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9월 1일, 개헌을 위한 여야 8인 정치회담이 타결돼 민정당 권익현(앞줄 왼쪽) 대표와 민주당 이중재(앞줄 오른쪽) 수석 대표가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민정당 윤길중, 최영철, 이한동 의원, 민주당 이용희, 박용만, 김동영 의원.
‘국가의 기본. 한 나라의 법체계 가운데 최고의 단계에 위치하는 근본 법.’ –헌법(憲法)의 정의-

#2016년 겨울. 온 국민이 ‘국가의 근본’을 따져 묻기 시작했다. 광장에 쏟아진 1,700만 개의 촛불이 밝힌 것은 ‘헌법’. 먼지를 털어내고 보니 너무 낡아 있었다. 국민의 주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헌법이 반대로 국민의 주권을 위협해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1987년 여름. 온 국민이 국가의 근본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목숨을 걸고 광장으로 나온 그들이 무너뜨린 것도 ‘헌법’. 그렇게 긴 독재를 끝냈다.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권리를 되찾았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 시위과 1987년 6월 항쟁. 한국일보 자료사진.

‘87년 체제’로 불리는 현행 헌법이 올해로 서른을 넘기며 정치권의 개헌 움직임이 바빠지고 있다. 국민들이 개헌 논의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지 1년 반, 1987년 제9차 헌법개정안이 선포된 지 31년 만이다. 6월 항쟁의 부름으로 만들어진 87년 헌법은 평균수명 4년 10개월이라는 역대 헌법들의 짧은 수명과 대비되며 시대를 건너왔다. 그렇다면 87년 체제를 만든 주역도 민주화 운동에 나섰던 시민들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박종철ㆍ이한열의 거리에서 탄생한 줄로만 알았던 오늘의 헌법은 소수 기득권 정치인들의 밀실에서 만들어진 반쪽자리였다.

개헌 정치회담 이끈 8인은 누구

1987년 6월,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모두가 ‘진짜 민주주의’를 지탱할 새로운 헌법을 갈망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6ㆍ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였을 때만 해도 그 염원이 실현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공이 정치권으로 넘어오자 순수했던 열망은 어느새 야욕으로 돌변했다. “말이 개헌 협상이지 사실은 정치협상과 다를 바가 없었지.” (이용희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당장 12월 대선을 코앞에 둔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는 하나같이 조급했다. ‘일단 대통령부터 되고 보자, 민주주의의 미래는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다.’ 87년 체제는 그런 위태로움 속에서 얼기설기 짜이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25일 전두환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이 청와대에서 개헌문제와 시국관련, 회담을 갖기 전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 해 7월, 여야의 개헌 협상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8인의 정치회담’이 결성됐다. 여당인 민정당에서 이한동ㆍ윤길중ㆍ권익현ㆍ최영철 의원이, 야당인 통일민주당에서 박용만ㆍ김동영ㆍ이중재ㆍ이용희 의원이 뽑혔다. 양당에서 4명씩 동수로 구성된 8인의 조합은 고도의 정치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겉으로는 ‘적은 인원끼리 모여 빠른 시간 안에 실질적 성과를 내기 위함’이라고 선전했다. 실상은 ‘깜깜이 졸속 진행’을 위한 밀실협상과 다름없었다. 4명의 민정당 의원들은 노태우, 전두환을 대변했고 4명의 통일민주당 의원들은 각각 2명씩 김영삼과 김대중을 대변했다. 그렇게 개헌 협상을 위해 만들어진 테이블은 ‘대선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를 셈하는 장이 됐다.

“양김이나 노태우나 협상 안건에 관해서는 세세한 걸 따지질 않더라고. 빨리빨리 끝내란 거야. 얼른 대선해야 되니까 시시한 거 가지고 다투지 말란 소리지.”(이한동 당시 민정당 의원) 100여 개의 쟁점을 두고도 불과 한 달 만에 합의안이 뚝딱 나왔다. 공청회 한 번 없이 시종일관 비공개였다. “8명이 밀실에서 만든 불행한 헌법이다”(한석봉 신한민주당 의원)라는 원색적 비난이 쏟아졌다. 독재 청산 헌법을 만드는 사람들 중 절반은 바로 그 독재체제의 주역들이었다.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진지한 성찰은 없을 수밖에. 그들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1노 2김'의 대통령 취임식 모습. 왼쪽부터 차례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내가 대통령 되려면… ‘5년 단임제’는 꼼수

“상대방이 될 경우 그다음을 자기가 노리기 위해서라도 대통령 임기는 길면 안 된다는 게 양쪽의 일치된 생각이었어요. 장기 독재 방지를 위해 연임은 안 된다는 생각도 같았죠. 그래서 나온 게 5년 단임제였습니다.” (이중재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중요하게 다뤄졌던 의제는 오직 ‘대통령의 임기’와 ‘단임제냐 중임제냐’였다. 정작 4년 중임제와 7년 단임제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다뤄지지도 않았다. 대통령을 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노태우ㆍ김영삼ㆍ김대중 3인 모두 자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행여 낙선하더라도 재도전이 멀지 않은 ‘5년 단임제’에 합의했다. 그렇게 어디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형적인 임기가 탄생했다.

