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벨벳 아이린과 에이핑크 손나은. 한국일보 자료사진

평창동계올림픽 여성 컬링팀의 매력은 무표정이었다. 지금 이걸 해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표정으로 말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도 귀엽게 웃지 않는 젊은 여성의 얼굴’에 사람들은 놀랐다. 근엄하지 않은 신부님, 슬퍼하지 않는 상주를 만난 것처럼. 컬링 선수들은 내킬 때만 웃었다.

무표정할 자유를 극단적으로 박탈당한 존재, 여성 아이돌이다. 미소와 애교는 소녀, 요정, 여신으로 소비되는 아이돌의 목숨 같은 의무다. 그들에겐 ‘생각할 자유’도 없다는 걸 얼마 전 알았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어요.”(지난달 19일 팬미팅에서) 아이돌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이 ‘사이버 린치’를 당한 죄목이다. “나의 아이린이 페미니즘 책을 읽는 페미니스트라니!” 분개한 남성들은 아이린 사진을 자르고 불태웠다. “GIRLS CAN DO ANYTHING(소녀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렇게 적힌 휴대전화 케이스를 쓴 건 팬들이 에이핑크 손나은에게 물은 죄과다. 워너원 강다니엘이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고 새긴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면 그의 사진도 갈가리 찢겼을까.

‘소녀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 두려운 남성들은 “팬을 그만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이돌의 밥줄을 끊겠다는 협박이었다. 아이돌의 밥줄이 인기라는 걸 간파한 공갈이었다. 타인의 신념과 취향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이었다. 헬조선에서 살기 힘들어 죽겠으니 아이돌이라도 고분고분하라고 강요하는 비겁이었다. 잘 나가는 여성들을 향한 혐오였다. 불순분자를 태워 죽인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은 새 세상이 싫은 이들이 저지른 악랄한 폭력이었다. 아이린에 대한 분노를 ‘사진 화형’으로 폭발시킨 건, 그들의 목적이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먹고 살려면 페미니스트가 아님을 입증해야 하는 일’은 자주 벌어진다. 주로 여성 노동자가 취약한 처지인 곳에서다. 온라인 게임의 기초 그림을 그리는 여성 원화가 A씨는 최근 여성민우회 등의 트위터 계정을 구독하고 생리대 가격, 낙태죄 폐지 관련 글을 공유한 ‘잘못’을 사과했다. 게임회사 대표는 그를 ‘신문’한 끝에 “A씨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며 분노한 남성들을 달랬다. 2017년 방송사 작가가 사과문을 쓰고 교체된 것도, 2016년 게임회사 성우가 잘린 것도 페미니스트 성향을 ‘들킨’ 뒤였다. 쩨쩨한 그들은 오늘도 ‘페미니스트일지도 모르는 여성 을(乙)’들의 SNS 계정을 뒤진다. 2018년에 ‘사상 검증’이란 말을 이렇게 흔하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특유의 근엄한 표정으로 평창동계올림픽 컬링 결승전을 치른 김은정 선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페미니즘은 괴물이 아니다. 누구나 평등하자는 절박한 요구다. 그런 페미니즘에 반대하겠다면, 그건 자유다. 그 자유를 누군가의 밥줄을 쥐고 흔드는 식으로 행사하는 건 너무 저열하지 않은가. “너 요즘 회식 자꾸 빠지네. 계약 연장이 언제더라?” “그 집 애랑 우리 애랑 싸웠다네요. 다음달에 방 빼 줘요.” “뭘 그리 빡빡하게 구나. 다른 거래처에서 입질한다는 얘기 내가 안 했나?” 가지지 못한 자의 세상을 무너뜨리는 건 그렇게 쉽다.

대통령이, 영부인이, 장관이, 국회의원이, 재벌 3세가, 대기업 임원이, 건물주가 페미니스트임을 단죄당하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박원순 서울시장,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82년생 김지영’을 읽었지만 아무도 그들의 밥줄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직 어리고 여린 이들이 표적이 됐다. 어리지도 여리지도 않은 기자인 나의 밥줄 역시 이 글을 쓰고도 무사할 것이다.

안데르센이 ‘인어공주’를 쓴 건 1837년이었다. 사랑을 위해, 왕자님을 위해, 인어공주는 기꺼이 목소리를 바쳤다. 더 이상 인어공주는 없다. 그런 시대는 갔다. 생계를, 목숨을 위협해도 여성들의 목소리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어리석음을 그치라. 불태워야 할 건 아이돌의 사진이 아니다.

최문선 문화부 차장 moonsun@hankookilbo.com

최문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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