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17> 김우창의 ‘정치와 삶의 세계’

궁핍한 시대 ‘이성적 사회’ 꿈꿔 개인적 삶의 자율성 주목하면서 ‘다원적 사회와 공존’ 사유 펼쳐 1970~80년대 이채로운 지적 모험 외환위기 전후 사회현상 탐색 발전국가→신자유주의 전환점 세계화의 충격 인식하면서도 “삶의 작은 거점들 존중” 설파 21세기 인문주의 미래는 “개인은 약한 힘의 소유자이지만 자신을 초월하는 창조적 담지자” 인간은 ‘복합적 존재’임을 강조
궁핍의 시대, '심미적 이성'을 내세운 지식인 김우창은 우리나라 인문주의의 증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에서 주목할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작가와 문학평론가의 역할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설가 최인훈과 박완서, 시인 한용운과 김수영은 물론 문학평론가 이어령과 백낙청은 우리 지성사를 활기차고 풍요롭게 한 이들이었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이들 못지않게 우리 사상에 넓이와 깊이를 더한 지식인이었다.

김우창을 문학평론가로만 한정하기는 어렵다. 지적 활동을 문학평론으로 시작한 그는 문학ㆍ역사ㆍ철학을 포괄한 인문학자로, 정치와 사회를 분석한 사회이론가로, 그리고 환경과 예술까지 아우른 사상가로 나아갔다. 그의 저작 목록을 보면 김우창은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르네상스 지성인’, 다시 말해 ‘인문주의 사상가’였다.

인문주의(Humanism)란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좁은 의미의 인문주의는 14세기 이후 서양에서 등장한 르네상스 정신을 말한다. 이탈리아의 단테,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 영국의 토머스 모어 등 르네상스 지식인들은 그리스ㆍ로마 사상의 재발견을 통해 중세의 신본주의를 거부하고 인본주의를 주창했다.

넓은 의미의 인문주의는 이 르네상스 정신을 바탕으로 발전한 인간 중심의 사상, 즉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아두고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려는 사상의 흐름을 통칭한다. 서구 계몽주의 사상은 이런 광의의 인문주의의 전통 아래 놓여 있었다. 20세기 서구 사상을 대표하는 존 롤스, 미셸 푸코, 위르겐 하버마스는 바로 이 계몽주의의 적자들이었다.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이러한 서구 인문주의의 주체적 수용이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선 서구 사상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는 물론 한국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이 요구된다. 이 과제를 가장 탁월하게 성취한 지식인이 다름 아닌 김우창이다.

영문학자 도정일은 김우창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사유의 공간’에서 김우창의 사유 세계를 “고대와 근대와 현대가 서로 비추고 질문하고 응답하는 대화의 장이며, 우리의 궁색한 생각들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언제나 길잡이가 되어준 통찰의 등대”라고 평가한 바 있다. 결코 과장이 아닌 지극히 온당한 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외적이고 이채로운 지적 모험

김우창은 1936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 문명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고려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2015~16년 민음사에서 19권으로 이뤄진 전집을 출간했다. 전집의 주제는 문학과 역사 철학 예술 사회 정치 자연을 넘나든다.

모두 19권으로 정리된 김우창 전집. 민음사 제공

1960년대 이후 이른바 ‘진영 논리’가 두드러진 우리 지식사회에서 김우창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그의 문학평론은 민중문학론과 자유주의문학론의 이분법을 거부했다. 그의 사회비평 또한 보수와 진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이분법 너머에 있었다. 그는 구체성과 보편성이 공존하는 삶과 사회를 복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사유하려 했다.

김우창이 추구한 것은 ‘궁핍한 시대’에서 ‘이성적 사회’로의 전환이었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1977)은 김우창의 이름을 널리 알린 저작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초반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까지를 포함한 ‘궁핍한 시대’”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 ‘궁핍한 시대’는 1970년대까지 김우창의 시대 인식이었다.

이러한 궁핍한 시대에 김우창에게 빛을 안겨준 것은 이성이었다. 이성은 그의 사유를 지탱하고 심화시킨 열쇠말이다. 그는 이성의 양면성을 주목한다. 이성은 소외와 관료제 등 현대사회의 그늘을 낳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이성에 의지해 더 나은 사회를 모색할 수 있다. 궁핍한 시대에서 이성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김우창 사상의 거점은 ‘심미적 이성’이다. 심미적 이성이란 유동적인 현실에 밀착해 개인의 주체성을 이성의 질서 속에 손상하지 않고 위치시키는 것을 함의한다.

