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말레이시아 총선 D-20

# 비자금 조성 혐의 나집 총리
가짜뉴스법으로 입 막고
여당에 유리하게 선거구 조정
# 22년 철권통치했던 마하티르
탄압했던 야당과 손잡고 출마
# “여당이 승리할 것” 전망 속
말레이계 표 분산 땐 예측불허
수 십억 달러의 비자금 스캔들에 휩싸인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의 재집권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말레이시아 총선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지난 16일 북부 랑카위섬의 한 교차로에 집권여당인 국민전선(BN)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BN에 대항하고 있는 신야권연합, 희망연대(PH)를 이끌고 있는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는 "PH 깃발을 내걸면 누군가가 계속 철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저울 모양의 그림이 든 파란색 깃발이 BN, 하늘색 바탕에 두 개의 흰색 초승달이 마주보고 있는 듯한 기가 PH를 상징한다. 랑카위=정민승 특파원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60년간 말레이시아를 통치하고 있는 연합 집권여당, 국민전선(Barisan NasionalㆍBN)이 강적을 만났다. BN은 말레이시아 내 말레이, 중국, 인도계를 대표하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말레이중국연합(MCA), 말레이인도회의(MIC) 등 모두 13개의 당으로 구성된 연합여당이다. 그런데 이 집권당을 수 십 년간 이끌던 마하티르 모하마드(93) 전 총리가 과거 정적(政敵)들을 규합해 한때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나집 라작 현 총리를 조준하고 나섰다.

나집 총리는 국영투자기업(1MDB)을 통해 수십억달러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는데도 다음달 총선에서 또다시 재집권에 도전하고 있다. BN 이름 아래 22년간(1981-2003) 말레이시아를 철권통치하던 마하티르가 BN을 버리고 야당으로 간 것도, 그로부터 탄압받았던 이들이 그와 손을 잡은 것도 평소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 모두 부패한 나집 총리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지난 18일 쿠알라룸푸르 시내 도시고속도로 요금소 앞에 나집 라작 총리 사진이 들어간 국민선전(BN) 당 홍보물이 세워져 있다. 쿠알라룸푸르=정민승 특파원
들끓는 변화 목소리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는 한결 같았다. 압도적 비율의 사람들이 변화를 이야기했다. 이동 중에 대화를 나눈 9명의 택시기사들은 하나같이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인, 직장인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16일 행정도시 푸트라자야에서 만난 기계장비 영업사원 용 콴 홍(45)씨는 “경제 문제 때문이라면 더더욱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며 이웃 국가 인도네시아를 지목했다. 그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으로 바뀐 뒤 그 나라에는 외국인 투자가 크게 늘고, 그 때문에 경제가 성장했다”고 말했다.

앞서 15일 북부 휴양섬 랑카위에서 열린 희망연대(Pakatan HarapanㆍPH) 지지자 모임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PH는 마하티르 전 총리가 만든 말레이시아원주민연합당(PPBM)을 주축으로 인민정의당(PKR), 민주행동당(DAP) 등 군소 야당으로 구성된 신야권연합이다. PKR의 아지자 이스마일 대표는 마하티르가 감옥에 집어넣고 탄압한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의 부인이다. 안와르 전 부총리는 현재 동성애 혐의로 수감 중에 있다.

더운 날씨 때문에, 하루 5번의 기도를 모두 마친 오후 9시가 넘어 시작된 행사에도 불구하고 랑카위 공항 근처 공터엔 3,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운집했다. 참석자들에게 나눠줄 카레를 준비한 하심 모하마드 노(65)씨는 “2,000명이 온다고 해서 소 2마리, 닭 50마리를 잡았는데, 준비한 음식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왔다”고 말했다. 마하티르 전 총리의 오른쪽에 있던 아지자 대표는 “말레이시아는 이제 변해야 한다. 그 시작은 바로 랑카위 섬이어야 한다”며 마하티르의 랑카위 전략공천 사실을 공개했다. 마하티르 총리 재임 시절 본격적인 개발을 통해 관광도시도 거듭난 랑카위에서는 그의 인기가 높다.

