했고, 국가는 지중해의 파도소리다. 위 사진은 문패나 다름없는 도로안내표지판.

아비비는 52년 이스라엘에 입국해 최북단 아크지브에 정착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산 하나만 넘으면 적국 레바논이고 동쪽으로는 갈릴리의 산들이 버티고 선 곳이다. 남쪽으로 약 16km 아래에는 유네스코 종교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항구도시 아코(Akko, Acre)가 관광객을 유인해버려 아크지브는 천혜의 은둔지라 할 만했다. 마을에 살던 아랍인 주민 1,000여 명은 전쟁 통에 모두 떠난 뒤였고, 마을 서쪽 드넓은 지중해는 그의 프라이빗 비치였다.

그는 놀고 먹고 자고, 배고프면 물고기 잡고, 빵이 필요하면 낚은 생선을 인근 집단농장(키부츠)에 팔아 돈을 마련하는 식으로 혼자 근 10년을 살았다. 물론 그 사이 친구들이 놀러 오고 관광객이 잠깐씩 머물기도 했을 것이다. 50~60년대 배우 소피아 로렌(Sophia Loren, 1934~)이 휴양차 찾아오곤 했고, 영화 ‘영광의 탈출(Exodus, 1960)’을 촬영하던 무렵의 배우 폴 뉴먼(Paul Newman, 1925~2005)도 자주 들렀다고 한다.(bbc.com) 70~90년대 세 차례 총리를 지낸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3~2016)도 아크지브를 사랑한 명사 중 한 명이었다. 아비비는 60년대 초 휴양 삼아 놀러 온 17년 연하의 리나(Rina)와 결혼했다.

국방부가 군 기지를 건설할 거라며 퇴거를 명령한 건 그가 정착하고 얼마 안 된 때였다니 50년대 중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국방의 명분 앞에 불법 거주자(Squatter)의 권리란 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지 미지수지만,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그가 총리에게 탄원서를 썼고, 벤구리온이 그의 뜻을 수용해 군 명령을 철회하게 했다고 한다. 아내 리나는 아비비가 정보기관 ‘신베트 Shin-Bet’의 비밀 정보원으로 활동하는 조건으로 계속 머물 수 있었다고 전했다.(bbc, 위 기사) 그가 건국 전 ‘팔-얌’ 대원으로서 유대인 이주작전에 들인 노고를 평가 받았을 수도 있고, 더 나은 군 기지 후보지가 생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위기를 넘긴 뒤부터 그는 예전 주민들이 버리고 간 ‘골동품스러운’ 집기들을 일삼아 모아 마을의 그나마 번듯한 건물에 진열하기 시작했다. 잠수해서 바다에 가라앉은 것들을 주워 모으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그 물건들로 이른바 ‘아크지브 역사박물관’을 만들었고, 관광객 숙소용 오두막도 여러 채 지었다. 그렇게 그는 마을에 대한 자기 지분을 키워갔다.

63년에는 그의 해안과 마을을 포함하는 국립공원 조성 계획이 섰다. 다시 정부의 퇴거 명령이 떨어졌고, 불도저들이 들이닥쳤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담장 위에 서서 그 장면들을 촬영하며 저항했고, 무너진 담장에 깔려 뼈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었다.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를 편드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는 유명해졌고, 곡절 끝에 그의 마을은 공원 계획에서 제외됐다. 그는 다시 승리했다.

1970년대의 리나 아비비 Achzivland 페이스북

71년 여름 이스라엘 군 당국은 방위 목적의 해안 철조망을 설치하며 아비비의 주거지 일대를 에워싸 버렸다. 걸어서 2분 거리인 바다로 자유롭게 못 나가게 된 거였다. 그건 그 해 1월 1일 밤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 6명이 이스라엘 해안 경비망을 뚫고 아크지브로 침투, 아비비 부부를 납치하려던 사건 때문이었다. 게릴라들은 리나가 권총으로 저항하는 사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에 의해 진압됐다. 훗날 리나는 “언론 보도가 통제된 가운데 군 병력이 아크지브로 몰려가는 걸 본 사람들 중에는 마침내 이스라엘이 아크지브랜드와 전쟁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당시의 아크지브는 독립국가 선언 전이었다.

목숨만큼 소중한 자산이자 생계 터전인 바다를 잃게 된 아비비 부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스라엘 여권을 찢으며, 23년 전 이스라엘이 그랬듯, ‘아크지브랜드’라는 국명으로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국제관습법과 몬테비데오 조약이 요구하는, 영토(약 1만4,000㎡)와 국민(아비비 부부와 고양이와 개)과 정부(대통령제 민주공화국)를 지닌 주권국가 선언이었다. 그는 “전쟁이 아닌 정신으로 그 땅을 점령”했으며 “국가 이념은 평화와 사랑”이라고 주장했다.

