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람들

지난 21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여성프라자에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들을 만났다. 왼쪽부터 김여진 삭제지원팀장, 서승희 대표, 유승진 사무국장. 박지윤 기자

그들의 일상을 겨눈 렌즈는 어디에나 있었다. 출근길에 잠시 들른 지하철 화장실에도, 골목 건너 앞집의 창문에도, 지나가는 누군가의 손아귀에도, 어쩌면 지난 주말 머문 남자친구의 집 어딘가에도. 이름은 지워졌다. 사진과 영상에 등장하는 건 그저 살덩어리였다. 옆집 누나, 전 여친, 여동생이란 여성형 일반명사 앞에 더러운 수식어가 나붙었다. 서로의 기억 속에만 남았다 믿었던 사랑의 순간들이 벌개진 얼굴로 모니터 앞에 앉은 누군가의 변태 망상 속에서 ‘G컵녀’ ‘헌팅녀’라는 이름으로 무한 재생됐다. “여자가 몸을 그렇게 헤프게 굴렸으니 그 사달이 나지” “그러게 왜 짧은 치마를 입었어?” 무너진 여자들에게 세상은 말했다. ‘잘못은 조심하지 않은 너에게 있어.’

하지만 이대로 피해자들을 무너지게 할 순 없다. 명백한 범죄에 눈감을 수도 없다. 손가락질하는 국가 대신 발 벗고 나선 이들이 있다. 사이버 공간에 떠도는 ‘리벤지 포르노’를 삭제해 온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의 활동가들이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흡사 ‘국가기관’ 같은 이름이지만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비영리 시민단체다. 소라넷 폐지 운동 때부터 여성 인권 운동에 몸담아온 활동가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만들어진 곳이다. 사이버 공간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2월 문을 열었다. 지난해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몰카, 리벤지 포르노 완전 근절’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되면서, 이들 또한 국회와 정부부처를 활발히 오가며 정책, 입법 제안을 해왔다. 박지윤 기자
벼랑 끝에 선 여성들… 온 힘을 다해 지운다

“’국산 야동이 아니라 범죄 영상이다’. 오직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206명의 피해자들이 저희 단체의 문을 두드렸어요.” (서승희 대표)

벼랑 끝에 선 여자들의 표정은 절박했다. “지워도 지워도 계속 나와요. 끝이 없어요.” 센터를 찾은 피해자는 200여 명이었지만 활동가들이 지운 영상의 수는 수 만개. 한 개의 영상이 수백 개의 웹하드와 불법 포르노 사이트에 동시다발적으로 퍼져나가는 탓이다. “저희 업계 용어로 ‘국노(국산 노모자이크)’라고 해요. 일반인의 성관계 모습을 불법으로 담은 영상임을 뜻하는 말이에요. ‘골뱅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건 만취한 심신 미약 상태의 여성을 강간하는 영상이에요. 엄연한 범죄 증거물인데도 인터넷에선 이미 하나의 ‘취향’으로 소비되고 있죠.” 남성 커뮤니티엔 이런 댓글이 버젓이 달린다. ‘보고 그냥 거기서 끝이면 상관없지 않나? 애인 없는 사람은 성욕을 어떻게 풀라고 ㅋㅋ’

'1 Click is 2 Many' 한번의 클릭은 당신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피해를 부른다는 의미의 캐치프레이즈. 한사성 제공