이렇듯 김우창은 개인적 삶의 구체성과 자율성을 주목하면서도 그것을 다원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와 공존시키려는 사유를 펼쳐 보였다. 이러한 사상적 고투(苦鬪)는 대학 안의 실증주의와 대학 밖의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사회를 양분한 197~-80년대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이채로운 지적 모험이었다.

김우창 인문주의의 성취

인문학 연구자가 아닌 사회학 연구자인 내 시선을 특히 끌었던 김우창의 저작은 ‘정치와 삶의 세계’다. 전집 13권 ‘정치와 삶의 세계’(2016)는 앞서 발표된 세 권의 책으로 이뤄져 있다. ‘정치와 삶의 세계’(2000), ‘자유와 인간적인 삶’(2007), ‘정의와 정의의 조건’(2008)이 그것들이다.

이 가운데 특히 2000년에 나온 ‘정치와 삶의 세계’는 1997년 외환위기 전후 사회 현상에 대한 김우창의 인문학적 성찰을 잘 보여준다.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를 재생산해온 조정 원리가 발전국가에서 신자유주의로 변화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김우창에게 중요한 사상가인 위르겐 하버마스의 이론틀에 따르면, 발전국가 시대에 국가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진행됐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시장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강화됐다.

김우창 전집 가운데 3권.

김우창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규범의 재정초(再定礎)다. 그에겐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이지만, 더욱 중요한 건 인간과 삶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다. 우리 삶을 이루는 합리성 도덕 예절 정치 지역공동체 세계화 그리고 환경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그는 이성적 사회를 위한 규범적 토대를 모색한다. 세계화가 가져온 충격을 정확하게 인식하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삶의 작은 거점들을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고 그는 설파한다.

이러한 김우창의 사상에 대해선 그의 저작들이 시민들이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도록 좀 더 쉬운 언어로 쓰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의 복합성에 대응해 사유의 복합성을 강조하는 그에게 이러한 글쓰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작들은 구절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어보는 게 좋다. 그 독서의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사회와 세계사회의 경계에 서서 개인과 사회, 구체성과 보편성, 한국과 세계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구해온 한 사상가를 만날 수 있다.

정치학자 최장집은 김우창을 ‘세계 최고 수준의 철학적 인간학자’라고 극찬한 바 있다. 독문학자 문광훈은 김우창 인문주의를 ‘이성적 사유의 현대적 가능성’, ‘내면성의 사회적 확산’, ‘반성적 사유의 교향악’으로 파악한다. 철학적 인간학을 바탕으로 이성적 사유와 이성적 사회의 가능성을 탐색해온 김우창의 인문주의는 현대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문주의의 미래

21세기에 들어와 우리 사회에선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대학사회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컸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중요하다. 현대사회가 낳아온 삶의 황량함과 외로움에 대한 자각이 하나라면, 최근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노동시장의 변동이 다른 하나다. 특히 후자가 가져온 퇴출의 공포, 조기 은퇴, 빈약한 노후 복지 등은 삶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 분석한 바 있는, 인간성을 부식시키는 신자유주의 현실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요청한다.

“개인 또는 개체는 극히 제한된 존재이고 약한 힘의 소유자이면서도, 스스로를 초월하는 창조적 힘의 담지자 또는 그 매개자이다. 또는 적어도 실존적 절실함에 있어서 개인은 삶이 일어나는 시점(時點)이고 지점(支點ㆍ받침점)이다. 그러면서 넓은 세계로 열려 있고, 그 열림은 더 나아가 경험적 세계 너머 초월적인 세계의 신비에까지 이를 수 있다.”

김우창이 전집의 서문 격인 ‘전집 출간에 즈음하여’에서 한 말이다. 김우창이 50여 년 동안 펼쳐온 사유의 한 결론이라 할 만하다. 약하지만 강한, 개인에서 시작하지만 세계로 나아가는, 경험에 구속 받지만 초월을 추구하는 그런 복합적인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인 셈이다.

앞으로 펼쳐질 21세기의 미래에서 사회 변화의 속도와 범위는 더욱 빨라지고 넓어질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변동은 바로 그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존재와 삶의 의미,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안겨줄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응답하려는 인문주의 정신은 자신의 고유한 계몽의 빛을 결코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리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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