지난 15일 랑카위에서 열린 희망연대(PH)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당초 이날 행사 참석자 수는 2,000명 정도로 예상됐지만 최종 3,000명 가까운 이들이 모여 마하티르의 높은 인기를 보여줬다. 랑카위=정민승 특파원
집권여당에 유리한 환경

그러나 일반 국민들의 이런 바람과 달리 이번 선거는 나집 라작 총리가 이끄는 BN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여권에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조정(게리맨더링)했고, 나집 총리의 1MDB 스캔들에 대한 보도 등 여당에 불리한 보도를 원천적으로 막고 있는 ‘가짜 뉴스 법’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지난 7일 총선을 위해 해산되기 직전까지 의회가 법 제정에 매달렸던 이슈다. 방송활동가 KC 나자리(35)씨는 “투표일을 주말인 5월5일(토)로 예상했지만, 투표일이 주중(9일)으로 잡혔다”며 “모든 것이 여당 중심”이라고 말했다. 주중 투표일 지정을 놓고 투표율을 낮추기 위한 계략이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정부는 이튿날 투표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이와 함께 부재자 투표를 군인, 경찰, 선관위 관계자, 선거 보도를 위한 언론 종사들에게만 허용한 것도 BN에 유리한 장치로 분류된다. 부재자투표 기회가 좁아지면 일반인들은 주소지로 가야만 투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소지 거주 비율이 높은 고령층의 투표율은 높고, 야당 지지표가 많은 젊은 층은 타지에 나가 생활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여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회사 방침상 익명을 요구한 외신기자 A씨는 “부재자 투표를 할 수 있는 직군은 집권여당 지지자 비중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전국 98개 선거구 구획이 재조정됐다. BN 측에서는 “15년만에 이뤄진 선거구 조정을 통해 민의를 더 충실히 반영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야권 성향의 중국계 인구 비중을 낮추고 말레이계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선거구를 조정했다는 비난이 많다. 2013년 총선 당시 ‘차이나 쓰나미’란 말이 나올 정도도 BN은 중국계 때문에 힘든 선거를 치렀다. PH는 쿠알라룸푸르 남쪽 반다르 툰 라작 선거구의 경우 당초 말레이계 비중이 52%였지만 이번 조종으로 58%로 높아졌고, 37%의 중국계 비율은 31%로 줄어들었다고 주장했다. 선거구 조정으로 격전지 중 하나인 슬랑고르주에서만 BN은 7석을 더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 18일 쿠알라룸푸르 시내 곳곳에 집권여당을 상징하는 푸른 깃발들이 걸려 있다. 쿠알라룸푸르=정민승 특파원
지난 18일 쿠알라룸푸르 시내 곳곳에 집권여당을 상징하는 푸른 깃발들이 걸려 있다. 쿠알라룸푸르=정민승 특파원
강력한 야권, 결과는 예측불허

이 외에도 나집 총리는 선심행정으로 표를 끌어 모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자신이 재집권할 경우 더 많은 지원금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일정 수준 이하의 월소득 가계에 보조금을 늘리고, 저소득층 대학생에게도 학자금 명목으로 지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25년째 쿠알라룸푸르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 교민은 “말레이시아에서는 선거 때마다 ‘4R’ 전략이 효과를 발휘했다”며 “이번 선거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4R은 지역(Region), 종교(Religion), 인종(Race), 링깃(Ringgitㆍ말레이시아 화폐단위)이다.

집권 여당이 정부조직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이번 선거가 집권여당의 바람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란 분석도 만만치 않다. 2003년까지는 222석 중 198석(90%)을 챙기는 등 수십년간 사실상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지만 이후 선거에서는 개헌 가능성인 3분의2(148석)에서 멀어지는 등 BN의 영향력이 감소 추세에 있다.

3선에 도전하는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의 재집권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말레이시아 총선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지난 18일 쿠알라룸푸르 시내 공사 현장에도 집권여당을 상징하는 푸른 깃발들이 걸려 있다. 쿠알라룸푸르=정민승 특파원

익명을 요구한 현지 정치평론가는 “BN의 게리맨더링 조치도 마하티르가 BN에 있을 때에는 작동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가 BN 밖에 있다”며 “말레이계 표가 BN으로만 쏠리지 않고 야권으로 분산된다면 PH가 이길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말했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재임 당시 말레이계 우대 정책을 통해 말레이 인구 60% 수준인 말레이계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쿠알라품루프ㆍ푸트라자야ㆍ랑카위(말레이시아)=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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