부부는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법원은 허가 없이 독립국가를 수립했다고 죄를 묻는 법 조항은 없다며 10일 만에 그들을 석방했다. 대신 여권을 찢은 데 대해서만 1리라의 벌금을 물렸다.(telegraph) 그리고 국가와의 99년 장기 임대 계약을 맺어 바다 접근권을 보장 받을 것, 지방 정부는 마을과 연결되는 간선도로에 안내표지판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표지판에는 지명(Akhziv)도 국명(Akhzivland)도 아닌, 주민 이름(Eli Avivi)이 문패처럼 새겨졌다.

말년의 그는 BBC 인터뷰에서 이스라엘 정부와 벌인 평생의 대결을 ‘일종의 전쟁(a kind of war)’이었다며 “나는 반 이스라엘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이스라엘이란 공간을 사랑하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왜 여기 이렇게 사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bbc.com)

이스라엘의 종교유적도시 아코(아크레)와 아크지브랜드 사이의 이스라엘 해안국립공원 '아크지브' 풍경. 위키피디아.

이스라엘 정부는 물론이고 세계 어느 국가도 인정하지 않지만, 아비비와 그의 동조자들에게 아크지브랜드는 국가였고, 특히 70년대 전세계 히피들에겐 영혼의 조국이자 이상향이었다. 이듬해 여름 그들은, 우드스탁을 본뜬 ‘아크지브랜드 락페스티벌을 개최, 수천 명이 몰려들면서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기도 했다. 행사 프로듀서였던 메이어 코틀러(Meir Kotler)라는 이는 2009년 다큐멘터리 ‘Achziv, a Place for Love’에 출연해 “이스라엘 시민 모두가 모여든 듯했다. 벌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가뜩이나 못마땅해하던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행사는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

‘초소형국가(Micronation)’는 전 세계에 약 50여 개쯤 존재한다. 특정 이념과 가치를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건국되기도 하고, 한국의 ‘나미나라’처럼 관광 리조트의 특별한 상품성을 부각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만우절에만 국가가 서는 리투아니아 ‘우주피스공화국’처럼 재미난 곳도 있고, 국제 이주의 자유와 낙태 및 안락사의 권리를 웅변하는 호주 사우스웨일즈 ‘아틀란티움 제국(Empire of Atlantium)처럼 진지한 곳도 있고, 시한부의 아크지브랜드처럼 비장한 곳도 있다. 아크지브랜드의 국기는 마을 의사당(전 족장의 집)을 배경으로 누운 토플리스 인어이고, 국가(國歌)는 언제나 변화무쌍하게 울려 퍼지는 지중해의 ‘파도소리’다. 영속의 염원이 거기 담겨 있다.

드물게 아크지브랜드를 국가로 ‘인정’한다는 여행매체 ‘론리 플래닛’은 2009년 “잡동사니(raggle-taggel)들과 쇠락한 건물들, 초록빛 야영장, 은빛으로 찬란한 지중해 앞바다와 널따랗지만 온갖 장신구들로 어수선한 ‘국립’박물관”(news.com.au)이 있다고 소개했다. 와이파이도 없고 실내 화장실도 없는 만큼 숙박비도 저렴해서, 한 여행사이트에 따르면, 방갈로의 경우 1박 34달러, 캠핑사이트는 18달러(기준 연도는 불확실)를 내면 된다고 한다. 아비비 부부는 그 수익과 박물관 입장료, 아랍계 신혼부부들의 웨딩촬영 장소 이용료를 받아 생활했다. 입국자의 여권에 도장은 찍어주지만 입국료는 없다. 아비비가 노쇠해진 뒤론 리나가 투숙객에게 이런저런 노역(잔일)을 시키기도 한다. 아크지브랜드는 히피들도 노동하는 유일한 국가다.

2015년 BBC 인터뷰에서 그는 권력 승계와 관련 “아무런 계획이 없다. 내가 떠난 뒤 아내가 선택할 것이다”라고 말했고, 리나는 “역대 최고의 대통령”인 아비비의 영구 기념 공간으로 이 마을이 지켜지길 바란다는 희망을 전했다. 이스라엘의 시인 겸 저널리스트 로이 아라드(Roy Arad)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아비비는 전사이자 연인이었고, 자유로운 영혼(bohemina)이었다”며 “아크지브랜드가 자본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처럼 유지될 수 있도록 적절히 관리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abc.net.au)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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