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에 관대한 대한민국] (상) 술병이 나뒹구는 공공장소

#1
지자체 지정 음주청정구역도
만취족들로 주민들 안전 불안
여대생 “편의점 앞 술취한 남성
함께 마시자는 말에 위협 느껴”
#2
공공장소 주취소란 5만원 범칙금
폭행 등 없으면 계도 수준 그쳐
지자체 조례는 소란행위 단속 초점
선진국처럼 음주 자체 금지해야
지난 2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한강공원에서 시민들이 술을 즐기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 치우지 않고 떠난 자리에 술병과 음식 쓰레기 등이 뒹굴고 있다. 배우한 기자

“짠!”

지난 21일 오후 8시,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린 서울 한강 여의도공원은 나들이객으로 왁자지껄했다. 공원 초입에서는 올해 스무 살이 됐다는 남녀 7명이 돗자리를 펴고 모여 앉아 한창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치킨 박스와 과자 봉지 사이로 보이는 건 소주 12병과 맥주 7캔. 얼굴이 붉게 물든 한 여성이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는데 몇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잔디밭에 풀썩 주저 앉았다. 이 여성은 술을 이기지 못한 듯 연거푸 구역질을 했고, 이를 보듬어주려던 친구도 술에 취해 다시 넘어지면서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공원 내 시민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잠시. 주저 앉은 여성을 뒤로 하고 다른 일행들은 다시 술잔을 들었다.

지난 20일 오후, 프로야구 팬들이 가득 찬 서울 잠실야구장에서도 주취자가 일으킨 작은 소동이 있었다. 이 경기는 외야석도 지정좌석제로 운영됐는데, 술이 얼큰하게 취한 한 70대 남성이 ‘입석’ 티켓임에도 좌석에 앉아 자리를 비키지 않고 있었다. 이 남성은 경비요원의 거듭된 안내에 도리어 “내가 왜 비켜야 하느냐”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경기 관람 흐름이 끊긴 주변 관중들이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고, 한 중년 남성은 황당해하는 경호요원을 “술 마신 사람이니 이해하라”며 다독였다.

최근 19년간 성실히 근무한 여성 소방대원이 술에 취한 시민을 구했다가 오히려 폭력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연달아 20년 경력의 70대 택시기사가 30대 만취(滿醉) 승객에게 맞아 숨지는 안타까운 일도 벌어졌다. ‘주폭(酒暴ㆍ술 취한 사람의 폭력)’ 범죄가 잇따르면서 주취 폭력에 시민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 경찰청에 따르면 2016년 발생한 7대 범죄(살인, 강도, 강간ㆍ강제추행, 절도, 폭력, 방화, 마약)의 25.6%가 주취자가 저지른 것으로 집계됐다.

부어라 마셔라 식의 술 문화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개선됐다지만, 여전히 관대한 것이 있다. 만취다. 언제 어디서나 술을 살 수 있고, 술을 마시는 것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술로 인한 범죄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음주규제는 선진국에 비해 지극히 미미한 실정이어서 공원이나 길거리, 경기장 등 공공장소에서 만취할 때까지 술판을 벌여도 시민들을 위한 안전장치는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일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경기가 끝난 뒤 관중들이 마신 맥주병이 뒹굴고 있다. 김지현 기자
절제 모르는 ‘만취족’… 공공장소도 점령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는 ‘만취족’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미국인 콜린브라운(30)씨는 “한국에 와서 제일 놀라운 것은 술 취한 사람이 길거리에 누워 있는 것”이라며 “미국은 길거리 음주를 규제할 뿐 아니라, 만약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면 도둑이 와서 소지품을 모두 가져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과 함께 ‘치맥(치킨+맥주)’을 즐기는 인파가 모인 한강공원에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만취족은 심심찮게 목격된다. 베트남에서 한국에 유학을 온 도희엔타오(23)씨는 “‘한강 치맥’이 유학생들의 로망 중 하나여서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는데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계단에 실신해 있거나 술 취한 남녀가 진한 스킨십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며 “(그런 모습들이) 한강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시가 조례를 제정해 ‘음주청정지역’으로 지정한 마포구 연남동 ‘경의선 숲길’도 만취족으로 몸살을 앓는 대표적인 장소다. 시민들을 위한 공원이지만 밤이면 거리마다 술판이 벌어지고 술에 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로 소란이 잦다. 이 공원 중앙에 위치한 편의점 매니저 권모(32)씨는 “매출의 70%를 주류가 차지할 만큼 술을 찾는 손님이 대부분이고, 만취 손님 때문에 곤란한 적은 너무 많아 특정한 사건을 꼽기 어려울 정도”라며 “얼마 전 공원 앞 도랑에 빠진 취객이 지나가던 사람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벌어지고 크게 다쳐 앰뷸런스를 부른 적도 있다”고 말했다.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해 자제력을 잃은 만취족은 때때로 ‘위협적인 대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대학생 임언주(22)씨는 “길거리를 지날 때 (편의점 앞에서) 술을 마시던 남성들이 얼굴과 몸매를 평가한다거나 ‘술 맛이 더 돈다’, ‘와서 같이 한잔 하자’며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며 “술에 취해서 나를 쳐다보는 것 자체로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등산을 즐기는 최미희(36)씨는 “지난해 여름 북한산을 올랐다가 등산로를 가로 막고 술을 마시던 취객들끼리 시비가 붙은 것을 목격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언덕을 구르는 바람에 나도 함께 넘어져 발목을 다쳐 깁스를 해야 했다”며 “술에 취한 사람들은 어디로 튈지 몰라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잇따르는 주취 난동… “막을 방법 없어요”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는 만취족 때문에 현장 종사자들도 속을 끓인다. 한강여의도공원을 관할하는 서울 영등포경찰서 여의도 지구대 관계자는 “접수되는 사건의 15% 가량은 주취자 신고”라며 “특히 한강공원에서는 자신의 주량을 모르는 청소년들이 실신할 정도로 술을 마셔 보호자에 인계해야 하는 일이 잦은데 주민등록증도 나오지 않아 지문 신원조회도 할 수 없어 난감하다”고 말했다. 잠실 야구장 경호담당 관계자도 “술을 먹고 흥분한 상태에서 욕을 하거나 경기장 난간에 기대 아찔한 상황을 만드는 취객을 1시간 당 1명꼴로 만난다”며 “폭행 시비가 붙는 등 심각한 난동이면 퇴장 조치를 하겠지만, 대부분 주의를 주는 데 그친다”고 말했다.