“지난해 내내 낮엔 아르바이트를 뛰고 밤엔 핏발 선 눈으로 포르노 사이트를 뒤지며 모두가 무급으로 일했죠. 재정은 늘 마이너스예요. 지금도 외부 강의 나가면서 버는 돈을 몽땅 우리 단체로 ‘셀프 후원’하면서 버티고 있어요.”(유승진 사무국장) 그럼에도 그들을 버티게 하는 건 딱 하나. 피해자들이 마지막으로 내민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들뿐이라는 사명감이었다. 작은 사무실이 후끈했다. 다닥다닥 붙은 책상 위에 빈틈없이 자리한 컴퓨터는 열기를 내뿜으며 풀 가동 중.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기까지 필사적으로 뛰는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뼛속까지 문과였던 우리가 이젠 프로그램을 직접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준 IT 전문가가 다 됐어요. 피해 신고가 들어오면 영상에 달린 제목의 키워드를 여러 가지로 재조합 해 검색을 해요. 수십 개의 조합을 구글에도, 웹하드에도, 우리가 쓰는 크롤링 프로그램에도 넣는 거죠. 영상 링크를 찾아내는 족족 목록을 작성해서 운영자에게 삭제요청을 보내요.” 웹하드 사이트는 하루 이틀만 지나면 요청한 영상을 삭제해주지만 불법 포르노 사이트는 한사성의 아이디 자체를 차단해버린 채 모르쇠로 일관하기도 한다. “차단했다? 그럼 재가입해서 보내고. 공식 게시판에 올리고, 다른 계정 추적해서 보내고. 끝까지 해요. 될 때까지. 집요하게.” 이토록 독하게 매달려 하나하나 없애 나가도 완전히 엉뚱한 이름을 달고 다시 등장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워낙 재유포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처음엔 ’OO대 OO녀’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영상이 갑자기 ‘일본산 야동’으로 탈바꿈해서 다시 퍼지기도 해요.” 바퀴벌레 같다는 말이 딱이다.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완전히 없애지 않는 이상, 언제고 다시 무섭게 번식하는 바퀴벌레처럼 피해자들의 고통도 끊임없이 재생산돼 그들의 삶을 갉아먹는다.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에서 첫 번째 토크콘서트 <난 너의 야동이 아니야>를 개최한 한사성 활동가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와 영화감독 이랑 씨, 가수 오지은 씨가 참여했다. 한사성 페이스북.
구속수사가 이렇게 쉬운 것이었나요?

“피해자의 삶은 영상이 유포되는 그 순간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는데, 처벌이 안되거나, 솜방망이 처벌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죠.”(김여진 삭제지원팀장) 성폭력처벌법 14조에 해당하는 ‘카메라등이용촬영죄’의 1심 양형을 살펴보면 10명 중 7명이 벌금형을 받았고, 그 중 80%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이었다. 실형을 산 사람은 전체의 약 5%에 불과했다. 그나마 솜방망이라도 휘두르려면 적극적인 수사관을 만나는 천운이 따라야 한다.

“최근에 이런 사례도 있었어요. 전 남자친구가 영상을 직접 유포했다는 정황적 증거가 충분했는데도 경찰은 ‘내가 안 올렸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진술만을 증거로 인정했어요. 유포된 게시글에 피해자에 대한 성적인 모욕이 적혀 있었는데 그건 오직 연인 사이에서만 알 수 있는 정보였죠.” 피해 촬영물이 올라온 플랫폼이 해외에 서버를 둔 불법 포르노 사이트였기 때문이었다. 가입자의 정보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 가해자 특정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 국내에서 활발히 이용되는 불법 포르노 사이트는 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서버 업체에 호스팅 비용을 지불하고 운영하기 때문에 국내법의 적용을 받을 수 없다. “최소한 가해자로 추정되는 전 남자친구의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압수해서 해당 영상이 아직 남아있는지, 다른 곳에 백업하고 삭제한 다른 촬영물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그게 ‘수사’라는 겁니다. ‘나 안 했어요’라는 뻔한 얘기를 듣고 돌려보내는 건 수사가 아니죠.”

비슷한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는 전 남자친구의 주거지 압수수색을 요청했지만 경찰은 끝내 협조하지 않았다. 결국 벌금형을 선고 받은 가해자가 앙심을 품고 원본 영상을 2차로 유포하면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저희가 경찰들과의 간담회에서 줄곧 물었어요. 필요한 경우에 구속수사, 그게 그렇게 어렵나요? 그러면 ‘어디서 물정 모르는 애들이 와서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홍대 몰카 피해사건은 너무 빨리, 너무나 신속하게 구속 수사해주셔서 놀랐죠.”

지난해 5월부터 12월까지 약 7개월간 한사성에 접수된 피해 사례들을 전수 조사한 통계 자료. 피해자 10명 중 9명 이상이 여자였으며 가해자 중 대다수가 피해자의 전 애인이었다. 한편 피해자 중 절반을 훌쩍 넘는 수가 경찰 신고를 하지 않았다. 처벌 수위가 미약해 신고 의지가 꺾였거나 경찰의 2차 가해로 인해 신고를 시도하던 중 좌절된 경우가 많았다. 자료제공 한사성ㆍ그래픽 박지윤 기자

