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오른쪽 깜빡이 켜고 좌회전

[36.5] 오른쪽 깜빡이 켜고 좌회전

유럽회의주의(Euroskepticism)를 표방하며 2015년 10월 집권에 성공한 폴란드 법과 정의당(PiS)은 유럽연합(EU)의 골칫거리다. EU 가입국 의무사항인 이민할당제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법부 장악을 통한 3권 분립 훼손,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ㆍ통합ㆍ연대라는 EU 기본가치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로부터 곱지 않은 눈길을 받는 PiS이지만, 자국 내에서는 승승장구 중이다. 농민ㆍ광부ㆍ연금생활자ㆍ미숙련 노동자 등 이른바 세계화 소외계층으로부터 압도적 성원을 받으며 40% 넘는 지지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정치적으로는 반이민ㆍ민족주의를 강조해 불안감에 사로잡힌 소외계층들을 달래고, 사회정책에서는 기존 좌파보다 더 과감하게 복지제도를 확장하는 게 PiS의 전략이다. 특히 집권 초기인 2016년 도입한 패밀리 500플러스라는 가족수당(아동수당)은 PiS의 히트상품으로 자리잡았다. 18세 이하인 자녀(둘째 자녀부터) 1명 당 매달 약 16만원을 지급하는데, 부모가 일하는지를 심사하지 않는 관대한 제도다. 이 덕택인지 한 때 11.9%에 달했던 폴란드의 아동빈곤율은 2.8%(세계은행)로 뚝 떨어졌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 제도가 폴란드를 ‘복지국가’로 바꿔 놓았다고 호평하기도 했다.

기실 PiS처럼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좌선회한 사회정책을 시도하는 일은 유럽에서는 보편적 흐름이 되고 있다. 반이민주의자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이끄는 헝가리 피데스당은 뉴딜정책과 유사한 공공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지난해 독일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구 동ㆍ서독 지역 주민 간 연금 격차를 해소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극우 정치이념과 좌선회한 노동ㆍ복지정책의 결합이라는 모순이 있다지만 유럽 포퓰리즘 정당들은 기본적으로 정부보다 시장을 중시하는 우파 정당이다. 지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좌향좌 행보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시사적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에는 복지 확대라는 시대 흐름을 따라 ‘MB식 시장맹신주의’를 극복하려 했던 한국의 우파 정당이 다시 자기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뒷걸음질 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동수당 관련 법안이 지난달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벌어진 일들은 희극적이다. 올해부터 0~5세 아동 1명 당 10만원을 지급하기로 한 정부 법안은 자유한국당의 강력한 반대로 부모의 소득과 자산을 조사한 뒤 90%에게만 지급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법안 심의 과정에서 한국당 의원들은 “묻지마 식 퍼주기다”, “충분히 먹고 살만한 아이들까지도 줘야 하나”식으로 공세를 펼쳤는데, 결국 소득 상위 10%분 예산 1,800억 원을 아끼기 위해 소득자산심사를 위한 행정비용으로 1,000억 원 가량을 투입해야 하는 기형적 결과로 귀결됐다. 고정된 우파 논리에 집착, 2010년 무상급식 논쟁 이후 대세로 자리잡은 보편복지 프로그램에 흠집을 내겠다는 아집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행태다.

반대로 독배인줄 알고 든 잔이 성배가 될 수도 있다. 지난달 한국당이 근로기준법 개정안 통과에 전향적으로 나섰는데, 법 통과로 민간기업에서도 관공서 공휴일을 의무적으로 유급휴일로 지정해야 하고, 근로시간은 주 52시간으로 단축됐다. 조직ㆍ정규직 노동자와 미조직ㆍ비정규 노동자간 노동시간 양극화 문제 해소,‘저녁이 있는 삶’의 추구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다. 법안 통과 이후 요즘 이 당 의원들은 자신들이 대변해 온 주요 지지층(사업주ㆍ영세 소상공인)들로부터 “사업 망하게 할 일 있느냐”는 원색적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후일 집토끼 대신 산토끼를 잡으러 나선 ‘담대한 기획’으로 보답 받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우파 정당에게 담대한 기획을 요구하는 이유다. 미국에서 우파의 철학과 가장 거리가 먼 기본소득제를 도입하려던 대통령은 공화당의 강경 우파 리처드 닉슨이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이왕구 국제부 차장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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