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손호철의 ‘현대 한국정치’

이론ㆍ실천 겸비한 정치학자
서구 정치 이론과 방법론 통해
한국 정치 역사ㆍ현실 비판적 독해
사회문제 대한 ‘조기 경보’ 역할

한국 정치와 마르크스주의
보수ㆍ진보 정치균열 정상화하고
약자와 함께하는 사회운동 통해
진보세력의 혁신 모색 줄곧 강조
마르크스주의는 종말 고했나
체제와 이론 차원선 영향력 위기
‘자본주의 불평등’ 문제 의식은
현재 인류가 직면한 중요한 과제
지난해 12월 서강대 다산관에서 고별 강연을 하고 있는 손호철 교수. 정장을 할 법도 하건만, 학생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학교 점퍼를 휙 걸쳤다. 그는 좀 '쎄' 보이더라도 진보 정치학자로서 일관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후배들에겐 더 나은 사회를 물려주지 못해 하염없이 미안하다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현대 한국 지성사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기원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사상은 물론 사회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상의 측면에서 문학평론가 임화의 계급문학론과 경제학자 백남운의 사회경제사 분석은 당대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한 담론 및 연구였다.

광복 이후 펼쳐진 해방 공간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다시 한 번 분출했다. 하지만 이내 냉전분단체제가 형성되고 공고화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공적 담론의 장에서 사실상 불허됐다. 마르크스주의가 학문적 시민권을 회복한 것은 1987년 이후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에 기여한 지식인들 가운데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은 경제학자 김수행과 윤소영, 정치학자 김세균과 손호철, 사회학자 서관모와 이진경이다. 이들은 칼 마르크스 사상에 기반한 정치경제학, 국가론, 계급론 등을 펼쳐 진보적 사회과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 여기서 다루려는 이는 손호철이다. 손호철을 주목하는 까닭은 세 가지다.

첫째, 손호철은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진보 정치학을 대표하는 사회과학자였다. 둘째, 손호철은 ‘분단체제 논쟁’에서 ‘한국체제 논쟁’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논쟁들에 적극 개입하여 한국사회 이해를 풍성하게 했다. 셋째, 손호철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결합을 추구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상임공동의장 등을 포함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활동은 민주화에도 작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논쟁의 한가운데에서

손호철은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오스틴)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에서 오랫동안 가르쳐온 그는 제도화된 아카데믹 정치학과 실천적인 진보 정치학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이론과 분석을 체계화해 왔다.

손호철 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자원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니코스 풀란차스의 정치이론이다. 특히 그리스 태생의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 풀란차스가 손호철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자본주의 국가 이론을 정립하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적극 결합시켰던 풀란차스의 정치이론으로부터 손호철은 지적 영감과 실천적 통찰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손호철 정치학의 미덕은 서구의 진보 정치이론에 입각해 한국의 정치 현실을 치밀하게 분석해온 데 있다. 이러한 연구의 결실이 ‘한국정치의 새 구상’(1991)에서 ‘촛불혁명과 2017체제’(2017)에 이르는 일련의 저작들이었다.

손호철의 대표작 '현대 한국정치'. 한국 정치를 두고 그가 뛰어들었던 여러 논쟁들이 한데 모여 있다. 이 자체가 한국 진보정치의 성과이자 동시에 고민이다.

2011년에 나온 ‘현대 한국정치’는 손호철의 대표 저작이라 할 만하다. ‘이론, 역사, 현실, 1945~2011’이 그 부제다. 이 책은 ‘해방 50년의 한국정치’(1995)를 바탕으로 한, 저자 자신의 표현대로 ‘손호철의 한국정치 연구 종합판’이다. 이론적 탐구와 실증적 연구를 겸비한 뛰어난 저작이다.

‘머리말’에서 손호철은 말한다. “이 책은 저의 진보적 이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흔히 ‘민중사관’이라고 부르는 진보적 시각에 기초해 한국 현대정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손호철이 전하려는 것은 한국사회의 비판적 독해를 통한 한국사회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조기 경보라고 할 수 있다.

