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석의 성경 ‘속’ 이야기] <35>모세,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동족 히브리인 노예들을
이집트서 구하라는 소명 준 후
돌연 하나님은 왜 죽이려 했을까
#모세가 할례를 안 받아서?
구약성서 가장 미스터리한 부분
신은 이해 아닌 믿음의 대상
3세기 시리아의 두라 유로포스 회당의 그림. 강에서 건져낸 모세를 묘사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어떤 숙소에 머물러 있을 때에,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출애굽기 4:24)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영웅, 모세에게 벌어졌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집트에서 핍박받던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어 탈출시킨 지도자였는데, 그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직전, 모세에게는 그런 당혹스러운 일이 있었다.

사실 그의 일생에 닥쳤던 죽을 고비가 한 번만이 아니었다. 크게 세 번이 있었는데, 처음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 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인의 아이로 태어났는데, 왕이 히브리 노예가 낳은 남자 아이는 다 죽이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차마 죽이지 못하고 키우다가 결국 갈대상자에 넣어 강에 띄워버렸다. 마침 이집트 공주가 목욕하다 발견하였고, 모세는 왕궁에서 자라게 된다.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지만 이 고비를 넘긴 후 역설적으로 노예에서 왕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인생반전이다.

모세가 겪은 세 번의 죽을 고비

두 번째 죽을 고비는, 분을 참지 못하고 이집트 사람 하나를 때려죽이고서 찾아왔다. 모세의 성격을 우울증이라고 분석한다. 왕자이니 자긍심이 꽤 높았을 것 같지만, 그에게는 예외였다. 아마도 자라면서 꽤 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자신은 이집트 사람일까 히브리 사람일까, 진정 왕자인지 사실 노예인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왕궁생활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다 어느 날 자기 혈족인 히브리 노예를 학대하던 이집트 사람 하나를 쳤다. 싸움도 해본 사람이 하지, 왕자로 곱게 자란 터라 그만 어설프게 주먹을 휘두르고 살인자가 되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했다. 히브리 노예 편을 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히브리인들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집트인을 죽였으니 자신들도 죽이려 하냐며 모세를 내친 것이다. 이집트 왕마저도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는다. 정체성을 찾고 싶었으나, 있던 정체성마저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 그는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땅으로 도망갔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전환이 찾아온다. 도망가 살면서 처량하게 양떼를 몰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 친족 히브리 노예를 이끌어 내라는, 어마어마한 소명을 부여한다. 모세는 신을 만나 잃었던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찾게 된다. 이집트의 왕자도 살인자도 아닌,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구원자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니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보였다. 하나님은 진정 다 아는 듯 했다. 자기가 히브리 노예에서 이집트의 왕자가 된 것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인생역전이 아니었다. 훗날 자신의 친족을 노예생활에서 구출하기 위한 이타적 섭리였다. 미디안 땅에서 무료하게 몇 십 년 동안 양떼를 이끌었던 것도, 훗날 이 곳에서 양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목자가 될 예시며 훈련이었던 것이다. 한 때 사람을 쳐 죽였다는 자괴감마저도, 이제는 한 민족을 살려내야 한다는 소명감을 더 크게 타오르게 하였다.

세 번 죽을 고비의 의미

모세의 인생 이야기는 종교적 정경에 담긴 교훈이기도 하다. 그의 첫 죽을 고비를 생각해보자. 인생에 그냥 ‘주어진’ 위기였다. 이 세상에 자신의 출생 조건을 결정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태어나 보니 검은 피부에 19세기 미국에 태어나기도 하고, 눈을 떠보니 입에 흙수저를 물고 21세기 한국서 태어나 있기도 하다.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인생의 조건은 운명처럼 주어질 뿐이다. 모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든지 넘어야 할 인생의 첫 고비이다.

