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3>최아룡

2003년 TV 시사 프로그램 출연 공개 ‘미투’
서강대 교수 성폭력 고발… 가해자 아직 강단에
요가로 남도, 자신도 치유하며 얻은 ‘제2의 삶’
2003년 TV 시사보도 프로그램에 출연해 교수 성폭력을 ‘미투’했던 최아룡씨. 최씨를 15년 만인 13일 서울 마포구 ‘세상 속으로 가는 요가원’에서 다시 만났다. 신상순 선임기자

15년 전에도 ‘미투’가 있었다. 71년생 희정씨, 세상이 그녀에게 붙인 수식어는 ‘성폭력 피해자’다. 결코 원치 않았고, 상상조차 한 적 없던 정체성. 이것이 그녀의 인생을 뒤바꿨다. 진짜 이름 최아룡(47), 그녀는 이른바 ‘서강대 김 교수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다. 15년 전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미투’했다. 이름만 ‘희정’이란 가명을 썼다. 요즘도 공개 미투가 ‘뉴스’가 되는 세상인데, 2003년에야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멈추게 해야 한다”는 의지에서 결정한 정면돌파였다.

그렇게 지난한 싸움이 시작됐다. 2001년 최초 성추행에, 2003년 2차 가해, 잇단 민ㆍ형사 소송과 법원의 벌금형 유죄 판결, 대학 측의 해임 징계를 번복한 교육부(당시 교육인적자원부) 교원징계재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가해 교수의 복직. 몇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센 파도였다.

인생의 파고를 넘어 그녀가 얻은 건 자유, 그리고 치유다. 강단에 서기 위해 박사 과정을 밟던 중이었으나 학교를 떠나 ‘독립 학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자신을 단련하고 치유한 요가로 다른 피해자들의 상처도 어루만지며 살고 있다. 그녀가 만든 요가원 이름이 ‘세상 속으로 가는 요가원’인 이유다. 생존자로 살아남아 남도 살리고 있는 그녀의 발자취는, 그래서 개인의 것이 아니다. ‘희정’으로 미투해, ‘아룡’을 찾은 이 스토리는, 그래서 이 시대 여성들의 이야기다.

“내가 받은 사회적인 도움을 갚는 것이기도 해요. 그때 나는 이미 한번 죽었고, 이후 생은 새로 사는 제2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녀의 곁엔 어머니가 있었다. 자신이 당한 일을 털어 놓은 딸과 “엄마가 기도 열심히 했는데 왜 내 딸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했던 어머니. 이런 대화를 주고 받은 모녀의 심정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했다. “이런 문제는 해결해야지. 네가 희생한다고 생각하거라. 그나마 다행이다.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벌어진 사건이니 공론화하면 반드시 처벌이 될 거야.”

또 한 명의 든든한 우군도 생겼다. 그녀의 투쟁을 자랑스러워 하는 독일인 남편을 만나 함께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녀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2003년 미투했을 때 당시만 해도 드문 용기를 가진 그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다시 만난 그녀는 다른 사람이 돼있었다. 불안과 긴장이 섞였던 눈빛은 맑아졌고, 표정엔 생기가 돌았다. 그간의 역사를 듣기에 4시간은 짧았다.

문답을 시작하기 전, 먼저 서강대 김 교수 성폭력 사건의 전말을 전한다. 최초 사건은 2001년 10월 31일 대학원장이었던 김 교수와 대학원생들의 회식 자리에서 벌어졌다. 김 교수는 조교였던 그녀를 옆자리에 앉힌 뒤 “너를 여인으로 만들어 주겠다”, “네가 결혼하면 너와 네 남편 사이에서 잠을 자고 싶다” 등의 언어 성희롱과, 손과 뺨을 만지고 볼에 입을 대는 성추행을 했다. 서강대 여성위와 총학생회, 여성단체와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문제를 제기했고, 이듬해 3월 서강대는 ‘정직 3개월’의 징계를 했으나 이미 김 교수가 안식년에 들어간 상태여서 하나 마나 한 처벌이 됐다. 2003년 복직한 김 교수가 다시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면서 문제가 됐고, 대학은 해임을 결정했다. 그러나 교육부의 교원징계재심의위가 김 교수의 재심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징계 수위를 ‘정직 3개월’로 낮췄다. 김 교수는 아직도 강단에 서고 있다.

최아룡씨가 말하는 ‘미투 이후 15년’의 시간. 그는 자신이 받은 사회적인 도움을 갚으려 지금도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지금도 당시 일은 고통스러운 기억이죠.

“안희정 전 충남지사나, 정봉주 전 의원 성폭력 의혹 피해자들의 미투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옛날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 기억하느냐’, ‘기억이 잘못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8년 전, 10년 전에 당했다면서 그렇게 생생할 수가 있느냐’…. 저만 해도 검찰에서 받았던 대질 조사는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런데 사건 현장은 가해자의 표정, 어조, 당시 앉았던 사람들 위치까지 모조리 기억해요. 이를테면 성추행 전에 가해 교수가 고기를 굽는 집게를 집어 들더니 불쑥 맞은편 남학생을 가리키면서 ‘내가 이걸로 네 배를 찔러서 한 바퀴 돌린 다음에 빼내면 내장이 나온다. 그러면 내가 그걸 씹어 먹을 거야’라고 한 것, 옆에 앉았던 학생과 영화제 얘기를 하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교수가 숟가락으로 ‘대가리 대!’하면서 그 학생의 머리를 딱 딱, 때렸을 때 났던 소리까지 잊히지 않아요.”

