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칼럼에는 최순실ㆍ라스푸틴ㆍ‘드루킹’이라는 호화 배역이 등장했지만 논설은 지루 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칼럼니스트의 글에는 네 가지 ‘i’가 있다고 한다. 첫째, 새로운 정보가 있다(imformative). 둘째, 지적 욕구를 충족시킨다(intellectual). 셋째, 흥미롭다(intersting). 넷째, 영향력이 있다(influential). 이 비결은 이봉수의 ‘중립에 기어를 넣고는 달릴 수 없다 – 진보언론연구’(이음, 2017)에 나온다.

이런저런 문헌에 나오는 라스푸틴에 대한 기술은 믿을 것이 별로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검색해 볼 수 있는 다음 (Daum)백과의 라스푸틴 항목은 사전이 아니라 소문을 짜깁기한 것이다. ‘라스푸틴’은 그가 방탕해서 얻게 된 성(姓)이 아니며, 라스푸틴이 잠시 거쳐 갔던 흘리스트(Khlyst)라는 기독교 종파의 집단 성교 관행도 그와는 무관하게 있어온 것이다.

라스푸틴은 제정러시아가 독일과 전쟁을 하는 것에 반대했다. 명색이 영성가였던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라스푸틴은 전쟁이 귀족에게는 부를 가져다주지만 농민에게는 고통과 죽음을 안긴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가 제1차 세계대전에 제정러시아가 휘말리는 것을 막으려고 한 데에는 현상유지가 자신에게 더 이롭다는 계산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장맛비가 하수구를 청소하듯이 전쟁은 기존의 모든 권력질서를 뒤엎어 놓는다. 반전론을 편 라스푸틴이 독일 스파이로 모함 받는 동안, 결정장애자였던 니콜라이 2세는 여론에 떠밀려 대독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 결과 전쟁 중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고 제정러시아가 망했다. 니콜라이 2세가 라스푸틴을 따랐다면 러시아와 세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최순실에게는 이런 참작 사항조차 없다.

‘인터넷 조폭’ 김동원(일명 드루킹) 사건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4월15일, 안철수 바른미래당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경기 파주시에 있는 느릅나무 출판사로 달려가 유리벽 너머로 사무실 내부를 엿보는 이벤트를 연출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선거를 통틀어 가장 큰 선거 범죄는 국민의당 ‘문준용 파일 조작’이다. 두 명의 측근을 감옥으로 보내면서 “참담하다”는 한마디로 그가 모를 리 없는 사실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회피했던 안철수는 저 의례를 통해 어느덧 범죄형이 되어버린 자신의 이미지를 순라군(巡邏軍) 이미지로 세탁하려고 했다. 그러나 의미는 그가 국민에게 보여준 계산된 이벤트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아무리 해봤자 범죄자는 속죄 없이 순라군이 될 수 없다. 의식적 행위에는 텅 빈 의미(전시용)만 있고, 진짜 의미는 무의식에서 솟아난다.

민방위본부는 매달 민방위 실황 라디오 방송이 끝날 무렵,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퀴즈를 낸다. 어느 달의 퀴즈는 이랬다. 화생방 경보가 내렸을 때 하면 안 되는 것은? ①라디오를 켜놓고 민방위본부의 지시를 듣는다 ②화생방 경보 지역을 산책한다 ③바람을 등지고 앉는다 ④화생방 마스크를 준비한다. 퀴즈의 난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민방위본부의 존재감이 각인될 텐데, 이 농담 같은 퀴즈는 민방위 훈련이 아무 쓸모없는 난센스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민방위본부는 자신의 창구를 통해 그것을 입증했다. 무의식은 이처럼 심층이 아니라 표층에 있다. 무의식이란 전모가 드러나 있으나 아직 의미를 붙이지 못한 것일 따름이다. 엿보는 자는 자기 분에 넘치는 것을 훔치려는 자다.

지난 4월19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JTBC ‘썰전’에 나와서 “(드루킹 댓글 조작은) 국정원 댓글 사건보다 더 무서운 사건”이라고 말해서 전 국민을 황당하게 했다. ‘경공모’가 2017년 대선에서 댓글 공작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도덕적ㆍ법적 죄과는 그것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유권자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지가 관건이다. 반면 국정원과 기무사의 댓글 조작은 유권자에게 단 한 표의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더라도 그것 자체로 중대한 불법이다. 무려 판사 출신인 나경원에게만 이 차이가 법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불법을 저지른 최순실과 법을 묵살한 나경원은 한 인물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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