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이 8개월째인데 관련 피켓 하나 없느냐는 질문에 한종선씨는 “시위 때 피켓 드는 이유는 사건을 알리기 위함인데 이미 형제복지원 사건은 너무 잘 알려졌다. 국회만 움직이지 않고 있고, 그래서 지쳐 주저앉아 있다”고 말했다. 생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말들은 구체적이면서 시적(詩的)이다. 오대근 기자

오죽하면. 올 상반기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든 생각이다. 무릇 책은 시대를 비춘다는데, 제일 잘 팔린 책 제목이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교보문고 2018 상반기 베스트셀러 동향분석)이라니. “우리 사회의 70년 동안 유구한 전통은 갑질”이란 소설가 김훈의 말처럼, 무례한 사람들이 도처에 널린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사과하고 사과 받는 것,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이 녹록하지 않다 걸 체감하기란 어렵지 않다. 피해자는 대부분 약자이기에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기 위해 입을 떼는 과정부터 보기 드물다. 상황에 떠밀려 사과하는 경우에도 대부분 ‘어쩔 수 없었다’와 ‘그럴 줄 몰랐다’로 책임을 회피하는데, 그나마 사과의 대상과 용서의 주체를 헷갈리는 경우가 차고 넘친다. 직원에게 갑질하고 국민에게 사과하며 ‘역대급 공분’을 산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경우는 어떤가.

최근 이 사과와 용서에 관한 신선하면서도 근본적인 기준을 제시한 이를 만났다. 올해 진실의 힘 인권상을 수상한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다. 2012년 1인 시위를 통해 이 문제를 다시 수면 위에 올린 그는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8개월째 국회 앞에서 노숙 농성 중이다.

알려졌듯 형제복지원은 1976~87년까지 약 3,500여명이 강제노역, 구타, 성추행 등 인권유린을 당한 부산 지역 최대 강제수용 시설이다. 초등 2학년 때 그곳에 감금된 한씨는 1987년 폐쇄로 복지원을 나왔다.

2012년 한씨는 1인 시위를 하면서 국가에 “왜 우리를 끌고 갔는지를 알려달라”고 묻기 시작했는데, 2014년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로 배정되자 극렬히 반대하며 국회의원들에게 안전행정위원회로 재배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형제복지원이 당시 내무부 훈령으로 만든 시설이므로 해당 부처인 안행부가 사건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용서의 첫 조건이 정리된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하라.’ 진상규명을 원하는 애초의 요구에, 피해자 보상과 지원책까지 엮인 이 법안은 4년째 국회 계류 중이다.

신선하면서도 근본적인 제안은 용서의 두 번째 조건이다.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1인 시위와 단식과 국토대장정을 했던 한씨가 가장 걱정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국가가 정말 사과할 때다. 그러면서 함께 노숙 농성하는 최승우씨의 얘기를 꺼냈다. 1982년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던 최씨는 2014년 ‘그것이 알고 싶다’에 “메인으로 출연”했고, 그래서 그 자신 형제복지원 이슈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에 보상을 요구하는 최씨와, 사과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한씨는 사사건건 부딪쳤고 그 때문에 피해생존자 모임의 대책도 매번 꼬였다. 그랬던 최씨는 국토대장정을 계기로 한씨에게 그간 ‘무례’를 사과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건 두 사람의 그 다음 행보다.

한씨는 최씨가 자기를 힘들게 했던 부분을 구체적으로,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최씨는 사과한다. “예전에 형이 날 힘들게 한 부분을 계속 이야기 해줘요. 그러면서 내가 진짜 허심탄회하게 다 용서가 될 때까지 형은 계속 미안하다고 해야 된다고 말해요. 중간에 ‘할만큼 했잖아’하면 다 무너진다고. 계속 미안하다고 하라고. 그래야 먼 훗날 다른 사람이 형에 대해 뭐라고 할 때 내가 당신을 변호할 수 있다고. 그게 용서의 기준이라고. 특례법이 통과되고, 국가가 한번 사과했다고 쳐요. 용서할 준비가 안 된 나는, 그때 나는 뭐가 될까요.”

피해자가 ‘용서할 준비가 될 때까지’ 계속 사과하는 것. 광주민주화운동과 세월호 참사, 미투의 피해자, 가해자에게 이 ‘용서의 조건’을 적용하자. 그리고 피해자들이 ‘용서할 준비가 될 때까지’ 응원하자.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독일이 그러한 것처럼. 일본군 위안부ㆍ강제노역 피해생존자들에게 일본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이윤주 지역사회부 피플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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