-피해자들은 사건 직후엔 한동안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하잖아요.

“그렇죠. 교수가 옆자리로 오라고 했을 때 끝까지 버티고 가지 말 것을. 그런데 그때 거부했어도 아마 언젠가는 당했을 거예요. 저만 해도 그래요. 피해를 당하기 전에 대학원 온라인 게시판에 ‘(가해자인) 김 교수가 실력도 없고 술자리에서 성희롱도 했다더라’라는 취지의 글이 올라온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교수가 저를 부르더니 그에 반박하는 주장을 올리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황당했죠. 고심 끝에 글을 올리긴 했는데 성희롱 부분은 사실 여부를 모르니 쓸 수 없어 뺐다고 했어요. 그런데 결국 그 뒤에 내가 그 교수한테 성폭력을 당한 거예요. 내가 피해자가 되는 데 7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어요. ‘그 일 때문에 벌을 받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죠.”

-최근에 연달아 남성 권력자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가 있었는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피해자가 공개한 안 전 지사의 메시지 중에 ‘괘념치 말거라’라는 대목이 있었잖아요. 그걸 보고 (내 사건) 가해 교수의 ‘너를 여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발언이 떠올라서 너무 기분이 나빴어요. 둘 다 자신이 무슨 대단한 존재인 듯한, 사극의 임금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있는 건지….”

-당시로선 ‘교수 성폭력 사건’에 문제제기 하는 건, 정말 쉽지 않고 흔치도 않았던 일인데 어떻게 결심하셨나요.

“한국에서 대학원생에게, 특히나 박사과정 3학기째였던 저 같은 사람에게 교수란 생사여탈권을 쥔, 내 목숨 줄을 잡고 있는 존재죠. 그런데 ‘놔두면 언젠가는 더 심각한 사건이 날 것이다. 여기서 멈추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은 그것이 나를 보호하는 길이라고요.”

-특히나 방송에 출연해서 요즘 식으로 미투한 건 대단한 일이었죠.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를 할지 여부를 (제작진과) 상의하는데, 갑자기 ‘내가 숨어 있어야 할 사람인가?’하는 생각이 저 아래서 팍 치고 올라왔어요. ‘나는 떳떳하다’라고 되뇌었죠.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마치고 방송사를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갈 때는 펑펑 울었어요. 내 안에서 뭔가 쑥 빠져 나가는 느낌에 허탈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더라고요. 이번에 얼굴을 내놓고 미투한 분들도 심적으로 굉장히 고통스러울 거예요. 일단 누군가 자기를 ‘피해자’로 알아본다는 게 무엇보다 부담스러울 테고요. 저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힘들게 시작한 공론화로 길고 힘든 싸움이 시작됐지요?

“그렇죠. 누구나 그랬겠지만, 내가 성폭력 피해자가 될 줄은 몰랐어요. 한국여성민우회의 상담을 받고, 여학생위원회 같은 학내 기구와 공대위를 만들어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정신과 상담을 받고 하는 일들이 이어졌죠. 특히 어머니가 정신과 상담부터 받으라고 하셨어요. 충격이 컸을 테니, 그걸 걱정하신 거죠. 그래서 우연히 찾아간 병원에서 만난 의사가 김혜남 선생님(정신과 전문의)이에요. 제 얘기를 쭉 들으시고는, 저를 많이 격려해주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좀 힘들지 모르겠지만, 먼저 가는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여성을 위해 나서면 좋겠다’고요. 부모님도 물론 용기를 주셨고요.”

최아룡씨는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한 이후 후유증을 치유하는 데 요가가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명상을 하면서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과 불안, 긴장감을 다스리고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그런데 해결이 쉽지 않았죠. 다른 사안과 결부 지어서 교수를 의도적으로 음해한다는 ‘음모론’이나 ‘꽃뱀론’도 나왔고요.

“맞아요. 그래서 보통 대학에서 학생이 교수에게 성폭력을 당해도 이를 공론화했을 때 닥칠 후폭풍이 두려워서 덮기 마련이지요. 저만해도 공론화하고 나서 제가 ‘천덕꾸러기’가 된 심정이었어요. 분명히 ‘트러블 메이커’는 가해자인데, 마치 내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학교 진상규명위에 가서 하는 진술만 해도 그래요. 나이 든 남자 교수들 앞에서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죠. 게다가 당시 일부 진상규명위원들은 ‘(가해) 교수의 가족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유학까지 가서 어렵게 된 교수다’, ‘가해자에게 어느 정도 수위의 징계를 주면 좋겠느냐’ 등의 말까지 했어요.”