손호철의 학문적 기여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참여한 일련의 논쟁들이었다. ‘현대 한국정치’는 그가 개입했던 논쟁의 주요 논문들을 싣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분단체제 논쟁에서 분단의 영향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고, 시민사회 논쟁에서 시민사회론이 계급적 요인을 간과한다고 지적했으며, 민주화 이론에 대한 다각적 검토를 통해서는 ‘타협에 의한 민주화론’이 갖는 문제들을 비판했다. 또한, 한국체제 논쟁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사회가 ‘97년 체제’로 전환됐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논쟁들에서 손호철은 자신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추구한 진보 정치학자였지만, 정치 현상에 대해선 세계체제와 한국사회, 정치와 경제, 구조와 행위, 일반성과 특수성을 모두 고려한 과학적 연구를 강조했다. 그는 서구 정치이론 및 방법론에 밝았고, 이를 재구성한 이론 틀을 기반으로 해 한국정치의 역사와 현실을 분석했다. 세련된 이론 구성과 엄밀한 경험 분석을 통해 손호철은 한국 진보 정치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한국정치의 과제

지난 2월 손호철은 정년퇴임과 함께 이매진 출판사에서 네 권의 책을 동시에 내놓았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정치’, ‘유신공주와 촛불’, ‘즐거운 좌파’가 그것이다. 이 책들을 포함해 앞으로 그는 총 16권으로 이뤄진 ‘손호철의 사색’ 시리즈를 출간하겠다고 약속했다.

정치학자 손호철은 정년퇴임 뒤 모두 16권의 책을 낼 예정이다. 진보의 혁신, 그가 쥔 화두다.

이 가운데 ‘유신공주와 촛불’의 말미에는 손호철의 서강대 고별 강연인 ‘마르크스주의, 한국 예외주의, 시대의 유물론’이 실려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그의 학문적 토대를 이룬 이론이라면, 한국 예외주의는 그의 전공인 한국정치가 갖는 역사ㆍ구조적 특징을 지칭하는 담론이다. 그리고 시대의 유물론은 시대와 역사에 구속 받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봄으로써 후학들에 전달하는 삶의 메시지다.

고별강연인 만큼 이 강연에는 손호철의 정치적 소망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지역주의를 넘어서 보수 대 진보의 정치 균열을 정상화하고,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선거제도 등의 정치 개혁에 주력하며,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는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을 포함한 진보 세력의 혁신을 모색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러한 소망은 긴 학문적 여정에서 손호철이 도달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아카데믹 원칙에 충실한 이들에겐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추구하는 손호철의 진보적 경향이 불편할 수 있다. 더하여, 한국적 이념구도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는 이들에겐 더불어민주당을 자유주의 세력으로 파악하는 손호철의 정치적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계급적 요인을 중시하고 엄밀한 분석을 강조한 손호철의 학문적 입장과 한국사회 변화에의 정치적 개입을 촉구하는 그의 실천적 태도는 진보적 지식인의 한 모범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미래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에서 진보적 사회과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이론으로는 민족주의, 마르크스주의, 케인스주의, 시민사회론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유별났다. 마르크스주의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비판, 계급해방과 인간해방의 추구,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결합을 부각시켰다.

돌아보면,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는 ‘이론’, ‘운동’, ‘체제’의 세 차원에서 존재했다. 손호철은 말한다. “현실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있다면, 변혁적 노동운동 등 운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있습니다. 또한 몰락한 소련과 동유럽 등 현실사회주의와 같은 체제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있습니다.”

손호철이 지적하듯, 21세기 현재 마르크스주의는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 체제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종말을 고했고,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운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또한 위기를 겪고 있다. 하지만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해서 마르크스 사상의 유효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 사상의 현재성을 주목한 이는 영국 경제학자 메그나드 데사이다. 데사이는 자신의 저작 ‘마르크스의 복수’에서 19세기 마르크스가 연구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자본주의의 역동성, 사회 불평등의 강화, 물신화된 현대 문명이 21세기 우리 인류가 직면한 중요한 현실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오늘날 신념과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지난 20세기와 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더 이상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제기한 자본주의의 불평등은 갈수록 중대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자신의 저작 ‘21세기 자본’에서 “2010년대에 접어든 오늘날, 필경 사라진 듯했던 부의 불평등이 역사적 최고치를 회복하거나 심지어 이를 넘어서는 수준에 다다랐다”고 경고한다.

마르크스의 실천적 해법과 정치적 전략이 잘못됐다는 것은 지난 20세기의 역사가 증거한다. 그러나 사회 불평등 해소에 대한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진보적 사회과학의 미래에서 여전히 중요한 과제를 이룬다. 사회 평등의 실현과 이를 바탕으로 한 인간해방의 추구는 진보적 사회과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최재천의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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