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대본은 낡아도 너무 낡았다. 그 유행가는 흘러도 너무 흘렀다. 짜증이 난다. 문화예술계에서 진부하고 상투적이라는 의미로 쓰는 ‘클리셰(cliché)’라는 프랑스어는 원래 인쇄소에서 사용하는 연판(鉛版)이었다. 연판은 수없이 같은 걸 찍어낸다. 판박이다.

요 몇 달 그 판박이를 하도 여러 번 봐서 하는 소리다. 출두 임박, 내일 출두, 오늘 출두···. 드디어 그 주인공이 포토라인에 섰다. 카메라와 마이크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다. 배반감이라고까지 말하지는 않겠다. 그저 귀에 못 박힌 그 말이 주는 무력감과 낭패감이 이젠 정말 싫다.

모범답안에는 딱 두 구절만 써있다. “(물의를 일으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와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조사를 받고 나올 때는 ‘하겠’이 ‘했’으로 바뀔 뿐이다. 그 사모님은 경찰에 출석했을 때 3분간 앞의 말은 7번, 뒤의 말은 3번 했다. 질문은 달라도 답변은 ‘기·승·전·죄송·성실’이다. 그의 작은 딸은 한 자리에서 ‘죄송’이란 단어만 6번 반복했다. 큰 딸의 대답 역시 4년 전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부인과 두 딸에 이어 포토라인에 섰는데 한 말씀 부탁합니다.”라는 민망한 질문을 받은 회장님의 답변도 이랬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딱 한 번 사모님의 답안지에는 어쩐 일인지 후렴이 있었다. 기자에 대한 생뚱맞은 덕담이었다.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언어에는 온도가 있다(이기주, ‘언어의 온도’). 언어란 사실 말고도 생각과 감정이 담긴다는 말이다. 그들의 말에는 온도가 없었다. 온도가 없기에 죽은 말이다. 그냥 발설일 뿐이다. 그 말은 이미 그 자리를 거쳐간 선배 거물들의 수많은 데자뷔(déjà-vu, 기시감)에서 사망 선고를 받아야 사실 마땅했다. 시쳇말(時體)도 못 되는 시체말(屍體)이다. 그저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진심도 아닌, 법리적 불리를 비껴가기 위한 언사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나는 그들과 리허설을 했을 똑똑한 변호사들이 제대로 비싼 수임료 값을 치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혐의는 인정하지 않되, 국민의 심려에 대한 죄송함은 완곡하게 표하고, 앞으로 법리 공방을 펼쳐야 할 검찰의 조사는 존중하는 척하는’ 그런 답안은 이젠 대학예비고사 시절 정답이다. 앵무새도 같은 말을 자꾸 시키면 싫다.

당신이 한 일로 소란스러웠던 이 사회에, 술자리에서 갑론을박했던 갑남을녀에게 속 시원한 한 마디 정도는 들려줘야 도리와 예의가 아닌가. 두고두고 회자될 경지의 말은 아니더라도 부와 권력을 가진 (적어도 특별했던) 자답게 뭔가 좀 특별한 게 있어야지, 그 언사는 정말 시시해도 너무 시시하다. 우리도 당신처럼 탐욕과 오만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 스스로를 성찰케하는 진솔한 한 마디라도 들었다면 연민의 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일가만을 콕 집어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한국에만 있다는 포토라인이 인권침해의 소지가 다분하고, 무죄 추정의 원칙에 어긋나고, 여론재판의 혐의가 있고, 가진 자에 대한 가학적 공분을 배설하는 자리가 돼버리고, 기자는 취재보다 취조에 가까운 질문을 쏟아 붓는다는 여러 지적도 생각해볼 문제다.

하지만 포토라인이 오늘도 내일도 만들어지는 한, 그 곳에 서실 나름 노블레스들께서 죄송과 성실 두 단어만 반복 학습된 앵무새가 되는 풍경은 이젠 그만 보고 싶다. 그럴 바에야 법조계와 언론계의 합의에 따라 포토라인을 없애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한 대통령을 파면시킨 그 여인이 한 말, “죽을 죄를 졌습니다.”, 사족 없는 그 말이 울림이 있다. 앞으로 누가 또 그 자리에 서실지 모르지만,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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