두 번째 죽을 고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위기이기에 어쩌면 첫 번째 것보다 더 큰 고비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책망해야 한다.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박탈당할 위기다. 고비를 넘겨도 자살 충돌이 일어날 만한 뼈아픈 일이다. 이 또한 어느 누구에게든지 닥칠 수 있는 고비다. 극과 극은 만나는 것인지, 그러다가 모세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고는 인생 전체를 신의 섭리로 깨닫는다.

세 번째 위기는 정말 곤란하다. 신을 만나 인생의 새로운 청사진까지 받아서 새롭게 출발하려 하는데, 그만 그 신이 자신을 죽이려 든 것이다. 위대한 사명을 받고 실전에 돌입 할 준비를 하던 때였다. 미디안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내가 왕년에 이집트서 왕자였는데’ 하면서, 멀리 떠나기 전 가족들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 황당한 일인지. “모세가 길을 가다가 어떤 숙소에 머물러 있을 때에,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부싯돌 칼을 가지고 제 아들의 포피를 잘라서 모세의 발에 대고,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4:24-26)

얀 밥티스트 위닉스의 1640년 작품. 할례를 하지 않아 죽을 위기에 놓인 모세와 그의 가족.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분분하다.
가장 논란 많은 세 번째 위기

구약성서 전공자들이 뽑는 성서의 가장 미스터리한 본문이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민망하게도 모세는 할례를 받지 않아서 죽임을 당할 뻔 했다. 아내가 차마 남편의 것은 건들지 못하고 애꿎은 아이의 것을 베어다가 어설프게 얹어 놓은 것인데, 모세는 목숨을 구한다. 지난 2,000년간 어느 누구도 만족할 만한 해석을 제시하지 못했다.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겨두라는 계시 일 수도.

신을 만나 인생의 근본적인 전환을 맞고, 하나님이 부여한 소명에 전체 인생을 걸었던 자에게 벌어진 위기가 바로 이 세 번째 고비다. 두 차례나 인생의 큰 고비를 넘어 보았으니, 이제 인생에 대해 뭔가 한 마디 할 수 있을 법한 인생의 대선배에게 벌어진 일이다. 마치 그 입 다물라는 하늘의 경고인지. 크게 진땀 빼고 나서, 모세는 그의 인생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구원’이라는 성서의 가장 핵심적 신학을 각인시킨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그 이야기는 성경의 ‘출애굽기’ 혹은 ‘탈출기’(Exodus)에 담겨있는데, 읽는 것이 싫으시면 월트 디즈니사가 만든 ‘이집트의 왕자’를 보시면 된다.

유독 하나님은 모세를 모질게 다루었다. 세 차례 죽을 고비도 그렇지만, 험한 노예들을 이끌고 사막에서 40년간 지내게 하셨다. 징그러울 정도로 말을 듣지 않는 백성이었으며, 결국 노예근성을 벗지 못한 탈출노예 1세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막에서 다 죽는다. 참으로 황망한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 하나님은 정작 모세는 들여보내지 않고 죽음을 맞게 하셨다. 그 땅에 들어갈 축복을 누릴 자가 단 한 명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모세이어야 할 텐데 말이다. 백성들 앞에서 성질 한 번 부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고 ‘지도자’ 모세는 탈락하였다. 의외로 모세는 자기의 마지막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을 한 번 크게 겪어서였을까?

하나님의 일, 알지 못한다

성서의 전도서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혹 지혜 있는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도 정말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8:17)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마지막으로 깨달았던 바가 있다면 바로 이 사실이 아니었을까? “바람이 다니는 길을 네가 모르듯이 임신한 여인의 태에서 아이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네가 알 수 없듯이,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는 알지 못한다.”(11:5)

너무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은 이렇다 저렇다 쉽게 단정 짓는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이해 속에 파악되는 순간 더 이상 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신으로 존재하려면, 인간 이해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인간이 노력하여 신을 규정할수록 그 신은 더 작아질 뿐이다. 초월과 신비가 없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늘 자기 이해의 영역 밖에 계셨던 분이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하나님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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