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한국일보] 전남도청이 함락된 1980년 5월 27일 내신 기자들이 광주 도심으로 진출하는 계엄군의 탱크를 촬영하고 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시민군이 사수하던 전남도청이 함락된 날, 광주 도심으로 향하는 계엄군의 탱크. 그 위에 군인이 활짝 웃고 있다.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촬영했다가 최근 공개된 사진에 담긴 모습이다. 나는 5ㆍ18 사진을 많이 보아 왔지만, 주로 피해자의 비참한 모습이었고 계엄군의 표정을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이 웃음을 보고, 생각했다. 아, 이들은 즐겼던 건가.

5ㆍ18 때 광주를 누볐던 군인은 수천명. 명령에 떠밀려 진압에 나선 군인만 있었던 건 아니다. 여고생을 윤간하고(증언ㆍ기록으로 남은 성폭행 피해자 최소 6,7명), 길가에서 놀던 11살 아이를 쏴서 죽이고(전재수 어린이), 병원을 조준사격하고(전남대병원 관계자 증언), 양민이 탄 버스를 벌집으로 만든 뒤 죽은 여인의 가슴을 대검으로 찌르고 사체를 훼손한(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이들은 그 한 명 한 명이 과연 전두환씨보다 덜한 범죄자인가.

이들의 집단살해범죄는 지금도 처벌할 수 있다. 1995년 제정된 헌정질서 파괴범죄 특례법은 내란, 반란, 집단살해죄의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했고, 전두환씨는 이 법에 따라 무기징역을 확정(겨우 8개월 만에 사면) 받았다. 전씨도 5ㆍ18 부분은 5월27일 도청진압작전만 ‘내란목적 살인’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그 외 집단살해 사건들은 추가 기소가 가능하다.

또 다른 피해자였던 대다수 공수부대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그 속에 섞여 학살과 성폭행을 즐겼던 이들을 끝까지 추적해 처벌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말은 상징이 아니다. 소환하고, 체포하고, 구속하고, 법정에 세우라는 말이다. 5ㆍ18 당시 집단살해가 아닌 범죄(고문, 성폭행 등)는 특례법을 개정해야 처벌이 가능하지만, 못할 이유가 무엇 인가. 독일은 아직도 90세가 넘은 나치 부역자들을 추적해 처벌하는데 말이다.

특히 당시 현장범죄 중에는 가해자가 확실히 지목되는 사건도 있다. 전남도청 투쟁에 참여했던 김선옥씨(당시 전남대 음악교육학과 4학년)는 80년 7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에게 끌려가 65일간 구금돼 고문을 당했다. 그는 풀려나기 전 수사관이 여관으로 끌고가 성폭행했다고, 38년 만에 털어놓았다. 소령 계급을 달고 계장으로 불리던 수사관이었다고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에서 살아남아 이송된 두 명의 청년을, 저항도 하지 않고 부상당한 이들을, 처단하라고 명령한 현장 간부의 신원도 나와 있다. 11공수여단 소속 모 소령이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이들이 처형되는 과정을 지켜봤던 최영신씨(당시 특전사 중사)는 이미 1989년 자신이 목격한 것을 공개했다. 최근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그때 사살을 명령한 소령의 현재 모습이 나왔다. 그는 귀농해 약 1만m²의 포도밭을 운영하고 있었다. 포도밭 이야기를 하다가, “진급을 못해서 나도 피해자다”고 했다. 진급을 했으면 연금을 더 받았을 것이라고 했고, 5ㆍ18에 대해서는 “30년 됐잖아, 다 끝났잖아”라고 말했다. 당당했고, 설교하려 들었다.

나는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를 좋아하며, 과일가게에 진열된 포도를 볼 때면 고달픈 몸으로 찾아온 사랑하는 손님(동지였던 독립운동가 윤세주로 추정)에게 포도를 대접하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그런데 이제 포도를 보면, 5ㆍ18 학살자가 재배한 포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다니. 반성도 없고, 사죄는 더더욱 없으며, 처벌 한번 받은 적이 없는 학살자가 행복한 여생을 보내면서 재배한 포도라니. 우리 사회는 도대체 무엇을 허락하고, 용인하고 있나.

5월은 가고 6월이다. 5월 27일 최종 진압과 계엄군의 승리 후, 아직까지 그 승리는 유지되고 있다. 그들은 처벌받지 않고 평안하게 여생을 즐기면서, 무지한 우리는 그 포도를 먹으면서 말이다.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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