가해자가 여성, 피해자가 남성인 이 사건에서의 경찰 수사는 이례적이었다. 구속 수사, 현장검증에 이어 2차 가해 증거를 직접 수집하기까지 열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간 한사성이 수사 과정까지 동행했던 피해자들 중엔 피의자를 구속 수사한 경우가 단 한 건도 없었다. 경찰이 밝힌 구속수사의 원칙은 ‘사안이 중대하고 죄질이 무거우며 유포 행위로 인해 피해자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된 경우’다. “한 마디로 수사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다는 거예요. 가능성과 배신감을 느꼈죠. 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거였구나! 그러니까 그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구나. 게다가 이번엔 다른 포르노 사이트와 마찬가지로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워마드’의 운영자를 추적해서 처벌했잖아요. 수사는 어디까지나 경찰의 의지에 달린 문제라는 게 입증된 거죠.”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는 국민청원은 이틀 만에 20만 명을 돌파했고 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불법 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엔 1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한사성의 활동가들은 이보다 이틀 앞선 17일 사나운 빗줄기를 뚫고 경찰청 정문을 가로막은 채 목청을 높였다. “경찰은 여성의 목소리에 응답하라!”

지난 1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한사성 활동가들의 모습. 한사성 페이스북.
해외 서버라 수사 불가능? 그 나라에 법을 만들자

우리가 흔히 통칭해 부르는 ‘몰카’ 범죄엔 크게 두 갈래가 있다. 공공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의 치마 속을 찍은 유형과 남녀가 성관계하는 장면을 찍은 유형. 전자의 경우엔 현행범으로 체포할 때가 많다. 그 자리에서 잡지 못했더라도 수사가 크게 어렵지는 않다. 가해자가 찍힌 폐쇄회로(CC)TV와 각종 거래내역을 대조해보면 금방 검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찰들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범인을 검거할 수 있죠. 피해자들도 수치심보단 분노가 더 큰 상태라 수사 과정에 보다 적극적이고요.” 그렇다면 후자는 어떨까? “이미 여성이 누군가와 성관계를 했다는 것에 대해 주홍글씨를 새기죠. 동의 하에 영상을 찍은 경우엔 너도 책임이 있다고 몰아가고요.” 피해자의 자격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죄인이 된다. ‘그러게 왜 몸을 함부로 굴리느냐’는 힐난이 돌아오면 아무도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에 절망하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피해자 혼자 신고하러 갔을 땐 ‘가해자 거주지에 가서 하라’며 거부하다가 저희가 명함 내밀면서 동행하면 바로 받아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상습적으로 재유포하는 ‘헤비업로더’를 고발하면 신고내용이 너무 많다며 그냥 돌려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이젠 경찰에 신고 안 해요. 국민신문고로 직행하지. 위에서 처리됐다는 보고를 받아야 해서 경찰도 거부를 못하거든요. (웃음)”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의 피해신고 매뉴얼 중 일부. 경찰이 아닌 국민신문고를 통해 신고 접수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사성 제공

신고 반나절 만에 내사 종결을 하며 내미는 단골 핑계는 “해외 서버라 못 잡는다”는 것. 현재 미국 연방법엔 리벤지 포르노, 즉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이 없기 때문에 불법은 아니다. “경찰들은 ‘타국과의 수사 공조를 위해선 국제 정서까지도 고려해야 한다’고들 하시는데 답답해서 딱 잘랐어요. ‘아 됐다, 그럼 우리가 하겠다’고.” 오는 6월부터 한사성은 미국 내 비영리단체 ‘사이버시민권리구성(CCRIㆍCyber Civil Rights Initiative)과 연대해 보복성 성적 영상물 처벌 법안 입법운동을 진행한다. 서버의 본거지인 미국에 처벌조항이 없다면, 직접 만들어서라도 처벌을 하겠다는 것이다.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정부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아예 나선 거죠. 대만, 일본과도 진행 중입니다.” 국가가, 수사기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들이 백방으로 뛰고 있는 셈이다.

한사성은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국제 연대 사업을 벌인다. 해외 각지의 시민단체와 연계해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을 법적으로 금지하도록 하는 입법 캠페인을 펼칠 예정이다. 한사성 제공
“재유포자도 2차 가해자” 법망을 조인다