8인의 의원들이 ‘1노 2김’의 집권 가능성을 재고 따지는 사이 시민의 요구는 묵살됐다. 헌법 전문에 삽입하기로 했던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 정신’은 협상 카드로만 이용되다 허무하게 빠졌다. ‘민주화 의제’는 뒷전으로 밀리다 못해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노동 3권 보장, 기본권 확립 등 국민의 실질적인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세부사항은 물론,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한 ‘거시적인 청사진’도 없었다. 오롯이 ‘대선’만을 겨냥했던 개헌. 막상 그 큰 기대를 안고 치른 대선에서마저 정권 교체에 실패하자 시민들의 정신적 허무감이 극에 달했던 것은 당연지사.

“대통령 직선제를 시행한 3공화국 헌법을 상당 부분 참조했습니다.” (이한동 당시 민정당 의원) 게다가 조문을 작성하면서 참고했던 것은 놀랍게도 20년 전 박정희 정부 시절의 헌법이었다. 심지어는 유신헌법에 들어갔던 조항이 그대로 87년 헌법에 포함되기도 했다. 대통령의 긴급명령권, 공무원의 노조금지법, 국가배상법,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권 등이 대표적이다. ‘유신의 잔재’로 알려진 이 조항들은 물론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1987년 6.10 민주화 운동 당시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무너뜨렸으니 됐다’는 안이한 인식

“개헌을 어떻게 할지의 각론은 정치인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죠. 직선제를 쟁취했으니 나머지는 헌법 기술자들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하태경 현 바른미래당 의원) 1987년 민주화를 이끈 시민사회의 동력은 끝내 정치적 힘으로 결집되지 못했다. ‘직선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주장도 물론 나왔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된 개헌 과정에서 묵살됐을 뿐이다.

무너뜨리는 것과 재건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음에도 ‘무너뜨렸으니 됐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당시 시민사회 내에서는 ‘직선제를 쟁취한 것으로 만족한다’는 안이한 인식이 중론을 차지했다. “일부 급진적인 주장들은 대안이 되기엔 생경했죠.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까지 가기엔 시간도 여유도 부족했고요.” (당시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김성식 현 바른미래당 의원) 정치권도 무관심했지만 민주화 세력 안에 ‘국가의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비전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의도적인 배제와 자발적 포기가 겹쳐졌다. 그렇게 시민의 존재는 ‘87년 헌법’에서 서서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10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들과 경찰이 대치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장기 독재를 경험한 시민들이 법과 제도에 대해 가지게 된 만성적인 불신 탓도 있었다. ‘정치혐오’에 지친 오늘날의 시민들이 “누가 되든 똑같다”며 투표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시민들은 ‘헌법’을 통해 정치제도를 재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공감하지 못했다. “어차피 제도는 허울뿐이다. 일단 선거를 하자.” 직선제가 되고 나면 정권교체는 떼 논 당상이라 여겼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한 철 대충 버틸 요량으로 지어낸 ‘가건물’이 장장 ‘30년 머물 자리’가 될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이한동 당시 민정당 의원과 이용희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제는 달라야 한다, 시민의 헌법으로

“(직선제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 5년’은 잘못했다.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와 연동될 수 있도록 4년 혹은 6년을 임기로 했어야 했다.” -이한동 당시 민정당 의원-

“장기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게 최고의 목표였다. 5년 단임제가 탐탁지는 않았지만 민주화를 뿌리내리려면 연임을 끊어야 했다. 다만 폭넓게 국민의 의사를 규합할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이용희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밀실의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8명의 정치인 중 현재는 절반 이상이 세상을 떠났다. 생존자 3명 중 이한동 당시 민정당 의원과 이용희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충분한 심의의 과정 없이 ‘5년 단임제’ 개헌을 한 것에 대한 뒤늦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들의 말처럼 장기 독재를 막기 위한 ‘단임’은 분명한 시대정신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만이 전부였던 개헌이었다.

2016년 겨울 제6차 촛불시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제 30년 만에 ‘국가의 근본’이 새로 닦인다. 대충 만든 집에 물이 새고 바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1987년 대선을 직후로 30년간 7개의 정권을 거치며 개헌 논의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2016년 촛불 혁명을 거치며 대한민국이 마주한 시대정신은 바로 ‘민주주의의 재건’.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촛불로 비춰가며 주권자로 다시 태어난 오늘의 시민에겐 ‘헌법’을 논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대한민국 헌법 제1조 -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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