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다산독본] <6>구름으로 용을 따르던 시절

초시에 거듭 수석 합격하며
정조와 수 차례 만나 술도 마셔
막상 최종 시험엔 계속 떨어지자
정조가 속상해 “급제 하겠느냐”
드디어 늦은 나이에 급제하자
정조 “재상감 얻었다” 껄껄 웃어
처음 만난 지 18년 지난 어느 날
신하 보내 “곧 만나자” 전한 정조
그 이튿날 발병, 홀연히 세상 떠나
창덕궁 희정당 전경. 이곳에서 정조는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한 '미래의 재상' 다산과 많은 토론과 대화를 나누었다. 문화재청 제공
최초의 풍운지회(風雲之會)

다산은 22세 때인 1783년 2월, 세자 책봉 축하를 위해 열린 증광시(增廣試) 특별 과거 초시(初試)에 합격했다. ‘사암선생연보’는 선정전(宣政殿)에서 다산이 처음 정조 임금을 뵌 일을 적으며 ‘이것이 공의 첫 풍운(風雲)의 만남이었다(此公最初風雲之會也)’고 썼다.

풍운의 만남이란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라 한데서 나온 말이다. 용과 범이 임금이면 구름과 바람은 그를 보좌하는 신하다. 용과 범이 구름과 바람을 만나 조화를 부리듯,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난 것을 가리켜 쓴다. 이 글에서는 이날 이후 정조 임금과 성균관 유생 다산이 만나는 몇 장면을 들여다본다.

장면 1 : “문체가 아주 좋다”

26세 나던 1787년 3월 14일, 일종의 모의고사인 성균관 반시(泮試). 다산이 답안지를 제출하고 얼마 뒤 합격자 발표가 났다. 아직 제출하지 않은 사람도 많은 상태여서 다들 놀랐다. 다산이 수석으로 뽑혔다. 전체 13구에 글자마다 붉은 점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날 밤 성정각(誠正閣)으로 입시하라는 명이 내렸다. 일개 성균관 유생이 임금 앞에 불려간 것이다. 은촉이 휘황한데, 임금은 놀랍게도 편한 복장으로 기대 누워 계셨다.

“내 앞에서 네 답안을 소리 내어 읽으라.”

다산이 읽었다.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부채로 침상을 치며 가락을 맞추는 소리가 났다.

“훌륭하다. 좋은 표현이다. 마음에 든다.” 임금의 추임새가 계속 붙었다.

“황공하옵니다.”

“글 속에 학성군(鶴城君) 이유(李楡)와 강윤(姜潤)의 일을 인용했더구나. 두 늙은 신하의 일을 네가 어찌 알았느냐?”

“조보(朝報)를 보고 알았나이다.”

“음. 그랬구나. 문체가 아주 좋다.”

임금이 신하를 불러 ‘국조보감(國朝寶鑑)’ 한 질과 백면지(白綿紙) 100장을 하사케 했다. 학성군 이유는 영조와 나이가 같았는데, 당시 92세에도 건강하였으므로 궤장(几杖)을 하사한 일이 있었다. 이때 오간 이야기를 다산이 인용했던 듯하다. 당시의 신문인 조보에 수록된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요긴한 대목에서 활용했던 것이 특별히 임금의 마음에 더 쏙 들었다.

장면 2 : “술을 마셔라”

같은 해 8월, 반시에서 또 높은 성적을 얻은 직후, 임금이 다시 중희당(重熙堂)으로 들 것을 명했다. 군신이 석류나무 아래에 앉았다.

“‘팔자백선(八子百選)’을 받았더냐?”

“받았습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은?”

“받았습니다.”

“그럼 ‘국조보감’은?”

“그것도 지난번에 주셨습니다.”

“근래 새로 찍은 책은 다 받았으니, 상을 주고 싶어도 줄 게 없구나. 대신 술을 내리겠다.”

독한 계당주(桂餳酒)가 그릇에 가득 담겨 나왔다.

“술을 못 마시옵니다.”

“명령이다. 한 번에 쭉 다 마셔라.”

훗날 강진 유배지에서 둘째 아들 학유(學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이때 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포의로 있을 때 중희당에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에 가득 따라 주셔서, 사양하였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고 단숨에 이를 마셨다. 마음속으로 혼자 말하기를 ‘오늘 나는 죽었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다지 심하게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때 임금이 따라 주신 계당주는 세 번 증류 과정을 거쳐 도수가 엄청나게 높은 소주였다.

장면 3: “그렇게 해서 어떻게 급제하겠느냐?”

27세 나던 이듬해 1788년 1월 7일, 반시에 합격해 희정당(熙政堂)에 들었을 때 일이다.

“그간 지은 책문(策文)이 몇 편이냐?”

“20편입니다.”

3월 7일에 또 수석으로 합격하자 다시 하교하셨다.

“초시(初試)가 몇 번째냐?”

“회시(會試)를 못 본 것이 세 번입니다.”

“쯧쯧.”