수사기관의 의지를 믿을 수 없다면 법조문이라도 촘촘하면 좋으련만, 이조차 갈 길은 멀다. 현행법상 영상이나 사진을 직접 촬영하거나 유포한 가해자는 성폭력처벌법의 적용을 받지만, 이미 유포된 콘텐츠를 내려 받아서 재유포 한 사람은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음란물 유포죄’로 처벌된다. 즉, 재유포자는 ‘성범죄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음란물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기준도 터무니없어요. ‘성기, 항문, 음모가 그대로 나오거나 노골적인 성행위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건데 만약 성기 부분에 모자이크를 했다, 그럼 처벌이 안돼요.” 피해자의 얼굴과 나체가 모두 적나라하게 공개돼도, 성기만 가려진다면 음란물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저희는 ‘재유포자도 2차 가해자다. 성폭력처벌법을 개정해 같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죠. 이들은 해당 영상이 엄연히 피해 촬영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유포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히 ‘가해의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허술한 법망이 방치되는 사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헤비업로더는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돌팔이 디지털 장의사가 웹하드 업체와 결탁을 맺고 노골적인 돈벌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알고 보면 하나의 사업체예요. 양쪽으로 돈을 버는 거죠.” 심지어는 검색어 필터링 업체도 연루돼 있다. ‘국노’라는 단어를 걸러서 검색이 안 되게 해야 하는데, 뒷돈을 받으면 은근슬쩍 필터링 시스템을 꺼주는 것이다. 범죄를 산업으로 이용해 먹는 삼위일체형 카르텔이다. “여기서도 법망이 허술해서, 제대로 사업자 등록만 한 업체라면 법적으로는 크게 문제 될 게 없다는 점이 심각해요.” 한사성은 내달 3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공식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얼굴 그 맞은편’(감독 이선희)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예정이다. 담담한 말투 속 중간중간 한숨이 이어지지만, 표정만큼은 결연하다. “불법성을 찾을 수 없다면, 고발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얼기설기 짜인 법망을 조이는 것도 이들의 몫인가 보다.

지난해 한사성이 다음카카오 같이가치, 사단법인 시민과 협력해 만든 청소년 인식 개선 소책자로 성황리에 배부됐다.(왼쪽) 올해 한사성이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함께 만든 <사이버성폭력피해자를 위한 안내서>.(오른쪽) 서울시 홈페이지에 E-book 형태로 무료 배포 돼 있다. 한사성 제공.
#세상을 #뒤집는건 #너와나 #우리모두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2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 폭발적인 분노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그간 페미니즘이 가장 격렬히 살아 숨 쉬는 현장에 있던 이들에게 물었다. “피부 위에 꽂히는 실체적인 불안이죠. 이 땅에서 나는 안전할 수 없구나.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공중화장실에서, 심지어는 사랑을 나누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조차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구나. 믿고 의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국가마저 ‘거기에 없었다’는 깨달음이 더해지면서 절망하는 거예요. 그게 분노의 에너지로 폭발한 거고요.” (서승희)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눌러쓴 채 “찍지마”를 외치던 여성들은 어쩌면 모두가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봅시다. 그의 집에서 성관계를 했을 때, 활짝 펼쳐져 있던 노트북 카메라가 반짝 빛났던 것 같아 불안해요. 너무나 합리적이지 않나요? 잠재적 불안은 이미 여성 모두에 대한 실존적인 폭력이에요. 여성들이 단순히 공감을 잘해서 연대하는 걸까요? 아니요. 우리 모두가 이미 이 지독한 불안의 피해자이기 때문인 거예요.” (김여진)

4월 7일 서울 마포구에서 열린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여한 한사성 활동가들. 한사성 페이스북

하지만 자칫 모든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 ‘이분법적 혐오 구도’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드러낸 우려엔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미 폭력이 만연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 폭력에 무감각했던 대다수의 감수성을 끌어올리는 데엔 당연히 ‘진통의 시간’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변화가 매끄럽게 이뤄질 수 있을까요? 새로운 시선과 문제제기는 늘 불편하죠. 거부감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봐요. 이런 치열한 논쟁도 결국은 진일보를 향한 성장통이 아닐까요.”

이들이 평가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지난 2년의 시간은 수많은 평범한 여성들이 운동의 주체로 진화하는 시간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건 ‘어느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판이 뒤집히는 건 결국 평범한 다수가 움직일 때죠.” 서승희 대표는 덧붙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커다란 변화가 적재적소에서 제대로 된 ‘디테일’을 찾아나가게끔 제안하는 거? 그 정도이지 않을까요.(웃음)” 과연 이들의 말대로 세상은 뒤집히고 있는 중일까. 이들의 페이스북 계정엔 이런 의미심장한 해시태그가 등장한다.

#불법촬영_피해자와_연대한다 #나는#너였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관련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치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