“저 많이 밝아지지 않았나요”라며 피해 당시 상황을 말할 때도 담담했던 그녀가 이 대목에서는 북받친 듯 했다. 그래도 붉어진 눈시울이 눈물로 젖진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는 책 한 권을 내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성경책 두께의 480쪽짜리 묶음이었다.

“자료들을 모아서 엮었어요. 2006년에 만든 책이죠. 제가 겪은 일과 당시 일기처럼 인터넷(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운영한 일종의 블로그)에 썼던 글들, 민ㆍ형사 판결문, 관련 기사들, 심지어 당시 돌렸던 서명용지도 넣었어요. 피해자로서 그때 내 심정을 당시 어투까지 그대로 기록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이렇게 자료집으로 만들어두면, 다른 피해자에게도 쓸모 있는 정보가 될 테니까요. 그리고 저 자신도, 이렇게 매듭을 지어야 털고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한발 더 나아가, 그녀는 최근엔 당시 사건과 해결 과정을 자신이 증언하는 영상도 촬영해놨다고 했다. 유튜브에 올려, 미투를 고민하거나 성폭력을 당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정보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야기하는 그녀의 뒤쪽에 동영상을 찍을 때 활용했던 화이트보드가 있었다.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자리 배치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이후의 삶은 어땠나요?

“우선, 학위를 포기했어요. 200권쯤 되던 전공 책도 다 버렸죠. 일단 성추행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대학 건물 안에 있기가 어려웠어요. 학내 모든 구성원들의 시선도 신경 쓰였죠. 온 몸의 세포가 모두요. 그때 요가에 집중했어요. 1996년 요가를 시작해서 2001년에는 강사 자격증을 따뒀거든요. 요가를 하면서 일단 내가 건강해지는 것만 신경 쓰자고 생각했죠. 호흡과 명상이 큰 도움이 됐어요. 피해 후유증 중 하나가 굉장히 감정 기복이 심해진다는 건데 그럴 때 특히 숨을 고르고 냉정을 찾을 수 있었죠.”

그리고 그녀는 자신처럼 상처받은 이들에게 요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침 김 교수 사건으로 연이 닿은 여성단체를 통해서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시작해 미혼모, 장애아동, 알코올 중독자, 노숙자로 범위가 넓어졌다. 기관에서 요청이 오면 요가 수업을 하기도 하고, 자원봉사도 했다. 지금도 그녀는 장애인 복지관, 요양병원, 정신병원 7곳에서 요가를 가르친다.

최아룡씨가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요가가 어떤 도움이 됐나요?

“다시 자신감이 생겼어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표정도 없고 요가 매트에도 앉지 않으려 하던 장애아동이 어느 순간 동작을 따라 해요. 시선도 마주치길 꺼려했던 아이의 눈이 순간, 반짝이는 게 보일 때가 있죠. 되레 제가 행복해지고 치유 받는 시간이에요. 다시 살아갈 힘도 생겼고요. 나중에는 일본에서 ‘요가 테라피스트’ 과정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죠. 지금은 요가학회 활동도 하고 있어요.”

-원래 강단에 서려고 박사 학위 과정을 시작한 것일 텐데, 전공 공부는 아예 접으셨나요?

“계속 하고 있어요! 다만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났을 뿐이죠. 대신 전공 관련 국제학회에 자발적으로 프로포절(논문 접수)을 하면서 찾아 다니고 있어요. 그렇게 발표한 사례가 10여 회 정도 돼요. 독립한 거죠.”

-요가 봉사에, 요가 치유 사례 기록에, 전공 활동까지 몸이 하나라도 부족하겠어요. 그렇게 사는 이유가 뭘까요?

“굳이 그 분야에서 내가 이름을 날리겠다거나, 이제 와서 교수를 할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을 하면서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볼 수 있게 된 걸, 더 재미있게 내 방식대로 공부하는 거예요.”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면 굳이 미투 하려고 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그렇지만 얘기하면 삶에서 무거운 짐 하나 털어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많이, 격려해주세요.”

-성폭력 사건이 인생에 준 의미는 무엇인가요?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무언가를 걷어낸 느낌이에요. 세상을 새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죠. (저명한 프랑스의 사상가인) 푸코, 데리다 등 책상 앞에서만 하는 공부가 얼마나 허무한지 알게 됐어요.”

최씨는 자신이 깨달은 ‘삶의 도’를 “아닌 건, 아닌 거다”라는 말로 압축해 표현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그는 이후 인생의 동반자도 만나 2008년 결혼했다. 성폭력 피해와 이후의 과정을 듣고 “당신 덕분에 학교가, 사회가 바뀌었을 거다. 대단하다”라고 한 독일인 남편이다. 남편 가족들은 그녀를 ‘용기 있게 올바른 일을 한 여성’으로 자랑스러워 한다고 한다. 이것 역시 그녀가 투쟁으로 얻은 삶의 선물인지 모른다.

그녀에게 ‘삶의 도, 삶의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닌 것은 아닌 거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해서 난 자유를 얻었어요.”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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