공공장소에서 음주소란으로 문제를 일으켜도 법은 관대하다. 현행 경범죄처벌법에 따르면 공공장소에서 주취소란을 벌이면 5만원의 범칙금을 처벌 받는데, 그마저 계도 수준에 그치는 게 관행이다. 경찰 관계자는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난동을 피워도 폭행 등 다른 사건으로 비화되지 않는 이상 입건하는 일은 드물다”고 말했다. 일선 공무원들의 단속 기준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난해 한강사업본부가 한강공원에서 실시한 과태료 부과ㆍ계도 등 단속 중 주취자 단속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한강사업본부 관계자는 “술을 마시는 일이 범법행위가 아닌 상황에서 무작정 단속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선진국은 음주규제 강화 추세

문제는 한국사회가 음주에 관대하다보니 절제하는 음주가 아닌 ‘만취’에도 관대해 각종 범죄로 이어진다는 것. 송선미 한국건강증진개발원 위촉전문원은 “대부분의 선진국은 시민들이 공공장소에서 만취에 이르지 않도록 사전 예방하기 위해 판매 장소나 음주 장소를 규제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최근 국립공원(등산)에서 음주를 금지하도록 법을 개정했지만 이 외에는 법적 규제가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공원이나 학교, 병원 같은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것조차 원칙적으로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선진국들은 이미 공공장소에서의 술 판매 규제에 나선지 오래다. 미국 뉴욕주는 1970년대부터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금지했고, 센트럴파크와 같은 공원에서 뚜껑이 열린 술을 가지고 있다가 적발되면 1,000달러(약 110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6개월 이하의 징역을 살아야 한다. 프랑스의 경우 공중장소에서 술에 취한 사람은 경찰이 가까운 이웃이나 안전한 장소에 유치시키고 그 비용은 취한 사람이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영국도 공공장소에서 음주로 인한 불쾌한 행동 시 최대 500파운드(약 72만원)의 벌금을 내고 체포도 가능하다. 음주량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진 러시아도 2009년부터 공공장소의 음주 및 판매를 완전 금지하는 ‘반알코올정책’을 도입해 술 소비량이 30% 감소하는 효과를 체감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서울 등 지자체에서 조례를 제정해 공원 등 공공장소를 ‘음주청정지역’으로 지정하고 있지만, 술을 마시는 행위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음주소란에 규제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민건강증진법에 금주 구역을 지정하거나 과태료를 부과하는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 보니 지자체가 금주구역을 조례로 지정해도 법적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워 단속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백주 서울시 시민건강국장은 “공공장소 음주 행위는 주변인들도 술을 마시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등 음주 조장 영향이 커 시민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 개선을 위해 윤종필 자유한국당 의원이 지자체가 금주구역 지정과 주류판매 금지 구역을 조례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한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서 별다른 논의 진전 없이 1년5개월 째 계류 중이다. 차전경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은 “해외의 경우 술이 타인에게 폐가 된다는 인식이 명확해 각종 규제가 생긴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음주에 관대한 편이어서 법 제정 논의도 활발하지 않은 것 같다”며 “음주로 인해 발생하는 폐해가 있는 만큼 이를 줄여나갈 방안들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이우진 인턴기자(숙명여대 법학과4)

정혜지 인턴기자(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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