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시간) 러시아 로스토프나노두 로스토프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2차전 대한민국과 멕시코의 경기. 1-2로 경기가 종료되자 장현수(왼쪽)와 이재성이 아쉬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심판이 레드카드를 꺼내 들자 스물 세 살의 젊은 선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경기 중 넘어졌을 때 상대 선수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고, 화를 참지 못해 발을 들어 종아리를 찬 게 화근이었다. 당시 영상을 보면 그리 거친 행동은 아니었지만 주심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보복행위를 금지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라 그는 퇴장 당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16강전에서 데이비드 베컴이 벌인 일이다. 결국 잉글랜드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승부차기 끝에 아르헨티나에 패했다.

“퇴장 선언까지의 60초는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시간이다. 경기장을 걸어 나오던 그 순간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었다.” 은퇴한 베컴은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결정적 장면으로 그가 누렸던 수많은 영광의 순간 대신, 이 퇴장 사건을 꼽았다.

유럽과 남미를 대표하는 강팀인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경기는 축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두 나라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을 벌인 ‘앙숙’이다. 또 잉글랜드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아르헨티나 마라도나의 그 유명한 ‘신의 손’ 득점에 막혀 8강에서 탈락한 악연이 있다.

우리로 치면 한일전과 같은 중요한 경기를 망쳤으니, 베컴에게 닥친 것은 지옥이었다. 영국 신문들은 “10명의 사자 같은 영웅들, 1명의 얼간이 녀석”이란 헤드라인을 달았고, 1면에 “베컴은 영국의 치욕”이라며 “다시는 국가대표가 돼선 안 된다”고 썼다. 베컴의 얼굴로 다트 판을 만든 신문이 등장했고, 그의 모습을 본뜬 인형은 팬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베컴은 경기장에선 증오에 찬 관중들의 적대감 속에 뛰어야 했고, 경기장 밖에선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동료 선수가 “외출할 때 방탄조끼와 헬멧을 착용하는 게 어떠냐”고 농담할 정도였다.

베컴의 아픈 과거를 들추는 것은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의 장현수 때문이다. 멕시코 전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뒤 당황하는 그의 표정에서 20년 전 퇴장당하며 어쩔 줄 모르던 베컴의 모습이 떠올랐다.

벌써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장현수의 국가 대표 자격을 박탈하라’, ‘입국을 금지하라’, ‘가족과 함께 추방하라’는 축구 팬들의 요청이 올라왔다. 인터넷은 장현수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공간이 된 지 오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수를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팬들이다. 베컴은 그의 자서전 ‘마이 사이드’에서 “축구는 단체 경기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며 “경기에서 패하면 책임을 혼자서 감당하는 선수가 있게 마련이고, 언론이나 일부 서포터는 역적을 항상 원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모두가 베컴을 역적으로 몰았을 때 소속팀 맨유 서포터들은 달랐다. 퇴장 사건 이후 두려움 속에 출전한 첫 경기를 베컴은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코너킥을 찰 때마다 수 천명의 홈팬들이 일어나 환호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내게 그처럼 의미 있는 게 어디 있을까.” 베컴은 그 해 맨유가 트레블(리그ㆍFA컵ㆍ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며 보답한다.

장현수도 베컴처럼 증오가 가득한 팬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길 바란다. 그런데 그저 열심히 뛰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졌지만 잘 싸웠다’며 실력이 부족한 선수들을 무조건 위로하는 건 옛날 이야기다. 월드컵 4강과 16강을 각각 한 차례씩 경험한 국내 팬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면 ‘밑도 끝도 없는 투혼’ 보다는 세밀한 기술과 강력한 경기력이 필요해 보인다.

당장 월드컵이 끝난 뒤 장현수가 어떤 공포와 두려움을 갖고 그라운드에 서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경기장에 그를 응원하는 단 한 명의 서포터가 있다면, 베컴을 떠올리며 다짐하면 좋겠다. 슈팅 라이크 베컴!

한준규 디지털콘텐츠부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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