이듬해인 1789년 1월 7일, 반시에 다시 합격했다. 다시 희정당에서 임금을 뵈었다.

“앞으로 나오너라.”

임금은 공연히 불러놓고 한 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초시가 몇 번째냐?” 지난번과 질문이 같았다.

“네 번째이옵니다.”

임금은 다시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해서야 급제는 하겠느냐? 그만 물러가거라.”

1차 시험에는 번번이 수석 합격 해놓고, 대과(大科)에서 최종 합격에 못 든 것이 속상해서 하신 말씀이었다.

장면 4 : 나라를 위해 쓸만한 사람

그게 자극이 되었을까? 1789년 1월 26일에 전시(殿試)에 나아가 보란 듯이 급제했다.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다. 채점을 할 때 심봉석(沈鳳錫)의 답안이 1등이었는데, 고시관인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2등감으로 생각했다. 가린 이름을 떼기 전에 임금이 말했다. “나이 들어 불쌍한 사람이 첫 번째 답안지이고, 나라를 위해 쓸 만한 사람은 두 번째 답안지이다.” 채제공은 이 말의 속뜻을 잘못 알아듣고 심봉석의 답안지를 1등으로 올렸다.

막상 이름을 열자, 심봉석은 아비의 이름을 쓰지 않아 실격 처리되었다. 2등으로 내려갔던 다산이 도로 장원이 되었다. 정조가 채제공에게 말했다. “경이 늘 말했지 않소? 임금은 명(命)을 만들고, 또한 상(相)도 만들 수 있다고. 심 아무개 같은 자는 관상이 남만 못해 내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오. 나는 나라에 쓰기에는 정약용이 그보다 낫다고 말한 것일세.” 임금은 처음부터 다산의 것을 1등 답안으로 여겼다는 의미였다.

다산이 내각에 있을 당시 왕명에 따라 지어 올린 글. 차상(次上)의 등수를 받았다. 개인 소장.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사진 제공.

다음날 희정당에 들어갔다. 임금은 들어오는 그에게 즉석에서 감사의 글을 짓게 했다. 얼떨결에 지은 구절 중에 “재주는 조식(曹植)의 솜씨가 아니온 데, 나이는 등우(鄧禹)가 재상 되던 때입니다”란 구절이 있었다. 조식은 조조의 아들로 일곱 걸음 걷는 사이에 시를 지었다는 천재다. 등우는 한나라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신이다. 다산의 말은 기대에 부응 못하고 너무 늦게 급제를 해서 송구하다는 뜻이었다. 이 구절을 본 임금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백년 만에 처음 재상 하나가 나왔는데, 이 사람이 또 재상이 되겠다 하니, 이게 웬일인가?” 앞의 재상은 채제공을 두고 한 말이고, 뒷얘기는 다산이 등우가 재상되던 나이 운운한 것을 장난으로 되받아 말씀하신 것이었다. 재상감을 한꺼번에 둘씩 얻어 기쁘단 뜻이었다. 한마디 한마디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뜻이 흘러 넘쳤다.

장면 5: “책 제목을 써서 들여보내라”

이로부터 11년 뒤인, 1800년 6월 12일. 다산 39세. 달 밝은 밤에 내각의 서리가 다산의 집에 들이닥쳤다. ‘한서선(漢書選)’ 10부를 들고 왔다. 임금의 하교는 이랬다. “책을 엮을 일이 곧 있을 게다. 즉시 들어오게 해야 하겠지만 주자소(鑄字所)가 벽을 새로 발라 지저분한 상태다. 월 말쯤 들어오거든 경연에 나오너라. 보내는 책 중 5책은 남겨두어 집안에 전하도록 하고, 나머지 5책은 책 제목을 써서 들여보내도록 하라.”

서리가 말했다. “하교를 받자올 적에 뵈니 낯빛과 말씀이 따뜻하시고 그리워하는 뜻이 있으셨습니다. 책 제목을 써서 올리라 하신 것은 그저 핑계고, 사실은 안부를 물으시려는 마음이신 듯합니다.” 서리가 떠난 뒤 다산은 감격해 울었다. 그 이튿날 정조는 발병해서 그 달 28일에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다산은 이 일을 임금께서 자신에게 영결(永訣)의 은전(恩典)을 베푸신 것으로 여겼다. 이 생각만 하면 피눈물이 옷깃을 적셔 곧장 따라 죽어 지하에서라도 임금의 모습을 뵙고 싶었노라고 술회했다.

정조가 ‘문체가 훌륭하다’며 그 읽는 소리에 가락을 맞추실 때 다산의 한 세상이 활짝 열렸다. ‘곧 부를 테니 다시 만나자’는 말씀 끝에 홀연 세상을 뜨면서 다산의 다른 한 세상의 문이 꽝하고 닫혔다. 정조와 함께 한 시간이 18년, 그 뒤 강진 유배의 기간이 또 18년, 해배 후 세상 뜰 때까지가 다시 18년이었다. 빛은 한꺼번에 몰려 들어왔다가 단번에 닫힌 뒤, 깜깜해진 채로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